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숙면을 취하던 이들을 깨운 건 저택 곳곳을 뛰어다니며 세상의 종말을 알리기라도 하듯 목청 껏 소리 지르는 사병의 목소리였다.
"습격! 당장 본관 쪽으로 이동해라! 실제 상황이다! 습격이다!"
비록 사병의 신분이었지만 긴급한 상황인지라 존칭없이 일단 부르고 보는 그 광경은 저택에서 지내던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굉장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저택에 머물고 있던 기사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뛰어다니는 사병들을 붙잡아 으름장을 놓는 대신 빠르게 갑옷을 챙겨 입고 사병이 알려 준 방향으로 향해 달려 나아갔다.
다섯이나 되는 기사들이 줄지어 달려가고,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장비를 갖춘 고용인들마저 같은 곳으로 향하는 모습은 꽤나 긴장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흐아암. 어떤 혈기 왕성한 미친놈들이 비 오는 날 수도 귀족의 저택을 터는 거야 대체."
폭우 속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비상사태에 정신없이 모든 병력이 날뛰는 상황에도 유독 굼뜨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입던 기사는, 뒤늦게 숙소에서 나와 적당히 아무 사병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야. 무슨 일이냐 이거?"
"저, 적습입니다! 정문이 파괴되고 진압을 위해 출동했던 병사들이 말 그대로 도륙이 났습니다!"
직접 그 광경을 보고 온 것인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사병의 눈에 어린 공포심을 읽어낸 기사는 순식간에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습격을 보고 경계하는 반응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봤을 때의 절망감이 사병의 눈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도륙? 몇 명이나 왔는데?"
"하, 한 명입니다."
"한 며어엉?"
기사는 화내거나 어이없어 하지 않았다. 그런 뻔한 반응을 보이기엔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스러운 공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거 무조건 재미있는 일이 터졌다. 기사의 직감이 그리 외쳤다.
"이거 정리되면 사병들 모아서 교육부터 다시 시켜야겠구만. 그거부터 말하고 다녔어야지!"
한 명이 수도 한가운데 있는 백작의 저택을 습격했는데 어찌 그런 중대한 사실을 빼놓고 습격이라는 실없는 소리만 외치고 다닌단 말인가. 잠기운이 싹 달아남과 동시에 서서히 차오르는 고양감 속에서 기사는 사병을 내버려 두고 저택의 본관을 향해 달려 나아갔다.
백작의 저택치고는 꽤 큰 편에 속하는 탓에 그가 오러를 이용해 육체를 강화하고 달렸음에도 본관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덕분에 기사는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자신의 기대감을 자꾸만 증폭시키는 반응들을 지나쳐야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압권인 것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명령이었다.
"기사! 기사님들을 모셔와라! 병사는 물러서! 이길 수 없다!"
"하, 진짜. 사람 기대되게 만드네. 내가 간다! 다 꺼져!!"
아직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조차 잘 안 들리지만 기사는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일인 습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건 진실과 소문이 뒤엉켜 거대한 괴물처럼 부풀려진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한 번 보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던 인물. 소문이 자자하던 루드라의 젊은 사자를 베어죽이고 용사마저 이긴 인물.
대부분의 기사들과 늙은이들은 젊은 영웅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고 괄시했지만, 그 젊은 영웅들의 반열에 속하는 기사만큼은 이 모든 소문들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고 항상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침에 본관에 도착했을 때, 기사는 그간의 기다림을 신께서 보답해주셨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히 타이밍을 맞춰 시도한 기사 셋의 협공을 대수롭지 않게 파훼하며 차례대로 목을 베어 버리는 소문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었기에.
"레비엥의 단두대. 엘드미아 에가!"
"엘드미아 에가는 맞는데, 앞에 그건 또 뭔 별명이냐?"
길거리 양아치를 연상케 하는 껄렁한 표정과 달리 단련된 육체와 자세는 양아치 따위가 흉내 낼 수 없는 부류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오러는 미미했지만, 이미 그건 아무런 판단 기준도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정문에서부터 저택의 본관까지 수많은 검상과 시체와 파괴를 뿌려가며 여기까지 도달한 거로 판단해야지.
"자기 소문엔 별로 관심이 없나보군?"
"관심 존나 많아. 근데 꼭 이상하게 내 귀엔 안 들어오더라고. 왜 나만 모르는지 이젠 슬슬 신기할 지경이다."
기사 다섯과 그에 준하는 고용인만 열이 넘게 죽었다.
그럼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적의 모습에 기사는 희열마저 느꼈다.
그래, 역시 칼싸움은 사람과 하는 게 제맛이지.
"넌 좀 치냐?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너 오고 나니까 잠깐 주변이 조용하네?"
그런 기사의 고조된 감정과는 달리 불평 불만만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엘드미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일 뿐이었다.
"아, 난 싸울 때 주변이 걸리적 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렇다고 이렇게 저택을 개박살 낸 후레자식을 두고 사람을 물러? 여기서 네가 제일 강했었냐?"
자꾸만 미소가 올라오다 못해 입꼬리가 귀에 걸릴 거 같았지만,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기사는 대답했다.
"맞아. 내가 제일 강..."
그리고 말하다 말고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왜 과거형이야?"
"왜 과거형이긴, 당연한 걸 물어보네."
별 멍청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것처럼 허탈한 반응을 보인 엘드미아가 들고 있던 검날을 오른팔 상완과 하완 사이에 끼웠다.
순간 무슨 동작인가 싶었으나, 여기까지 오면서도 피 한 방울 튀지 않아 새하얗던 그의 옷이 붉게 물드는걸 보고 나서야 기사는 상황을 이해했다.
오, 저렇게 피를 닦아 내는 건 또 처음 보네.
"지금은 내가 여기 있잖아."
그렇게 검에서 피를 닦아낸 엘드미아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게 자신감인지 아니면 도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사를 유쾌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하하하! 재밌어! 아주 재밌어! 기대할만 하겠는데 이거!"
"난 별로 기대 안 하니까 빨리빨리 끝내고 가자. 아, 엔벨데 그 개새끼 위에 있니?"
"하하!... 그러지 않을까? 왜?"
"기껏 너 썰어 버리고 올라갔는데 1층에 있었습니다 같은 상황이면 쪽팔리잖아."
자신을 적수로 보지 않는 저 발언만큼은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순간 유쾌했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뚱한 기분대로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바쁘니까 빨리 끝내자."
엘드미아는 그런 그의 기분을 배려할 생각이 없는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치고 들어왔다.
"재주가 좋네!"
이중 가속이라, 확실히 거리가 있을 때 기습으로는 이만한 게 없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력 차이가 확실할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결국 조금 급하게 움직여야할 뿐이지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어차피 지근거리에서 검을 섞는 게 더 정신없이 빠르니까.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냐? 널 죽일 사람 이름 정도는 알고 가야지?"
"그래서 니가 내 이름을 아는 거 아냐."
교본에서나 볼 법한 정석적인 공방보다도 엘드미아의 화술이 더 거슬렸다. 순간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한차례 고민하느라 반응이 늦어질 뻔한 기사는 혀를 내두르며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와, 너 말재간이 참..."
하지만 진즉에 그 움직임을 눈치챈 엘드미아는 찰나의 틈도 주지 않으며 다시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교본에 실어도 될 것 같은 공격. 전장에서도 수없이 많은 교본기사들을 봐온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빨라지면 무시 못 하는구나?
기초 중의 기초.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잡다한 기술이나 허초보다는 빠르고 확실하게 적을 베고 찌르는데에만 집중하는 검술.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누구나 범용적으로 써먹을 수준이나 딱 그정도라고만 생각했던 기술이 달인의 영역에 다다른 모습을 보는 듯했다.
알고 있는데도 반 박자는 더 빠르게 움직이는 공격은 매섭기 그지없다.
아직 성인식도 안 지났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 완성도라니, 어린애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어서 수년간 검술만 파고들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하지만...딱히 위협적이진 않아!"
"그러게. 너 무기가 좀 좋네?"
물론 명검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검을 쓰고 있긴 했지만, 꽤나 뜬금없는 이야기였기에 기사는 또다시 고민의 늪에 빠질 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엘드미아의 검이 빛나지 않았으면 그대로 고민하다가 반응이 늦어졌을 것이다. 중간중간 불규칙하게 가속하는 기이한 검은 번쩍임과 함께 했고, 그것만큼은 솔직히 좀 위협적이었다
"젠장, 세 치의 혀가 사람을 죽인다는 게 이런 건가? 나만 떠들면 안 되겠냐? 네 혓바닥은 좀 위험한데?"
아주 살짝 집중이 흐트러지는 건 평소였다면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엘드미아의 실력이 문제였다.
뭔가 특출나게 뛰어난 것도 보이지 않고, 용솟음치는 오러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잠깐만 틈을 보이면 순식간에 비집고 들어오는 집요함이 있어서 여유를 가지기 힘들 정도였다.
덕분에 기사는 정말 오랜만에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일단 숨 좀 돌려볼까!"
-카앙!
대놓고 막으라고 휘두른 검이었기에, 엘드미아가 어렵지 않게 막는 것은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족히 5미터는 날려 버릴 생각으로 휘둘렀음에도 그 절반 조금 넘는 정도밖에 날아가지 않은 건 의외였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엘드미아 역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속도에서 이딴 짓을 할 틈을 만드네?"
"슬슬 익숙해졌으니까. 나 강하다니까 그러네?"
간만에 검을 쥔 손이 얼얼한 느낌이 들어서 한껏 고양된 기분을 담아 기사는 드디어 자기소개를 입에 담았다.
"이래 봬도 마족 도살자 기쉬 휘미르라고 하면 전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너 정도 실력은 거기 가면 널렸어."
뛰어난 건 맞다.
무엇보다 저 나이에 저런 성취라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죽음은 세월을 따져가며 다가오지 않는 법. 실전에 뛰어든 이상 엘드미아는 그냥 그 정도의 전사였다. 전선의 기사들 중 저만큼 하지 못 하는 이들은 전부 시체가 되었으니까.
기쉬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끝에 무리한 도전을 해 버린 소년의 목숨을 담보로 마지막 가르침을 새겨 주고자 마음먹었다.
"꼬마야. 마족들과 싸우고 살아남은 기사의 실력을 보여주마."
"...마족?"
하지만 어째서일까.
"전선의 마족들을 상대로 도살자의 칭호를 얻었다고?"
위협이 되어야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엘드미아는 불길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