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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1화 (161/412)

넘치는 자신감과 함께 호전적인 전투광처럼 등장한 기쉬는 결국 그렇게 갔습니다.

"넌 앞으로 허풍쟁이 기쉬로 내 뇌리에 남게 될 거다."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급이 다른지 꽤 버티는 편이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폐던전에서 만난 마족놈 흉내낸 걸 바로 알아차리는 거보면 죄다 거짓말은 아닌 거 같다.

도살자라는 이명이 진짜였다면, 많이 죽여서가 아니라 좀 지저분하게 죽여서 붙은 걸지도 모르지. 당연히 도축업자라는 건 굉장히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직종이지만 별명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검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게 맞기도 하고."

놈이 놓아버린 검을 주워 살펴보니 꽤 많이 부딪쳤는데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은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육체를 강화하느라 검에 흘린 마력이 상대적으로 좀 적긴했지만, 평범한 검들은 네다섯 번 정도만 찍어도 박살 나려고 했던 터라 굉장히 흥미롭다.

"마력을 좀 과다하게 투여해서 어디까지 버티나 실험해보고 싶어지는 걸 꾸역꾸역 참은 보람이 있네."

검에 마력을 두르는 감각은 굳이 따지면 평범한 검을 전기톱으로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의도하고 만든 건 아닌데 흐르는 마력이 알아서 그런 형태를 취하더라고. 저항이 강한 걸 베려고 하면 좀 쉽게 벗겨지는 일회용 전기톱이라는 느낌? 당연히 절삭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골목길에서 만났던 놈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하려면 연비가 너무나도 좋지 않아 나름 출력을 줄인 채 싸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확실히 좋은 검이다. 일단은 기념 삼아 기쉬가 차고 있던 검집과 함께 오른쪽 허리에 대충 찬 뒤 박살 난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향했다.

여유 부릴 생각은 없다. 이 근본 없는 깽판에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뒤집히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전에 엔벨데를 죽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고 만다.

다행히 귀족의 저택이라는 건 다 비슷비슷한 것인지, 엔벨데가 있을 법한 집무실이 어딘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예 박살 내고 들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딱히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길래 평범하게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선 집무실 안에서 매우 우울한 표정으로 집무실 책상에 기대고 있던 엔벨데가 우울한 눈동자로 나를 맞이했다. 대충 허탈함 50%, 어이없음 30%, 짜증 10%, 분노 10% 정도로 구성된 듯한 표정이로군.

그 표정이 퍽 마음에 들어서 나도 모르게 왼손을 들어 올리며 정겨운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어이 엔벨데. 저녁부터 왜 이리 죽상이야?"

하지만 내 호의 충만한 인사를 씹은 엔벨데는 지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그 검. 기쉬의 것이군."

"어. 꽤 좋은 검이더라고."

"전투에 맛이 간 녀석이지만 죽기 전에는 검을 놓지 않을 녀석이다. 결국 네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로군."

"내 손에 죽은 건 맞지만 죽기 전에 검 놓던데?"

정정당당하게 암습을 시도하느라 놓은 거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정정해 주었지만 엔벨데는 두 손을 들어 올려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엘드미아. 기쉬마저 죽이고도 상처 하나 없는 네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하는 말이다."

미묘한 침착함이 남아 있는 갈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엔벨데가 말했다.

"내 부하가 되어라. 네가 죽이고 저지른 그 모든 일을 상처 하나 없이 네가 해냈다는 건 결국 네게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는 뜻. 나를 도와 이티스엘을 전복시키고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낸 영웅이 되어라."

굉장히 근엄하게 폼을 잡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정신을 못 차렸네 저거.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와중에 엔벨데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본디 라그니스는 버림패였으나 네가 협조한다면 당연히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겠다. 이 사건을 무마하는 건 어렵지 않다. 결국 내 저택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허나 거절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너무나도 당당하고 당연하다는 그 반응에 나도 모르게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 해 버렸다.

"유언이나 남기셔. 지랄 말고."

여전히 침착한 눈동자로 내가 내민 가운데 손가락을 바라보던 엔벨데의 두 눈이 감겼다.

"그래, 어쩐지 네놈이라면 그럴 거 같았지."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 안에 남아 있던 침착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를 향한 분노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오만함이 널 죽인 것이다 엘드미아 에가."

"씨발, 그 말 오늘만 세 번..."

이젠 지겨울 정도라서 그만 좀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던 나는 강한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심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인 의미로.

갑자기 얼굴에 뭐가 닿고, 고개가 돌아가고, 등에 뭐가 부딪치는 과정 끝에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사정 없이 구르고 부딪치고 날아간 끝에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쉬...이 씨발 구라쟁이 새끼...!"

간단했다.

내 눈이 쫓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인 엔벨데가 나에게 죽빵을 갈긴 거였다.

"대체 뭘 믿고 지가 제일 강하다고 했던 거야...!"

전생 이후 겪은 모든 물리적 충격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충격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놓지는 않았으나 눈앞이 핑 돌고 귀에는 이명이 들렸다. 언제든지 목을 벨 생각으로 육체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방금 일격으로 목이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뽑혀 나갔을 게 분명했다.

"레비엥 가문에서 나와 검을 수련하고 기사가 되어 오직 검 한 자루로 백작의 작위를 얻었다. 정녕 내가 일신의 무력이 부족하여 네놈의 방자함을 묵인했다고 여긴 것이냐?"

그래도 뇌진탕은 씨발 어쩔 도리가 없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엔벨데를 인지했지만, 당장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오만했던 것이냐? 네놈에게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오러까지 방출했거늘?"

"카악, 퉷! 씨발, 내가 그런 쪽에 좀 둔해 새끼야."

백날 방출 하면 뭐 하냐 난 개뿔도 못 느끼는데.

"에카프 경 정도는 되어야 입질이 오더라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내가 저택의 벽을 부수고 박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쓰읍, 이거 나도 할 수 있는 수준이려나? 철문 우그러 뜨리는 거랑은 뭔가 좀 다른 거 같은데?

"마지막까지 입은 살아 있구나."

"지랄. 이제 시작인데 무슨."

수년간 단련한 건 좋았지만 이런 실전의 애로사항에 대한 대처는 여전히 미흡하구나. 좀 진즉에 눈치챘으면 좋았을 텐데.

특출난 건 우월한 몸뚱이와 마력 밖에 없으니 잘난 거 하나 없던 평범한 현대인은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

그전에 일단 저 새끼부터 조지고 말이지.

"더럽게 자신만만 하십니다 그래. 검도 안 뽑고?"

"네 비루한 목숨을 끊는데 굳이 내 검이 필요할까? 네 검으로 충분하지."

"워, 댁도 이빨 좀 터네. 눈이 돌아가야 혀가 좀 부드러워지는 편이신가 봐? 그거 꼭 나중에 기억했다가 좆 같은 새끼한테 써먹어 줄게."

왜 사람이 다 죽어갈 때 옆에서 정신줄 잡고 계속 말을 하게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입을 놀리니 머리가 좀 빨리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거 같아.

사실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정신만 돌아오고 몸만 움직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 잘나신 백작님 실력 좀 봐볼까!"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엔벨데와의 거리가 검의 간격까지 좁혀졌다.

딱 봐도 지금까지처럼 싸워서는 견적이 나오지 않은 터라, 유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일단 닥치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무너진 돌더미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엔벨데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뻔한 수작을."

아슬아슬하게 검의 간격에 들어선 상태였기에, 엔벨데는 가소롭다는 듯 살짝 몸을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 내 검을 피해낸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정확히 내 의도대로였다.

"어중간하게 잘난 놈들이 꼭 그 짓거리를 하더라고!"

유효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다음 공격의 기반을 위해, 난 낚싯대를 던지듯 휘두른 검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기 위해 뽑아 든 기쉬의 검이었으니까. 차라리 막았으면 모르겠으나 상체만 뒤로 빼내어 검을 피한 탓에 갑자기 자신의 안면으로 날아드는 검을 피하기 위해 엔벨데의 자세는 크게 흔들려야만 했고, 난 최대한 빨리 검을 뽑아 놈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친 엔벨데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놈의 시선이 나와 내 검, 그리고 자기 옆으로 날아가고 있는 기쉬의 검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이해했을 땐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놈이 취할 행동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틀어 날아든 검을 피한 엔벨데는 자기 귓가를 스쳐 날아가려는 기쉬의 검 손잡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낚아채 휘두르며 그대로 내 공격을 막아 냈다.

-카앙!

영화나 만화에서 볼 수 있던 검을 맞대고 비비적 거리는 모습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금속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신 이어진 건 반격에 반격이 꼬리를 무는 수 싸움뿐.

살면서 가장 열심히 연습해온 것 중 하나인 만큼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지만, 좆같게도 다섯 번째 검을 섞자마자 위기감이 엄습했다.

엔벨데는 강했다. 오러로도, 기술적으로도.

"인정하지. 오만할 법도 했군."

방금 전의 기쉬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격한 공방 속에서도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꼽네.

"허나 이만한 재능이 있으면 주제 파악도 할 줄 알았어야지."

바둑이나 장기 프로들이 경기를 치르다 보면 몇십 수 앞을 내다보고 패배를 선언하는 경우가 있었지 아마?

옛날엔 이해를 못 했는데 하필 오늘 이해하게 됐다.

일곱 번.

정확히 일곱 번째 공방에서 밀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단을 막는 과정에서 내 검은 튕겨 나가고, 엔벨데가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내 복부로 칼날이 틀어박힌다.

남은 건 여섯 번.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지금 가진 수와 방법은 뭔가?

남은 건 다섯 번.

건틀릿을 믿고 미리 검을 놓은 뒤 복부를 막는다는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안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남은 건 네 번.

검에 흘리던 마력까지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아슬아슬한 상황이니까. 어중간하게 시도했다간 예상치 못한 반격이 날아올 게 분명했다.

남은 건 세 번.

내가 쓸 수 있는 것. 지금 나에게 있는 것.

남은 건 두 번.

우월한 몸뚱이와 튼튼한 검과 마법막이 건틀릿과 저주막이 반지. 그리고...

남은 건 한...

-챙!

뱀처럼 휘감긴 엔벨데의 검에 내 검이 휘말리며 손아귀를 벗어난다.

그리고 바닥에 튕겨 저 끝으로 미끄러져 가는 검을 바라볼 틈도 없이 놈이 말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엘드미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놈의 검은 내 복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결코 달갑지 않은 느낌. 비록 위치는 달랐으나 전생의 좆 같은 마지막을 떠올리기 딱 좋은 서늘한 감각이 신경을 타고 전해졌다.

"씨발, 인생."

이번 생은 어찌된 게 중간이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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