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엘의 길드장에게 빅엿을 선사해준 것으로 유쾌함을 공유하는 사이 나온 음식은 조촐했다.
새벽부터 날아온 나와 아실리에와 달리 네 사람은 정말 밤을 새가며 무리를 한 탓에 그렇게까지 식욕이 당기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체력을 위해 억지로 몸에 연료를 욱여넣어야 한다는, 직업 정신에 가까운 태도로 식사가 이어졌음에도 앞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덕에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참 좋은 경험이긴 했어요. 아실리에 씨의 말마따나 상인에게 시비를 거는 깡패 같은 태도였지만, 논리는 맞아떨어졌으니까. 그런 형태로만 말을 들어 먹는 상대도 있기 마련인 거죠."
"최고는 그런 상대랑 안 부딪치는 거지만 말이야."
렐리에와 예카트리나는 방금 상황에서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는 제대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긍정적인 반응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아실리에에게 옆구리를 찔리는 동안 빈 속을 달래기 위해 수프를 들이킨 가엔달이 짐짓 진지한 태도로 말문을 텄다.
"그나저나 길드장은 어떻게 보나? 그가 반... 자네가 용병단을 공격한 이유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나?"
역시 숙련된 모험가답게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까. 아까 내가 당당하게 반역에 대해 이야기했던 건 순전히 상황 탓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한 그는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고자 노력해주었다.
안 그래도 이 부분은 아까부터 생각했던 거라 난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보다는 라비엘의 관료 중 누군가가 의무없이 혜택을 누리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허가받지 않은 화전민 마을을 찾아다가 세금을 물리는 것도 일이지만, 도시 입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마을로 인정받고 세금을 내겠다는 마을도 일이다.
결국 이곳은 수도 인근이고, 대부분의 세금은 왕실에 귀속되니까. 도시에서 아무리 열심히 마을을 향해 지원하고 건축을 도와주고 정착을 지원한다 하더라도 실상 거의 원금 회수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심지어 전시 지원이라는 형태라면 원금 조차 회수 못할 가능성도 있다.
도시로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에 가까운 잡무에 불과할 거라는 게 내 소견이었다.
"어쩌면 사전에 업무를 빠르게 처리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을지도 모르죠. 내버려 두면 비리의 증거가 될 수 있으니, 아예 노예상과 연이 있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위치와 정보를 팔아버려 다 지워 버리자는 발상을 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지 않을까 하네요. 물론 진실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건 수도 귀족 나름대로의 연결점이 있었다고 밖에 설명드릴 수 없겠군요. 마음만 먹으면 그리 힘들진 않았을 겁니다."
애당초 보샤 백작 입장에서 수도 주변 도시들을 포섭할 경우 나쁠 게 전혀 없었을 테니 분명 몇 번은 찔러 봤을 거다. 도시의 영주는 아닐지언정 고위직의 누군가 하나둘 정도는 백작의 제안에 귀가 팔랑거렸을 수도 있고.
거기까지 말하자 예카트리나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일주일 정도 길드에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 싶었는데, 꽤 큰일에 엮여 있었나 보네?"
"어...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그보다, 따로 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절 찾으셨다는 말투네요?"
제국에서 있었던 싱글벙글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엘드미아의 모험을 평범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기상조인 감이 있어서 적당히 말을 돌리자 렐리에가 대답해주며 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저희 지난번 폐던전 사건 때 꽤 손발이 잘 맞았잖아요? 그렇게 잘 맞았는데 한번 뚝딱 일하고 헤어지긴 아무래도 아쉬워서 다 같이 모여 파티를 맺어보지 않겠냐고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오..."
"에가 씨가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찾아가지 못한 탓에 이렇게 저희끼리만 먼저 움직이게 된 거지, 원래는 이번 의뢰도 같이 받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려고 했죠."
내가 제국에 가 있는 사이 그런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니. 분명 이것이 파티다 희망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손발이 잘 맞긴 했지.
그런 일련의 이야기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실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폐던전?"
"어... 레비의 일을 도와주기 전에 처리한 의뢰가 하나 있었거든. 이분들하고는 그때 같이 파티를 맺었었는데 정말 수월하게 일이 끝났지."
"아하."
라그니스를 레비라고 부른 것만으로도 내가 뭘 말하고 말하지 않은 것인지 눈치챈 아실리에는 짧은 감탄사를 마지막으로 더 물어보지 않았다. 혹여 말실수를 할까 자연스럽게 입을 다무는 점에서 역시 연륜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이어질 것만 같던 평온은 예상치 못한 배려로 인해 박살 났다.
"그러고 보니 몸은 괜찮나? 뇌진탕같은 건 나중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네. 꽤나 큰 폭발에 휘말렸으니 항상 조심해야 해."
지극히 평범하게 내 안위를 걱정해주려는 의도로 내뱉은 긴의 발언 하나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폭발?"
"아, 아실리에 씨는 아직 이야기를 못 들었나보구려. 이 친구가 그때 정말 영웅적인 행보를 보였다오."
"하, 하하하. 긴 씨도 참. 제가 뭘 했다고..."
어떻게든 눈치를 줘가며 이야기를 끊으려 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다른 이들만 내 반응을 눈치채고 가장 중요한 긴 씨만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사 놈이 연 게이트로 일말의 주저도 없이 따라 들어가더니 갑자기 엄청난 폭발과 함께 튕겨 나오는 게 아니겠소? 저 거구가 쏜살 같이 튕겨져서 바닥에 한 세 번 정도는 튕긴 뒤에야 멈출 정도로 큰 폭발이었지."
"하하! 에이, 긴 씨도 참! 과장이 심하시다니까!"
"...후후. 엘디도 참. 드워프 분들이 과장을 할 리가 있니? 그간 사정이 있어서 그 부분은 또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네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 안 돼. 아실리에가 또 쓰러져 버려...!
"그럼! 과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법 폭탄 같은 게 게이트 너머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걸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터트려 버린 탓에 후폭풍에 휘말린 것이었소. 여러모로 주변이 위험해질 뻔 했는데 정말 큰일을 해낸 거지!"
껄껄껄 웃으며 내게 자신만만하게 윙크를 하는 긴은... '나도 눈치가 있다네. 이건 기밀 의뢰였으니 디테일만 얼버부리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울고 싶다 정말.
"그, 누나? 분명 내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했..."
아실리에는 내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치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
결국 단출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아실리에에게 등짝 스매시를 맞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건 순전히 다른 이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내 등짝이 멍들 때까지 때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보는 눈이 있어서 그때 얻게 된 마력시에 대해 뭐라 설명하지 못하고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진즉에 구체적으로 말했어야 했는데 최근 정신이 없어서 미루다 보니 이런 불상사를 겪게 되는군.
큭큭, 선이 보인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진짜. 아실리에에게 만큼은 나중에 확실하게 말해 둬야겠다.
결국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긴의 뻘쭘한 시선을 받으며 나중에 제대로 설명하겠다고 다짐을 한 뒤에야 아실리에를 달랠 수 있었다.
"흠, 흠. 이거 미안하구만. 아무래도 내가 너무 드워프식으로 생각한 모양이야."
그야 물론 드워프들이라면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이 목숨을 걸고 업적을 이뤄냈다 하더라도 무모한 짓 했다고 스매시를 날리는 게 아니라 기립박수를 치며 축제를 열었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견해의 차이였기에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최근 바쁘다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그, 그나저나! 지난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꽤나 바쁘게 지낸 거 같은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이야기를 꺼낸 건 좋았지만 그게 하필 또 내가 피하고자 하는 주제라서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배려해 주는 사람들이 말을 꺼낼 때마다 내가 곤란해지면 내 행적에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지인의 일을 좀 도와주게 되었는데, 게이트까지 타고 멀리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바쁘다기보단 그냥 잠깐 수도를 떠나 있었던 거에 불과하죠 뭐."
간만에 변명을 위해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두고 혀가 꼬이기 않게 신경 쓰며 대답을 마치자 이번엔 예카트리나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해주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아무튼 아까 렐리에가 말했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거든? 어떻게 생각해 엘드미아?"
"파티를 맺는 거 말씀이시죠? 아쉽게도 빠른 시일 내에 수도를 떠날 거라 힘들 것 같습니다."
"떠난다고?"
"네. 곧 필요한 게 갖춰질 거 같아서요. 전장으로 갈 겁니다."
어느 전장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놀란 눈을 한 채 천천히 시선을 아실리에에게로 옮길 뿐.
납득이 가는 반응이다. 당장에 위험한 짓을 했다고 등짝을 때린 사람 앞에서 마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겁니다 라고 말해도 되냐는 거니까. 그리고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아실리에 때문에 일행들은 크게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오는 길에 피난민들에게 말했던 복수?"
"네."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나를 마주하는 이들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이거참,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