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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56화 (156/412)

오라질 것. 표정 참 볼 만하네.

부하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놈과 대화하면서 보샤 백작의 안색이 바뀌어갈 때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그 와중에 기어이 날 바라보는 걸 보면 뭔가 감을 잡은 건가?

어쩌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왕실에 서한을 제출한 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놈 꼬락서니를 보면 분명 왕실에도 뭐 하나 심어 놨을 테니까.

지가 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중인지 확실하게 알면서 저렇게 신중한 놈이니, 임시 점검을 통해 이변이 발생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가능성도 염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에스뮈에의 편지를 다시 품 안에 넣고 잠깐 기다리자 보샤 백작과 달리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재판소를 나온 라그니스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엘드미아?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제복은 왜 또 챙겨 입었고?"

"알고 기다린 게 아니라 기쁜 소식을 최대한 빨리 전해 주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릴 생각으로 있었던 겁니다 선생님. 제복을 입은 것도 그거랑 연관이 있죠."

질질 끌고 숨길 것도 없는 터라 그대로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알려주자 라그니스는 조금은 벙찐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에스뮈에가 그렇게까지 나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는 이렇게 개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어."

"너야 정치에 별 관심이 없잖아."

"난 정치를 할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말이지."

어설픈 인간들이야 세 치의 혀를 놀려 볶아대는 게 가능하지만 혓바닥 놀려서 밥 먹고 사는 인간들에겐 먹잇감에 불과하다. 당장 레스롬 공작만 해도 봐라. 진짜 엮이고 싶지 않다니까?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봐도 사실이라니까 그러네.

"하지만 그걸 직접 왕실로 전달한 건 좀 의외네. 오가토르프 가문을 통해 전달할 줄 알았는데."

라그니스의 말대로 처음엔 그럴 생각도 했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제국의 의사가 적힌 문서이다보니 다른 이의 손에 맡겼다간 의도치 않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아실리에와 몽순이의 설득을 참고해서 그냥 직접 가져갔다. 그마저도 미리 약속되지 않은 이를 들일 수 없다고 갑질을 하길래 그냥 대충 던져주고 돌아왔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나중의 즐거움이 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제국의 공식 서한을 들고 온 사절을 미리 약속하지 않았다고 쫓아냈다라. 다음에 만나면 아주 재밌는 표정을 지어주지 않을까?

난 거짓말은 안했다. 왕께 직접 전달드려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책임지지 못한다고 못 박았는데도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건 지위를 알 수 없는 누군가 씨였으니까.

물론 일부러 에스뮈에가 위장용으로 사용했던 편지봉투에 넣어주긴 했지만 그 정도는 깜짝 상자같은 거 아니겠어.

"엘드미아? 왕성까지 가서 또 이상한 일을 저지르고 온 건 아니지?"

"아니, 날 뭘로 보고? 거기서 시키는대로 따박따박 잘 하고 왔으니 이렇게 편안하게 널 기다렸던 거 아닐까?"

"방금 네 얼굴 표정을 봤어야 그런 말이 안 나오는 건데..."

이런, 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나름 표정 관리를 한 건데 본심이 드러났나보군.

하지만 심증만으로는 추궁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없는 법. 난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서기로 했다.

"아무튼 예정보다 일찍 끝났으니 난 다른 용무나 좀 보고 들어갈게. 먼저 가 있어."

"어? 같이 안 돌아가? 곧 있으면 셰릴도 나올 텐데..."

"시간을 알뜰살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니.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면 또 모르겠는데 안전하기도 하고."

그녀가 나에게 바로 다가와서 그렇지, 이미 재판소를 나설 때부터 오가토르프 가문 소속의 기사들 세 명이 엄중히 호위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지라 적당히 눈 인사만 한 뒤 라그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귀찮은 건 미루지 말고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나중에 보자."

"...늦지 않게 와."

"저녁 식사 전까진 돌아갈 걸?"

아마?도?

의문형으로 이야기를 맺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뾰로통한 반응을 보이는 라그니스였지만 별수 없었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확답해주겠니.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가을비에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가판대를 깔아두려던 장사꾼들이 허겁지겁 가게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겠구만. 비 내린다고 퇴근도 할 수 있으니."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더 걸치고 나오는 거였는데."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날씨가 변수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결코 잠깐 내리고 말 것으로 보이지 않는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지만, 그들은 돌아갈 수 없었다. 순식간에 체온을 앗아가는 가을비에도 불구하고 목표물이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의 명령은 간단했다. 뒤를 잡고, 기회가 닿으면 죽여라.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된 명령이었던 탓에 그들에게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멀대가 망할 개집으로 돌아가거나 인적이 닿지 않는 어딘가로 자발적으로 향하여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계속 비를 맞아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저놈의 꽁무니만 쫓아다닌 거 같은데, 어쩌면 반나절은 더 따라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한숨만 나왔다.

그 사이 놈이 들린 곳이라고는 별 거 없는 중고 보석상이 고작이었다는 게 더 화났다. 못 죽이면 보고할 거리라도 생겨야하는데 순 산책만 즐기고 있으니.

달리 보면 비가 내리는 게 좋은 징조일지도 몰랐다. 갑작스러웠던 탓에 거리가 순식간에 한적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이 주변에 어디 시체 하나 숨겨 놓을 만한 공간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새기던 남자의 시야에 다른 일행이 보내는 수신호가 들어왔다.

의도적인 발각. 몰이사냥을 의미하는 수신호였다.

"이 근처에 그럴 만한 곳이 있나?"

"하수구 쪽을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 뒷골목 굴다리."

거기라면 확실히 안전하지. 시체 숨기기도 좋고, 적당히 상황을 꾸미기 위해 죽여 쓸 만한 거지들도 있고.

그러나 이상적인 상황은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그랬기에 남자는 동료들의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소는 좋지만 대가리가 있으면 거기로 알아서 기어 들어가지는 않을 텐데?"

일반 시민들조차 다가갈 이유가 없는 곳이다. 주변만 다가가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탓에 머저리가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발길을 피할 정도로 지저분하고 음습한 곳.

아무리 한 나라의 수도라 하더라도 깡패와 거지들은 존재하는 법이고, 그들이 목표로 하는 장소는 그런 놈들이나 제집마냥 드나드는 곳이었다. 가문의 제복까지 빼입은 놈이 뭐가 아쉬워서 거기로 갈까.

그런데 이게 웬걸? 놈은 머저리였다.

멋모르고 유도되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진해서 들어가는 머저리. 자신의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어서 아예 역으로 기회를 노리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다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병신이지만 정말 고맙군. 계속 비를 맞고 다녀야했다면 거리에서 찔러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누가 알겠냐? 익스퍼트에 다다르는 기사 여섯 정도는 단칼에 썰어버릴 수 있는 오러 유저이실지도."

같이 움직이는 동료도 주의는커녕 비아냥을 가득 담아 조소를 날릴 뿐이었다.

느껴지는 오러의 양은 너무나도 미미해서 겨우겨우 티가 날 정도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병 육성용으로 운용되고 있는 용병단의 단원도 한쪽 눈을 감고 이길 수 있을 수준에 불과하다.

명령의 경중을 따져서 진지하게 나선 거지, 애당초 이들 중 한 명만 진심으로 달려들어도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놈을 막다른 길로 몰아 넣으면서도 그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인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인지 놈의 발걸음이 빠르고 다급해지는 걸 느꼈지만 이미 이곳에 발을 디딘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상했던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보여야 하는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 사라졌어?"

"미친. 너희 쪽에서 놓친 거 아니야?"

"개소리. 내가 너보다 이쪽은 더 잘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새끼가 왜 안 보이는 건데? 하늘이라도 날았다는 거냐?"

"어. 날았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돌린 곳에 목표였던 남자가 서 있었다.

"파쿠르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긴 하더라. 그래도 판타지가 좋긴 해, 그치? 애지간한 건 마력으로 해결되는 점이 가끔은 참 좋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알고, 이젠 정면 승부 밖에 안 남았으니 너희에게 물어볼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너희를 살려 보내줄 이유가 없네. 좀 억울하겠지만 별수 있냐? 너흰 반역자 새끼 밑에 붙었고, 난 다 죽일 땐 통성명을 안 하는데."

"허. 도망칠 기회가 있었으면 그냥 도망을 쳤어야지."

말이 골목이지 결코 좁지 않다. 좌우로 높이 솟아 있는 건물들이 있다고 해도 네 명 정도는 동시에 달려들 수 있었다.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이유는 주제 파악을 못해서다, 엘드미아 에가."

여섯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으며 오러를 방출한다. 아무리 미미한 오러를 지녔다 하더라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격차. 생각이 있다면 눈치채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자기소개 안 한다고 했는데 사람 무안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네 씨벌놈이."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엘드미아는 헛웃음과 함께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가장 선두에 있던 동료의 목이 날아간 뒤에야 깨달았다.

"너희 사인死因은 안일사安逸死야 새끼들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깨달음과 엘드미아의 읊조림 뒤로 칼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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