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깝다.
재판을 이어 나가면서 엔벨데가 느끼는 거라고는 오직 그 감상뿐이었다.
어차피 질 재판이었다. 어차피 버림패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확실하게 얻어야 하는 이익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박살 나버린 지금, 이 모든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오히려 예상외의 손실까지 나기 시작했지.'
죽은 줄 알았던 비룡 조종사가 살아 돌아오고, 누가 미리 알고 선수를 친 것처럼 라그니스에게 혐의를 씌우려던 사건들은 귀신같이 그녀와 관련된 이의 손에 해결되어 있었다.
파바에라 남작을 선동하여 악행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제시했을 때 엘드미아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길드 관계자까지 대동해서 확실하게 증거를 제출한 탓에 되려 이쪽의 꼬리가 잡힐 지도 모를 상황에 놓여 버렸다.
덕분에 오늘 재판이 끝나자마자 뒤처리할 일만 생겨 버렸다.
'그 건방진 놈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짓을 더 저질러 놓을지 감도 안 오는군.'
파바에라와의 접점은 확실하게 지워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마족과의 연관성까지 들통 날 테니.
동시에 이젠 엘드미아 에가라는 인물마저도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나 진실인지 모르지만...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철혈 황녀의 이름까지 언급하며 술수를 부렸을 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해 버렸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허황된 이야기였다.
진실과 거짓을 섞어 상대를 속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거늘. 한참 어린 놈에게 당해 버린 건 어이가 없지만, 그만큼 델트와 관련된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던 탓이 컸다.
'아깝구나. 너무나도 아까워.'
이제 겨우 15세라고 했다.
델트를 베었을 때가 14세라는 소리인데 대체 어느 14세 소년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기사의 목을 칠 수 있단 말인가. 직접 당한 게 아니라면 아이들이 읽는 기사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고, 적대적이다. 그렇다면 그 재능이 아까워도 뿌리를 짓이겨 놓을 수밖에.
"...그리하여, 오늘의 법정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있을 재판은..."
뻔한 결말을 향해 달릴 뿐인 재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엔벨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대편에서 오늘따라 유독 라그니스에게 살갑게 대하며 챙겨 주는 왕가의 인간들과 그런 그들에게 웃으며 화답하는 라그니스에게 신경을 쓸 틈도 없었다. 자신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자꾸만 절망적으로 내려지는 판결로 인해 단두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에타빌 자작이 보내는 간절한 시선에 반응할 생각도 없었다.
원래 이번 기회에 처분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에게 빚을 지고 이용되던 비룡 조종사까지 살아온 마당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 따윈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당장 코앞에 닥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힘 쓰는 것만으로도 엔벨데는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재판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거늘.'
무언가 지시를 하더라도 재판소에 있는 이상 제대로 된 보고를 받게 되는 건 하루가 다 지난 다음이다. 아무리 부하들을 닦달하더라도 반나절 이상 시간이 허비된다. 그가 고르고 고른 부하들인 만큼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땅바닥에 내다 버리고 있는 이 시간들이 문제였을 뿐이니까.
하다못해 걸음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일 분 일 초라도 아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재판소를 벗어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측근이자 마부였다.
"백작님...!"
하지만 어째서일까.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그의 표정을 읽고 의문과 걱정이 들기도 전에 엔벨데의 시선은 저도 모르는 사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서 보기 드문 장신에 군인처럼 뒷머리와 옆머리를 짧게 친 검은 머리의 청년이 자신의 시선을 인식하자마자 무표정하게 손을 흔든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모험가 나부랭이 같은 차림이 아니라 레비엥 가문의 정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 보일 건 없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겨우 두 번째인데도 사람의 화를 부추기는데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놈이다. 하지만 엔벨데는 놈의 그런 반응보다 손에 들려 있는 하얀 무언가가 유독 자신의 시선을 사로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오러로 인해 강화된 시선의 끝에 잡힌 것이 하얀 편지 봉투라는 것을 깨달은 엔벨데의 머리가 불길한 추측을 향해 뻗어나갔다.
'아니. 말도 안 되지.'
그의 추측이 현실일 가능성보다 저 어린놈이 수싸움에 대한 능력을 타고 났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상황도 적절하지 않은가? 제국의 하얀 별로 칭해지는 1 황녀와의 친분을 과시한 뒤 보여 준다는 게 하얀 편지 봉투라니. 이만큼 적나라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어오는 심리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만큼은 엔벨데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랬기에 엔벨데는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의연한 자세로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측근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당황하느냐."
대체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뻥긋거리는 부하였지만 엔벨데는 화를 내기보다 의문을 가졌다. 결코 이런 인물이 아니다. 그 침착함을 높게 사서 일부러 옆에 데리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이 정도로 당황하고 있다면 필히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이틀 전 엘드미아와의 만남 이후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하들에게 임시 점검을 마치고 보고를 하도록 명령했던 것. 아마 그중에서 무언가 문제가 발생한 거겠지.
"당황하지 마라. 보는 이들이 많으니. 순서대로 상황만 설명하도록."
무엇 하나 함부로 드러나면 안 되는 사안들인 만큼 아무리 긴박하더라도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자 드디어 측근이 침착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루빌리 남작과 그에게 붙여 두었던 꿈을 섬기는 자가 연락두절입니다."
"...놈은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 않느냐. 정기 보고는 멀쩡히 했었으니 다음 보고를 기다릴 여유는 있다."
"그게... 이번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의 자택에서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듣기로는 그렇게 모습을 감추더라도 분명 언질은 주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엔 아예 없어졌다고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왕명을 어기고 비룡을 육성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도 없는 머저리는 루빌라 남작이 유일했기에 당장은 버릴 수가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꿈을 섬기는 자마저 고용해 붙여둠으로써 면밀히 관리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엔벨데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적인 추측들을 걷어낸 뒤 대답했다.
"...꿈을 섬기는 자를 기다려 본다. 이상이 있다면 보고 했겠지. 그것뿐인가?"
"아닙니다. 그... 상단도 전멸했습니다."
"...상단? 전멸?"
"...네."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허탈해서 화도 내지 못하는 기분 속에서, 엔벨데는 자신의 노예 상단이 또 박살 났다는 보고가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바로 수도 인근에 있는 상단에 대한 확인조차 제대로 안 하고 이런 보고를 올렸을 리가 없었기에, 그는 어금니를 즈려물며 겨우겨우 되물었다.
"대체... 언제...?"
분명 귀족들 사이에서 며칠 전에 있었던 밤시장을 만족스럽게 구경하고 왔다는 이야기마저 흘러나오고 있는데 어느 틈에?
"수도 순찰대가 정기 순찰 중에 초토화된 숙영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정보에 따르면 이틀에서 삼일 정도 된 거 같으며, 대부분이 목이 베인 채였다고 밖에..."
"그 많은 인원을 소리소문없이 죽였다고? 사냥꾼 메르자는 오러도 쓰는데?"
"그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 채 절명한 것으로..."
얼굴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엔벨데는 스스로의 인내심을 다 소진한 기분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 속에서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부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있다고...?"
"재판소에 계시는 사이 제국의 공식 서한이 왕실에 도착했습니다."
강력한 탈력감에 주저앉고 싶은 욕구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엔벨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악재 끝에 그래도 좀 숨통이 트이는 이야기가 나왔다.
동시에 엘드미아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아무것도 아닌 하얀 편지 봉투만 흔들었다고 생각하니 심각하고 허탈한 와중에도 실소가 입을 비집고 나왔다.
역시 애는 애에 불과하지. 결국 이런 건 정보 싸움...
"제국은...이번에 레비엥 변경백을 두고 일어난 중상모략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이며, 제국의 벗이자 왕국의 충신을 욕보인 자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뭐?"
엔벨데는 지금까지 겨우겨우 유지해왔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제국이...라그니스를 두둔했다고?"
"네. 심지어 서한은 제국의 전령을 통해 왕실로 전달된 게 아닙니다."
부하의 시선이, 방금 전 엔벨데가 바라봤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발. 제발 아니길 바라며 엔벨데는 온몸이 뻣뻣해지는 감각 속에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에는 엘드미아가 서 있었다.
여전히 한 손에 새하얀 편지 봉투를 흔들며, 비웃음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채.
"엘드미아...!"
편지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을 향해 중지를 뻗어보이는, 저속한 손동작을 선보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