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일단 이거 막아봐."
엘드미아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이어지는 건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벅찬 연격.
짧은 순간 쏟아지는 연격 속에서 기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위협적인 것을 떠나, 이 말도 안 되는 연격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것 중 하나였다.
"너 씨발 어디서 이걸...!"
마족.
그것도 단기 결전을 노리고 달려들던 빌어먹을 척후 부대 놈들이 써먹던 것과 매우 흡사했으니까.
"길 가다가 마주친 마족 놈이 쓰더라."
"길 가다가 어떻게 마족을 만나냐!"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순식간에 기억의 밑바닥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질 정도로 흡사한 것을 보아하니 마족을 만났다는 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리라. 하지만 대체 어디서? 전장에라도 나간 건가? 사실 나이는 거짓이고 실제로는 한 10살은 더 먹은 건가?
그 와중에도 저 혓바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나름 비장의 수였던 거 같지만!"
그렇지만 결국은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한 수준이다. 어떻게 마족놈들의 순간적인 폭발력을 흉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결코 인간의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마족조차 저 상태를 오래 유지 못한다는 단점이.
"기술을 확실히 이해하고 흉내냈어야지!"
장기전으로 가면 무조건 멈추게 되어 있다. 마족마저도 그런데 인간은 그 반도 못 따라간다. 실제로 어중간하게 흉내 내보겠다고 시도했다가 죽어 나간 기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열 합을 넘기지 못하고 놈의 전력은 거덜난다.
"마족의 기술은 인간이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뭐, 그 새끼도 좀 오래 유지하면 뒤지기 직전까지 가는 거 같긴 하더라."
당연히 긴박해야 할 텐데, 묘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할 여유까지 있는 엘드미아가 흔쾌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새끼가 결국 못 버티고 뒈졌으니 내가 여기서 살아 숨 쉬는 거 아닐까?"
차분하고, 아무런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대답에 기쉬는 강한 불안감을 느끼며 연격을 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수없이 많은 놈들을 만나고 상대하면서 깨달은 파훼법. 실력이 부족할 땐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실력이 충분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지만 결국 방법은 그거 뿐이었다.
파고들어서 흐름을 끊고, 공세를 전환해 마족의 힘이 다 할 때까지 버티는 것.
"그럼 이것도 알겠네!"
진짜로 상대했으면 엘드미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렇게 연격을 끊고 숨통마저 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검을 찔러넣었지만.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엘드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목을 향해 쇄도하는 검날을 흘려보내고 다시금 공격을 이어 나갔다.
"만만치 않네 진짜!"
"그러는 넌 으스대던 것에 비해 너무 만만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 내는 거와 별개로 막연한 불안감이 기쉬를 덮쳤다.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베고, 검이 맞물리면 순식간에 반격의 수싸움이 시작되는 탓에 이젠 본능적으로 반응할 지경이었지만 엘드미아는 여전히 호흡하나 흐트러짐 없이 침착하게 공방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 공방을 이어 나가는 건 당장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이쪽은 명백하게 체력이 깎이고 있는 것에 반해 저쪽이 너무 멀쩡한 상태라는 점이 걸렸다.
마치 검술 훈련을 위한 기계와도 같다. 이렇게 베면 저렇게 반격하고 그 반격을 막을 다른 방안을 찾아내야하는 기계. 전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목숨을 건 일 대 일 싸움에서는 최악의 상대였다.
"너 이 새끼 나이 속인 거 아냐?!"
"8살 때부터 칼질 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라."
태생이 귀족은 아니었으나 8살부터 목검은 잡아보고 살았던 기쉬는 엘드미아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옥같은 마족과의 전장에서 5년을 구르기 전까지는 그냥 이론으로만 검술을 배우고 이해했던 그였다. 14살 때 기사의 종자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배움의 길을 걸으면서 나름 두각을 드러냈다고 자부했으나, 그 당시에 정말 제대로 검술과 기계적인 훈련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했냐고 하면 절대 아니었다.
철부지 어린애가 겉멋만 들어서 검을 휘두르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겨우 8살 때부터 검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15살난 애새끼가 이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크악!"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내질러진 검에 허벅지가 베이며 생긴 상처에 정신이 번쩍 든 기쉬는 경악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서가 아니라 분명 갑옷을 패용한 부위였는데도 검에 베여서.
"딴생각을 해?"
저 혓바닥. 저 주둥이가 문제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내용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꾸만 생각이 딴 데로 빠진다.
하지만 그것과 갑옷을 뚫고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검은 별개의 문제였다.
"갑옷은 평범하네?"
"마법검...!"
"...아니다. 말을 말자."
좋은 검을 쓴다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슬슬 힘이 빠지는 탓에 어느 정도는 갑옷으로 막아 낼 요량이었던 기쉬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몸을 뺐다. 아까처럼 분명 거리가 벌어지도록 두지 않고 바짝 추격해 올 테지만 시도라도 해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응?"
그러나 분명 추격해 올 것이라 여겼던 엘드미아가 잠깐 검을 거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씨발 마족 한두 명 죽인 뒤 쫄아서 도망쳐 놓고 도살자라고 구라치는 거 아냐?"
순간 욱해서 격정적으로 변할 뻔한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기쉬는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나 격한 공방을 펼쳤는데도 엘드미아는 호흡만 아주 미세하게 흐트러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쉬가 처음에 보여줬던 호전적인 모습과 여유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스스로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도 자부심이 있었던 그였기에, 기쉬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저택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죽은 대부분 놈들의 목이 잘려 있는 건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낄 뿐이지 한다면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저질러 놓은 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익스퍼트급 기사와 싸우면서 숨 한번 안 가빠지는 건 명백히 이상하다.
그렇지만 기쉬는 이 명백히 이상한 상황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딱 한 번 경험해 보고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그 느낌. 그 한 번의 경험이 기쉬로 하여금 마족과의 전쟁에서 도망쳐, 같은 인간들이나 상대하게끔 만들었다.
압도적인 폭력을 물 쓰듯이 휘두르는 그 악몽 같던 놈은 마왕군의 백인대장이었다.
"너... 마족이냐?"
"헛소리하는 거 보니 정곡을 찔렀나보구나?"
그 정도 강함은 왕의 10검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공포스러웠던 부분은, 인간과 달리 오러와 마나를 쓰지 않는 마족들은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엘드미아처럼.
"마족 놈들 머리에 뿔 나있던 거 못 봤냐?"
하지만 자신의 질문에 엘드미아는 비웃음과 함께 덤덤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네 강함이 말이 안 되거든."
"왜 말이 안 돼? 내가 아는 러빌 사람은 오러 없이도 공성추와 다를 바 없는 쇳덩이 워해머를 멋대로 휘두르던데. 그냥 네가 약한 게 아닐까?"
"러빌의 용혈일족이라도 만난 거냐?"
"용혈 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평소의 기쉬라면 대화를 이어나갔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빈틈을 찌르기로 마음먹었다.
저놈의 괴물 같은 체력을 보아하니 장기전으로는 위험하다. 전력. 아니, 사력을 다한 일격으로 끝내야 했다. 그랬기에 기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오러를 한 번에 사용해 엘드미아에게 달려들었다.
"씨발."
목을 향해 파고드는 최단 거리의 찌르기마저도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한 엘드미아의 검이 짧은 욕지기와 함께 휘몰아치며 깔끔하게 공격을 흘려보내려 하는 것은 기가 차는 광경이었다. 직접 시도한 공격이 아니었다면 미리 짜고 치기로 합의된 게 아닐까 의심을 했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덕분에 극도로 긴장하고 오러로 강화된 신경이 보여주는 그 일련의 과정을 확인한 기쉬는 확신했다.
'이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제발 막지 못하길 바랐지만, 결국 기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에서 손을 놓으며 어깨 갑옷 아래에 숨겨두었던 단검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을 버리고 암기로 이긴다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람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다.
괴물을 잡을 때 기사도를 외치는 머저리들은 가장 먼저 전장에서 죽어 나갔으니까.
제아무리 잘난 기사도 이 공격에는 치명상을 각오해야 한다. 일반적인 검사들이면 모를까, 오러 익스퍼트가 사활을 걸고 지근거리에서 휘두르는 단검은 아무리 동급의 실력자라 하더라도 피하기 힘든 법.
애당초 검을 버릴 각오로 들어간 만큼 지체 없이 파고드는 단검을 보며 기쉬는 승리를 예감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자신의 명치를 향해 아래에서부터 엘드미아의 발길질이 날아들기 전까지는.
-콰드득!
갑옷에 발차기를, 그것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차기를 할 때 날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기쉬는 그 사실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순식간에 우그러진 흉갑이 폐부를 박살 내는 것을 느끼며 쥐고 있던 단검을 놓치고 말았다.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격통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이 제대로 된 의문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엘드미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숨 쉬는 것도 잊은 몸뚱이가 주저앉는 것을 막지 못한 기쉬는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엘드미아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는..."
하지만 그 행동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 빌어먹을 주둥이가 떠드는 말에 저도 모르게 또 신경이 쓰이고 만 것이었다.
'그래, 나머지 하나는 뭐냐.'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 했지만 튀어나오는 건 말이 아니라 각혈이었다.
폐까지 손상된 건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이 아직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머릿속을 맴도는 와중에 기쉬는 죽음을 직감했다. 설령 엘드미아가 갑자기 자비를 베푼다 하더라도 저택의 상태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이런 식으로 죽을 줄이야..."
그런 기쉬를 덤덤히 바라보며, 엘드미아는 검을 휘둘렀다.
'잠깐, 두 번째는 뭔ㄷ...'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자신이 그토록 거슬려하던 말장난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의 목으로 빛나는 칼날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