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소에서 나온 뒤 위기감 속에서 모든 정황을 살펴본 엔벨데가 느낀 건 허탈함이었다.
"아주... 거하게 저질러 놨군, 엘드미아."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묘한 확신이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 한복판에 비열한 미소와 함께 서 있는 건 그 당돌하기 그지없는 어린놈일 거라는 확신이.
그놈이 아니고서야 지난 수년간 버텨 온 것들을 일주일은커녕 사흘만에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들쑤시고 다닐 인물따위, 지금의 수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 상단은 비밀 금고뿐만 아니라 중요 문서들까지 털려 있었다. 장기적으로 거래해온 도적들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까지 사라진 것과 놈이 엘프 하나를 끼고 다니는 것을 고려하면, 최악의 경우 산적들까지 싹 다 전멸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엘프까지 가세한다면 어중간한 도적들은 숲속에서 결코 놈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긴급 연락 수단을 사용했음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꿈을 섬기는 자는 높은 확률로 사망하거나 도주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엔벨데는 생포되었을 바에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꿈을 섬기는 자의 목숨까지 사지는 못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저울대에 오르면 얼마든지 배신하고 정보를 상납할 존재들이다. 그랬기에 가장 위험 요소가 적다고 여겨지는 놈에게 붙여놨는데 대체 어쩌다가 꼬리를 잡힌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심각한 경우엔 내부의 배신자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오늘은 비룡까지 타고 움직였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다른 이유로 날아간 거면 좋겠지만... 하필 매의 발톱단이 활동하는 영역과 방향이 겹치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 수도 비룡 정거장이 아니라 오가토르프 가문 연병장에서 당당하게 비룡을 타고 날아올랐는데?
"그럴 리가 없지...!"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하고 들고 있던 와인잔을 던져 버릴 뻔한 엔벨데는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침착해질 수 있을 만큼 경미한 피해가 아니었기에 결국 이성보다 본능이 뇌를 지배해 버렸다.
-쨍그랑!
"이딴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고!!"
체통조차 망각한 채 집어던진 와인잔이 산산이 비산하며 벽에 붉은 얼룩이 지기 시작했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감시원의 말로는 한 차례 비룡이 오고 간 뒤에야 돌아왔다고 하니 용병단에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하다.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못해도 내일 늦게서야 정보를 가져오겠지.
앞으로 3년. 아니, 2년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는데.
이쯤 되고 나니 대체 어쩌다가 저런 것과 엮이게 된 것인지 신에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후우... 그래, 그래도 이제 곧 끝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만 한다면..."
익스퍼트에 달하는 기사 여섯을 붙였다. 그것도 마족과의 전쟁을 경험한 이들로만 여섯. 그가 지닌 최정예 병력은 아니었지만 지금 수도에 남아 있는 모든 귀족들의 병력들을 다 포함하더라도 당당하게 수준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이들이다.
비록 마음이 꺾여 전장에서 도망친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실력은 진짜인 만큼 운만 따른다면 오늘이 넘어가기 전에 놈의 사망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엔벨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가을비는 점점 빗발이 거세지다못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평소라면 아직 저물어가는 해가 보일 시간이었지만 수도는 어중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차라리 이 빗속에서 죽어없어져 버린다면 좋겠군."
터무니없는 오판이었다. 이렇게까지 앞뒤없이 날뛰는 미친개인 줄 알았다면 진즉 살처분을 해 버렸어야 했는데. 실력과 광기를 겸비하고 있는 변수라니,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여긴 엔벨데였지만 이것만큼은 철저하게 예상을 벗어났다.
귀족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라도 생기고 있는 것일까. 어찌 이리 계획도, 겁도 없이 들이대서 박살 낼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자신도 왕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상이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한탄을 미처 다 내뱉기도 전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상하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저 자신의 저택을 향해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저놈이 왜... 아니, 어떻게...?"
하지만 그 사람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명확하게 형태를 인지할 수 있는 검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폭우따윈 신경도 안 쓰고 느긋하게 걸어온다는 건 충분히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게 엘드미아 에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정말 오랜만에 부르는 노래인 거 같다. 이젠 기억나는 전생의 음악도 얼마 없는데 이건 참 잊혀지지가 않아.
어차피 비도 시원스레 내리고 있겠다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적당히 불러도 듣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어서 간만에 마음 놓고 부르는 중이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 하리, 나는 바보가~ 돼 버린..."
"에, 엘드미아 님? 정말 이대로 가실 겁니까?"
그 듣는 사람 하나도 몽순이였다. 열심히 건물에 붙어 움직이면서도 나를 말리려는 듯 말을 걸어오는데, 긴박한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정말 지나가는 행인처럼 자연스럽다. 옆에서 자꾸 오두방정 떠는 건 좀 귀찮았지만, 아까 여섯 놈들이 날 추적할 때도 이런 식으로 붙어서 알려 준 덕에 쉽게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터라 난 친절하게 되물었다.
"죽어도 내가 죽는데 왜 네가 그렇게 긴박하니?"
"말씀드렸잖습니까. 살려주신 만큼 보답하겠다고. 이건 다방면으로 자살행위에 불과합니다."
흠, 그 보답에 혹시 모를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현명한 조언도 포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꿈을 섬기는 자 서비스는 생각보다 다방면으로 알찬 모양이다. 애먼 놈 때문에 우산도 없이 폭우를 맞아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리면 솔직히 짜증도 날텐데 말이지.
그렇게 녀석의 스펙트럼 넓은 호의를 평가하면서도 걸음을 늦추거나 멈추지는 않은 탓인지 몽순이의 말이 조금 더 빨라졌다.
"어차피 곧 있으면 왕실에서 알아서 처벌할 인물입니다. 오히려 지금 엘드미아 님께서 손을 대는 것으로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지."
"그런데 왜..."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썼으면 갑자기 네가 있던 곳에 쳐들어가서 루빌라인지 뭔지 하는 놈 모가지를 땄을까?"
"이, 이건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나는 나 건드리는 새끼들 앞에서 경중을 따지지 않아."
길 가던 꼬맹이가 멀대라며 툭 치고 지나간다던가, 뜬금없이 동네 어르신이 훈수를 두며 '요즘 젊은 것들은.'을 시전한다던가, 셰릴이 내 안면에 니킥을 박아넣으려고 하는 등의 행동은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나를 향한 명백한 악의가 있다면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했겠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게 악의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
셰릴의 경우도 처음엔 대체 이 조막만 한 게 어째서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를 겪나 고민했었지만 에스뮈에를 겪고 나니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다.내가 눈치가 없어서 몰랐던 거지, 왜 그랬는지 납득은 못 해도 이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나도 나랑 비슷한 게 아무데서나 고개 숙이고 다니면 뒤통수 정도는 때릴 거 같거든.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가만히 있었던 건 정치 싸움으로 깐죽거려서 그랬던 거에 불과한 거고. 날 직접 죽이겠다고 사람을 보내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들이닥치셔도..."
"그건 네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고민할 문제란다. 휘말리기 싫으면 떨어지렴."
물어뜯을만 하니까 물어뜯는 거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계속 거리를 좁혀가니 결국 창을 고쳐 드는 경비병들에게 외쳤다. 동시에 몽순이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다!"
"신분을 밝히는 건 감사합니다만, 검은..."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피하라고 말해 준거야. 난 엔벨데 그 새끼 대가리 따기 전까진 안 멈출거니까."
예상치 못한 폭언 같은 거였으려나? 폭우가 내리고 있다고는 하나 충분히 잘 들리게 말했는데 경비병들의 얼굴에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의문만 가득 채워졌다.
그건 뭐 지들 사정이지. 난 친절히 경고까지 해줬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뱉은 말을 지킬 뿐이고.
출력과 지속시간을 계산해 한계까지 끌어 올린 마력에 육체 능력이 한껏 치솟는 것을 확인하며 검에도 마력을 덮어 씌운 나는 주저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엔벨데!!"
50미터도 되지 않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는 것에 맞춰, 경비병들이 들고 있던 창끝을 베어 넘기고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정문 중앙에 발차기를 날렸다.
-콰앙!
"끄어억!"
"악!"
쇠창살로 이루어진 철문이 양쪽으로 반쯤 우그러지며 격렬하게 열리다 못해, 마치 스프링달린 스윙 도어마냥 튕겨 돌아오며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경비병들을 후려쳐 날려 버린 건 유쾌한 예상 착오였다.
솔직히 아예 뜯어버릴 각오로 걷어찬 거였는데 경첩이 더럽게 튼튼한 건지 두어 번은 더 삐그덕 거린 다음에야 후두둑 부서지며 바닥을 나뒹군다.
"칼은 자신 있게 휘두르던데, 역으로 칼 맞을 각오는 하고 휘둘렀냐 이 씨발 새끼야!!"
혹여라도 폭우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당장 저택 곳곳에서 병사와 기사같은 것들이 튀어나왔으니까.
"영화 한 편 찍어보자고."
나에겐 액션 영화, 니들에겐 재난 영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