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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49화 (149/412)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지는 않는, 겨울이 코앞인 가을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포근하고 쾌청한 날이었기에 이동에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피크닉가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잠깐의 소란을 뒤로 한 우리는 침묵을 유지하며 살얼음판 위를 걷듯 긴장한 채 행군을 이어나갔다.

딱히 피해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을 배려했다기보단 되도 않는 습격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되도 않는 습격'이란, 정말 개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대충 봐도 알 수 있는 우리를 굳이 습격해서 뭐라도 털어먹겠다는 심보로 달려드는 도적 혹은 그에 준하는 정신 나간 또라이들로 인한 트러블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금 전부터 뭐가 자꾸 따라붙는 거 같던데."

귀를 쫑긋 거리며 방금 전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실리에가 반응했다. 기척을 엄청나게 잘 숨긴 것도 아니라서 사실 마을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가 눈치를 챈 상태였으나 그 누구도 굳이 신경쓰지 않을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간 보는 거겠지. 생각이 있으면 굳이 힘들여서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건드릴 이유가 없잖아."

이티스엘은 그래도 명색에 노예 금지 국가다. 내가 유독 최근 들어 노예 상인 놈들과 엮이는 일이 많았던 거지 평범하게 살면 불법 노예 상인 같은 놈들은 이티스엘에서 평생에 한 번 보면 많이 보는 게 맞다. 불법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게 결코 쉬운 환경은 아니라는 말이지. 노예 상인 놈들이 산적들과 커넥션까지 만들어가며 몰래 사람들을 잡고 다니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 커넥션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도적놈들이 백날 사람 잡아다가 팔겠다고 접선하더라도 보증 안 된 놈들이라서 문전 박대를 당하게 된다는 소리다. 심한 경우엔 도적놈들을 싹 다 죽이거나 잡아버린 뒤 그놈들이 붙잡았던 사람들과 함께 도시에 양도하여 '우리는 이렇게 선량합니다. 합법 노예만 취급합니다.' 같은 평판작의 재료로 쓰일 뿐이다.

그게 엄선되지도 않아 별 가치도 없는 이들을 노예로 팔다가 꼬리 잡히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일 테니까.

결국 일반적인 도적놈들이 우리를 건드리고 습격에 성공하여 무언가를 챙긴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도 않는 생필품 일부와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 여섯의 소지품 조금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별 거 없는 소득이 고작인 상황이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굳이 털어먹겠다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거야말로 진짜 천하의 돌대가리...

"헤헤. 여자들을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어딜 가시나 모험가 양반들?"

"씨발 돌대가리 새끼들."

"뭐, 뭐?"

"씨발 돌대가리 새끼들."

스무 명이 넘는 도적 찌끄래기 새끼들을 이끌고 숲길에서 모습을 드러낸 천하의 돌대가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니, 표정을 구기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네가 구겨?"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그냥 사냥감 물색이려니 하고 넘어가 주려고 했던 내 자비로움이 흙발로 걷어차였는데 좆같아도 내가 좆같아야지? 가뜩이나 불만스러워서 당장 칼을 빼 들고 싶을 지경이거늘 눈앞의 덩치 큰 돌대가리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도끼를 꺼내 들며 위협했다.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거기 있는 엘프만 두고나면 곱게 보내주려고 했..."

"여기서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너희 중 누군가가 앞으로 평생 기억하고 품고가야 하는 교전 수칙 그 첫 번째."

"뭐? 이 새끼가 아까부터 뭐라는..."

"덩치가 산만한 검은 머리 앞에서 아리따운 백금발 엘프를 걸고 넘어지지 말 것."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 달려들어 전력을 다한 스트레이트 훅으로 도끼를 든 놈의 안면을 박살 내버렸다. 반응? 이딴 놈들이 반응하면 쪽 팔려서 땅에 대가리 박고 죽고 만다.

주먹질 한 방에 시체가 되어 버린 놈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손목을 푸는 나와 달리 그 뒤에서 의기양양하게 비열한 미소나 짓고 있던 도적놈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교전 수칙 그 두 번째."

"씨, 씨발! 공격! 공겨어억!"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않을 것."

범법자 새끼들에게 엘프 노예란 대체 어떤 존재인 것일까...?

당장 아실리에만 하더라도 대체 어쩌다가 전문 엘프 사냥꾼 같은 놈들에게 당해서 노예로 끌려다니다가 나와 만나게 된 것인지 의문일 정도로, 엘프는 결코 쉬운 존재가 아니다.

당장 인간 나이 서른도 안 먹은 주제에 운석을 떨구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대륙에 퍼져 있는 판타지 세계에서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를 노예로 잡는 게 쉬울리가. 무슨 히키코모리 엘프라서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진짜 막 20살도 안 먹은 파릇파릇한 엘프일 가능성? 차라리 길가다 마검을 줍지.

근데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현실 직시를 못 하는 정신병자들이 넘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정도면 사실 누군가가 애먼 놈들 꼬드겨서 사주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네 진짜. 제발 누군가가 이 괴현상에 대해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뒈져 씨발!"

눈치가 빠른 놈들은 이미 나 혼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접근조차 꺼리지만, 어딜 가나 눈치 없는 놈들은 존재하는 법. 어설프게 휘둘러지는 검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안면에 잽을 때려 박는 것만으로도 도적은 실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연계조차 못해 토너먼트하는 것처럼 따로따로 달려드는 놈들을 그렇게 저승길로 보내기를 열 번 정도 반복했을까?

슬슬 공포로 점칠되며 도망을 계획하는 것 같던 도적놈의 턱주가리를 어퍼컷으로 쪼개놓고 둘러보니 다른 도적놈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쳐 버렸다. 심지어 다른 일행들은 나에 대한 신뢰가 넘쳐흐르는 탓에 그냥 멀뚱히 서서 구경만 했는데도 이런 결과라니. 허무하기 그지없다.

"허어... 그야 아실리에 씨가 엘프이긴 하지만... 요즘 도적들 속내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이없는걸 봐버렸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엔달은 나만큼이나 어처구니없어 보였다.

"고블린도 저것보단 머리가 좋을 거 같은데. 그... 정말 감이 안 오나?"

"오히려 어중간하게 사람을 해하고 힘에 취한 것들일수록 뵈는 게 없는 법이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네."

심히 당혹스러워 보이는 예카트리나에게 차분하게 설명한 긴이 도적놈들 중 하나가 차고 있던 수통을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씻게나."

"괜찮...아니군요. 감사합니다 긴."

"음."

안면이 함몰되거나, 말 그대로 겉으로는 티 안 나게 두개골이 쪼개지거나 혹은 충격으로 목이 부러지는 형태로 죽은 놈들에게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꼴로 만든 내 건틀릿은 결코 보기 좋은 꼴이 아니었다.

"주먹으로 쓰러트린 건 현명한 판단이었네. 죽는 건 똑같을지 모르나, 저들에게 덜 자극적일 테니."

"사람을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게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거야 잔인하게 패 죽일 때의 이야기지."

"그런가요?"

"대부분은. 적절한 현실과 비현실이 섞이면 공포보단 동경과 선망을 불러일으키지."

솔직히 검 뽑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하찮은 놈들이라서 주먹을 쓴 거였지만 긴의 말을 듣고 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건틀릿에 묻은 피와 살점을 적당히 닦아내고 돌아보니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니까.

"그나저나 명색에 수도 인근인데 관리 안 되는 용병단에 도적에 난리도 아니군요. 원래 이런가요?"

"전쟁은 나라를 갉아먹는 법이니까. 오히려 겨우 이 정도인 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네. 전쟁이 없음에도 더 심각한 나라도 많아."

다시금 가엔달의 지시에 맞춰 이동을 준비하고 있는 주민들을 바라보는 긴은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분명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그는 본인이 말한 심각한 광경들을 숱하게 봐 왔을 것이리라.

아무튼 이것도 꼴에 싸운 거라고 순번을 바꿔 이번엔 뒤에 있던 예카트리나가 앞으로 나오고 나와 아실리에는 후열로 빠지는 식의 조정이 있고 난 뒤에야 우리의 행군은 다시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내 옆에서 갸웃갸웃하며 뭔가를 고민하던 아실리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 엘디는 가는 길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거 같지 않아...?"

"내가 사정이 있다 보니 사건을 좀 찾아가는 경향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몰고 다닌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하필 노리던 용병단이 약탈을 진행 중이었고, 그 용병단을 처리하고 구해 준 사람들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도적에게 습격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상당히 신빙성 넘치는 주장이었지만, 사실 드문 걸로 지차면 이미 내 인생부터가 보기 드문 종류의 끝판왕이었기에 별 감흥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실리에에게 덤덤히 대답해주었다.

"이 정도는 뭐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

"...정말 묘한 곳에서 침착하고 초연하단 말이지, 엘디는."

애당초 환생까지 한 마당에 겨우 사건사고가 도미노처럼 터졌다는 것만으로 일희일비하는 건 좀 그렇지. 상상을 초월한 머저리들을 보고 화딱지가 나는 건 본능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렇다고 환생한 걸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냥 어깨나 으쓱이는 것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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