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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2화 (162/412)

엔벨데는 검을 뽑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저항만으로도 한 번에 뽑히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뽑으려다가 죽기 직전에 놓인 놈이 전력으로 달려들어 목이라도 부러뜨리려고 시도하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전장에서도 그런 식으로 죽어 나간 이들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오러만큼은 느껴지는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놈이다. 겉으로 내비친 태연한 태도와 달리 순간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아무리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고 한들 어중간하게 빈틈을 보이며 붙었다간 역으로 당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검은 멀쩡히 있을 뿐더러 엘드미아가 놓쳐 버린 검도 있으니 무기가 부족하지는 않은 만큼, 그는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 하지만 엔벨데는 엘드미아의 안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엘드미아의 얼굴이 맞는 족족 돌아갔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튕겨 날아가지는 않는다. 엘드미아가 대응했다기보단 엔벨데가 오러를 충분히 조절한 탓이었다.

"수도에서의 삶은 즐거웠나? 세상이 모두 네 것 같았더냐? 어리석은 놈 같으니."

재능있는 젊은 기사들이 종종하는 실수 혹은 잘못.

그들의 재능이 세대를 초월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그래, 강하지. 내가 네놈과 같은 나이였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에게 너와 같은 재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전장의 경험이라는 건 네 한 줌의 재능으로 어찌 넘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어린 것아."

다시 날린 주먹이 턱을 후려친다. 그 와중에도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깔끔하게 들어가는 맛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엔벨데는 내심 감탄하며 아쉬움을 느꼈다.

범상치 않은 놈이긴 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탐이 날 정도로.

그랬기에 엔벨데는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는 엘드미아를 무시한 채 책상 쪽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포션을 위에 올려 놓았다.

탁. 하고 보란 듯이 올려놓은 포션으로 엘드미아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바라보며 엔벨데가 말했다.

"그대로 두면 치료 받지 않는 이상 넌 죽는다. 검을 뽑으면 출혈로 얼마 못 가 죽게 되겠지. 심지어 날 이길 수도 없다. 살고 싶으면 이곳까지 기어와 충성을 맹세해라 엘드미아."

"유언이... 참 병신 같네."

자신의 상태를 확실히 알고 있을 텐데도 엘드미아는 박힌 칼을 움켜잡은 채 빈정거린다.

독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그 모습에 엔벨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나조차도 마족과의 전장에서는 부질없었다. 진짜 마족을 만나 본 적이나 있느냐? 안 그래도 벅찬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는 익스퍼트급의 백인대장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천인장, 만병장들이 죄다 강자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강함을 숭배하니까."

이전까지는 대륙 어디에 내놔도 인정받을 강자라고 여겼던 왕의 10검마저도 일방적인 전투를 이끌어나가지 못했다. 겨우 신탁이 있었다고 해서 그런 것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다.

"저 기사들이 무슨 연유로 내 반역에 동참하는지 정말 일말의 의심도 가져 보지 않은 거냐? 너보다 약하기에 패배자들이라고 생각했나? 그들이 전장을 등지고 반역에 동참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짐작 못한 게 네 오만..."

"씨발...아픈데 웃기지 좀 마 새끼야. 집중이 안 되잖아."

큭큭큭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건 대단했지만 엔벨데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하여간 세상 어딜 가나 어쭙잖은 인간들은 다 똑같나보다. 액면가만 놓고 판단하는 주제에 뭘 그리 많이 안다고 좆대로 판단하시는지. 혹시 내가 알지 못 하는 출생의 비밀도 알고 있냐?"

슬슬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거라 여겼던 것과 달리 엘드미아는 여전히 자세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니가 말한 건 이미 다 고민해 보고 대충 결론도 내렸어 새끼야."

"뭐?"

"마족들과 협력하는 인간들이 있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고, 그치들의 관계가 동료 관계인 것도 확인했다. 그럼 당연히 마족령 어딘가에서는 인간과 마족이 평범하게 공존하며 산다는 소리고, 말인즉슨 왕국이 항복하면 그냥 마족령에 속하는 것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니들도 그거 믿고 반역 이후에 마왕에게 대가리 박을 생각이었던 거 아니냐."

엔벨데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미심쩍은 눈초리로 엘드미아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걸 알면 내가 너희한테 협조할 거라고 믿었냐? 몰라서 적대한다고? 그냥 내가 잘났으니 마족도 썰어버릴 수 있을 거라는 오만에 빠져서? 지랄도 풍년이다 엔벨데. 난 씨발 태어나서 오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냥 나한테 칼 휘두른 놈한테 내 칼 휘두를 뿐이야. 칼 맞고 안 죽는 놈 죽일 수 있다고 설치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칼 맞으면 죽는 놈 죽이겠다고 설치는데 그게 왜 오만해."

"적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해 그 꼴이 났으면서도 말이냐?"

"가늠? 흐흐, 아 씨발."

그저 조롱하기 위해 웃는 게 아니라, 진짜로 웃는 듯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웃음이 나온다고? 검을 뽑아버리면 출혈로 인해 얼마 못 버티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포션이 들어 있을 만한 가방은 보이지만 결코 그걸 꺼내도록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결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닌 게 분명함에도 엘드미아는 진짜로 웃었다.

"그래, 이해는 한다. 너희는 상대가 자기보다 강한지 어떤지 대충 알고 지낼테니까. 근데 난 그런 거 알 수 없는 삶만 살아와서 관심 없거든. 그래도 항상 대비는 하지. 이번엔 쪽팔리게 대비하고도 처맞은 거라 능력이 부족했다는 건 인정하고... 씨발, 칼. 그거 잡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니 판단을 잘못내린 것도 인정한다. 잘 기억했다가 나한테 비슷하게 써 먹는 놈 있으면 그것도 같이 써먹을게. 근데 반역자 새끼 집에 처들어오면서 나보다 강한 놈 하나 없을 거라는 근본 없는 믿음따위 가진 적은 없어."

"궤변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도망을 쳤어야지."

"도망? 도마아앙?"

웃음소리가 방금 전보다 커졌다. 그리고 고통에 겨워하는 소리도 같이 이어졌다.

"마침 적절한 성과 측정기가 알아서 나타났는데 도망을 왜 쳐? 실험해 봐야지."

"실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당연한 거 아니냐? 목표보다 한참 약한 놈들하고 싸울 기회가 생겼는데 도망을 치는 게 훨씬 이상하지 않을까?"

배에 칼이 박힌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기가 서린 눈동자다. 엔벨데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느꼈다.

"이미 내 삶은 강한 새끼랑 싸우는 게 대전제야. 거기까지 가는 길에 좆도 아닌 것들이 자꾸 시비를 털어서 그렇지, 강약을 따지고 달려들지 않는다."

기쉬는 강자와의 전투를 갈망하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녀석은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 강자와 싸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전장에서 벗어난 뒤 복귀하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과의 싸움을 추구하며 반역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놈은... 그런 게 아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오직 그걸로만 상황을 판단한다. 그리고 위해를 가했다면 아무리 강하더라도 반드시 물어 뜯는다.

그랬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위기에 놓였음에도 이 자리에 없는 정체불명의 마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놈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엔벨데는 자신이 박아 넣은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국 그 결과가 이 꼴 아닌가?"

"딱 예상대로 배에 칼이 날아오는 상황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급소만 피한 뒤 몸으로 검을 잡은 거? 누가 보면 죽은 줄 알겠네."

엘드미아의 안면에 재판소 앞에서 봤던 악랄한 미소가 번졌다.

"죽일 거였으면 목을 쳤어야지. 너야말로 그 오만함 때문에 죽는 거다 엔벨데 다 보샤 백작. 누가 어떻게 죽었냐고 물어보거든 잘 기억하고 있다가 대답해라..."

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동에 엔벨데는 고개를 내저으며 벌렸던 거리를 다시 좁혔다. 일부러 맞고 몸으로 검을 잡고 있다고? 아무래도 위기감이 부족한 게 분명했다.

"그럼 어디 한번 버텨봐라."

검을 뽑아버리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한 그때, 엘드미아가 검을 잡고 있던 왼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고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어검술馭劍術이라는 기술에 뒈졌다고."

그와 동시에 느닷없이 강한 통증이 등에서부터 파고들어 폐부를 찢었다.

"뭣."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엔벨데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비스듬히 뚫고 나온 칼날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피가 엉켜있었지만, 그건 분명 자신이 쳐 낸 엘드미아의 검이었다.

"전투의 승패는 단순 강함이 아니라 변수도 작용하는 법이란다."

내가 가진 것.

우월한 몸뚱이와 튼튼한 검과 마법막이 건틀릿과 저주막이 반지.

그리고 마력.

"뭐, 네탓은 아니지. 이걸 어떻게 예상하겠냐. 예언가도 아니고."

그 많은 말을 지껄여가면서 시도한 건 튕겨 나간 내 검과의 동조였다. 옆구리에는 이미 구멍 한 번 나왔으니 별 문제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때와는 다른 화끈함이 있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하고 연결한 경험 덕인지 검하고만 연결하는 건 훨씬 쉬웠다. 그걸 어떻게 화살처럼 쏘게 만드는지가 문제였을 뿐이지.

다행히 그것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육체 강화하는 감각으로 폼멜에 강화를 거니 반발을 못 이기고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갔으니까.

솔직히 엔벨데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 일부러 날려 보낸 검이 놈의 시야에 들어왔을 땐 좀 식겁했는데 덕분에 포션을 구할 수 있었으니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마력을 움직여 놈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내자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가슴 팍에 돋아난 칼날을 보고 있던 엔벨데가 피를 토해냈다.

"쿨럭, 어, 어떻게...?"

"검에 내재된 마력이랑 연동해서 이렇게 저렇게 잘하면 돼. 넌 오러 쓰니까 못 하겠지만."

놈의 가슴팍에서 왈칵 하고 피가 치솟는 것을 보면서 난 아무 걱정 없이 엔벨데의 옆을 지나 책상 위에 있는 포션을 주워들었다. 희망 고문을 하기 위해 짭을 꺼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일 텐데도 엔벨데는 내 말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했다.

"마...력? 마력이라고...?"

물론 거기에 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당황, 의아함, 곤혹스러움 그 모든 감정을 다 덮을 정도로 거대한 미지를 향한 두려움이 엔벨데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손 하나 제대로 까딱할 생각 못 하고 겨우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놈에게 덤덤하게 대답해주며 포션을 한 모금 마신 뒤, 배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옆에 둔 다음 상처에도 포션을 뿌리며 말을 이었다.

알싸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이어졌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억울하겠지만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네가 네 목적인 반역을 위해 이거저거 헤집고 다니는 놈인 것처럼, 나도 내 목적을 위해 이거저거 헤집고 다니는 놈이었을 뿐이지."

엔벨데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게 보인다. 단순히 가슴만 관통되었으면 저렇게 주저앉을 리 없지. 급소도 관통했든, 심장에 상처가 났든 뭔가 제대로 맞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놈에게 남은 몇 초도 되지 않을 게 확실했기에 난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다.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퍼트린다는 목적을 위해서 말이야. 지난 번에 말했잖아? 중요한 건 메세지라고."

"그딴... 이유로... 대의를..."

"노예 사냥까지 일삼는 범죄자 새끼가 대의는 무슨 대의. 죽어서 내 경고 표지판이나 되는 게 딱 네 수준이다."

누가 보면 지가 당당한 줄 알겠어 아주.

마지막 대답이 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엔벨데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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