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도망?!"
도망. 혹은 도주. 위협으로부터 신변을 지키기 위해 달아나는 것.
그리고 지금 예카트리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을 향해 길드의 접수원이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때문에 예카트리나가 꽤나 큰 소리를 낸 거고.
불행 중 다행으로 한 번의 습격을 제외하면 무사히 관문 도시에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상황과 부당한 대우였다.
그야말로 까칠함을 덕지덕지 모아 만든 듯한 인상의 여자 접수원은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가엔달님을 필두로 한 세 분은 의뢰 중 도주로 인한..."
"하아, 아무래도 먼저 도착했던 놈들이 사람 속여먹고 보수를 들고 빠져 나간 모양인데, 우린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별도로 추적에 나섰단 말입니다. 심지어 사건의 원인이 되는 용병단마저 처치하고 주민들까지 구했는데 다짜고짜 처벌이라뇨?"
억울하기 그지없는 평가를 일방적으로 통보 받았음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이들이 올바른 인성과 상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리라. 일반적인 모험가였으면 당장 뭐 하나 박살 내고 시작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니까.
결코 내가 수도에서 비슷한 경우를 당했을 때 일단 엎어보고 시작한 탓에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니다.
"...먼저 도시로 귀환한 모험가들은 이미 길드와 협의를 끝내고 보수를 받는 걸로 끝난 의뢰입니다. 자세한 정황과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시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에 반해 접수원은 이 상황에서 자기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왔다는 걸로 미간을 찡그릴 정도로 쌀쌀맞다. 밀리고 쌓인 업무가 많아 보이긴 하지만 딱히 좋은 대처는 아니구만.
"그러니까 그 정황과 증거 제출을 위해 아까부터 길드장님을 좀 뵙고자 하고 있잖습니까. 당장 저기 있는 피해자들만 하더라도 결국 보호하려면 의뢰를 내건 길드의 대표인 길드장님과 의뢰주인 라비엘의 관료를 만나야 한다니까요? 의뢰와 연관된 피해자들이라구요. 그런 분들을 이대로 방치한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가엔달은 침착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결코 친절하지 못했다.
"현재 길드장님은 다른 용무로 바쁘..."
앵무새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대답. 결국은 길드에서 제시한 공적 의뢰인데 그거 뒤처리보다 바쁜 일이 어딨다고? 여기가 수도인 것도 아닌데. 빈말로라도 이런 식의 문제가 생겼으면 바쁜 일도 뒤로 미룬 채 달려와서 확인을 해야하는 게 맞다.
그 태도에 가엔달은 한숨을 내쉬려고 하고 예카트리나와 렐리에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긴은 곤란하다는 듯 허허 웃어 보였다. 피난민들은 소란에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아실리에도 영 좋지는 않은 표정으로 접수원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난 그대로 접수대를 걷어찼지.
-콰앙!
작정하고 날린 발차기에 접수대였던 것이 주위에 비산했다.
"꺄악?!"
"옘병 씨발. 더럽게 빙빙 돌리네 진짜. 니들 용병단 새끼들이랑 짜고 쳤냐?"
세상 사람은 그 수만큼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 상식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성격에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해야지만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낼 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지.
여기서는 인텔리한 양아치가 답이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겁하며 이목이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홀로 분기탱전한 접수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당장 경비원을 부르겠어요!"
"경비? 경비이이? 불러! 그냥 아주 싹 다 불러서 모험가 길드가 모험가 등쳐 먹고 나 몰라라 한다고 아주 세상에 다 알려보자! 경비 어르신!! 여깁니다! 여기 길드가 모험가를 아주 개 좆같이 대합니다! 이게 나라냐!!"
모험가는 절대다수가 국적이 없다.
나라마다 국경이 존재하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반 시민은 그 국경을 함부로 넘을 수 없거든. 아예 한 나라에서만 활동하는 이들이야 굳이 나나 셰릴처럼 국적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야말로 전 세계를 떠도는 진성 모험가들은 아예 국적을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국민을 우선시하는 나라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는 모험가를 자기들 입맛대로 토사구팽하는 아주 개 같은 경우가 넘치는 게 바로 리얼 판타지 라이프 아니겠어?
모험가라는 유용한 용역이 그러한 몰상식한 놈들로 인해 격감하면 안 될 정도로 세상은 혼란과 파괴가 넘쳐흐르니, 대륙이 하나로 모여 중재안을 내놓은 게 바로 모험가 보호법 되시겠다.
"의뢰 관리 소홀에 사후 대처 미흡! 특정 모험가에게 당한 길드의 금전적 손해를 다른 무고한 이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전가하여 손실을 메우려는 극악 무도한 행위까지! 심지어 사건의 근원까지 해결하고 왔음에도 늦장 대처! 사실 용병단 놈들한테 정보 팔아가며 불법 노예 사업에 발 좀 담그고 있었다는 의심까지 들기 시작하거든요 이거? 아주 그냥 모험가가 가장 만만하지? 좋아, 법대로 하자! 순회 판사님 모셔와! 당장!"
처음 모험가 등록을 할 때 나눠 주는, 비싼 종이까지 써가며 만든 무료 안내책자는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음에도 읽지 않는 수많은 인류들이 늘 그러하듯 '나중에 읽어봐야지.' 하며 지내다가 잃어버리거나 영영 안 읽게 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물건 중 하나다.
근데 솔직히 책자를 기반으로 간단한 쪽지 시험을 내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단 말이지. 바로 내가 방금 외친 법적 권리나 보호 같은 거.
"이, 이보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함부로..."
"말이 안 돼?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해? 지금부터 판단은 이티스엘의 국법이 하고 대륙 통합 모험가 보호 규약이 해! 왜 아직도 여기 있어? 경비 불러 오라니까!!"
무식하고, 일부는 글도 깨우치지 못했기에 모험가 일이 아니면 밥 벌어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모험가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고 들어왔다. 근데 그게 수도와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 무식한 직종의 사람이 법대로 나가면 무슨 꼴이 나는지 아주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옆에서 얼 빠진 표정으로 날 보고 있던 가엔달과 눈이 마주쳐서 가볍게 윙크를 날려주자, 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조용히 뒤로 물러나 나에게 상황을 맡겼다.
"무슨 소란이야 저게?"
"접수원이 불법 사업을 했다고?"
"길드가 모험가를 등쳐 먹었다던데?"
목소리 큰 놈의 이점은 첫 스타트를 일방적인 중상모략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그냥 평범한 문제도 아니고 무려 모험가를 상대로 불합리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문제라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법.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주변의 다른 접수원들이 당황하며 내게 다가왔다.
"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난동을 부리면 영업 방해로..."
"경비대 부르라니까! 판사님도 같이!"
"꺄아악!"
진짜 아실리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루 종일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수준이야.
결국 나의 합당한 외침은 접수원들의 간곡한 요청과 더불어 길드장이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말로 합시다 말로."
살집이 오른 통통한 몸이 수도 길드장과는 참 대비되는 인물이다. 오자마자 권위를 내세우거나 당당한 입장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묘하게 저자세로 나온다는 점에서, 법보다 폭력과 가까운 삶을 지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길드장님 말을 참 재밌게 하시네요. 저는 아까부터 말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 하지만 접수대가..."
"그건 그냥 홧김에 한 번 툭 찬 거로 박살 난 거고. 우리는 그 전과 그 후에는 계속 말만 했다니까?"
원목으로 만들어진 접수대를 발차기 한 번에 부수는 행위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퍼포먼스이긴 하지. 삐딱한 자세로 전형적인 양아치처럼 말하자 길드장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리기 시작하고,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길드장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더더욱 구경을 위해 몰려들었다.
"대체 무슨...씨, 씨발. 광견이 왜 여기 와 있어?"
"뭐? 쟤? 쟤가 그 수도의 미친개라고?"
근데 예상치 못한 지원사격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저 미친 새끼 자리 깔리기 전엔 안 무는데?"
"와, 그럼 진짜로 길드에서 모험가를 등쳐 먹은 거냐?"
"그럼 아까 불법 노예 사업이다 뭐다 한 것도...?"
이래서 사람은 성실하고 한결같이 살아와야 하는 것이다. 겨우 1년 남짓한 활동만으로도 수도 인근에서 나의 악명을 아는 인간들이 나타날 줄이야. 중얼거림이 웅성거림으로 퍼져나가자 상황을 파악한 길드장이 벌벌 떨며 조심스레 나를 이끌려고 손을 내밀었다.
"저, 접수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 올라가서 설명을 좀..."
그 행동이 괜스레 수상하다. 이 인간 진짜 뭐라도 켕기는 게 있어서 의도적으로 우릴 무시했던 거 아냐? 심지어 이 자리에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걸 굳이 올라가서 이야기하자고?
당연히 그딴 수작에 안 어울려주지. 지금 여기가 내 앞마당인데 미쳤다고 적진으로 기어 들어가?
"아니, 우리 가엔달 형님과 일행분들이. 예? 길드의 의뢰와 왕국의 위신을 위해 밤까지 새가면서 인근 피난민 마을을 찾고 찾아 무고한 왕국의 시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아 먹으려던 극악무도한 용병단 새끼들을 처단하셨지 말입니다? 심지어 그걸로 그치지 않고 안타까운 사연이 가득한 피해자 분들의 안전을 위해 몸소 호위까지 하며 도시에 도착했더니 씨발 세상에? 의뢰 중 도주 처리가 되는 불명예를 겪고 계시지 뭡니까? 왕국 법이 거꾸로 돌아가고 세상의 정의가 퇴색된 게 아니고서야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날 조용히 데려가려는 손길을 과장된 몸짓으로 은근슬쩍 피하며 언성을 높이자 주변의 소란은 잦아들고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려! 40여명에 달하는 용병단 놈들이 먼저 도착한 마을에서 저지른 참상을 보고 도망친 겁쟁이놈들이! 의뢰 외의 일이라며 도시에 보고하겠다고 도망친 진짜 겁쟁이들이! 우리 형님과 일행 분들의 명예를 깎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보상까지 들고 날랐다고 하해와 같이 넓은 아량으로 차분히 설명해줬는데도! 저, 저 접수원 아가씨 저 사람이 말이야 어? 이미 결정이 내려졌네 뭐네 하면서 자꾸 사람을 도망자 취급하는데 이걸 어떻게 참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길드장님?"
"아, 아이고 선생님. 제발 들어가서..."
이젠 하다 하다 자기보다 반절은 어릴 나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르네 세상에. 하여간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단 말이야.
"이게 들어가서 할 이야기입니까?! 뭘 감출 게 있다고 어딜 들어갑니까?! 당당하지 못한 자들이나 숨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이용해먹을 줄 아는 알뜰살뜰한 남자 엘드미아지.
잔뜩 모인 시선들이 불신을 담아 길드장을 바라보자, 길드장은 다 죽어 가는 얼굴 위로 육수와도 같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 좋다 이거야. 안 그래도 온종일 사건 사고에 휘둘린 거 어디 한 번 갈 때까지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