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제국에서 받았던 포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엔벨데의 포션은 의외로 상등품이었나보다.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이번 경험은 여러모로 씁쓸한 결과였기에 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 담배 마렵네. 얘 혹시 담배 안 피나?"
농담이 아닌지라 진짜로 책상을 뒤져봤지만 아쉽게도 나오는 거라고는 술병과 술잔이 들어 있는 케이스 정도였다.
지금에야 폭풍전야처럼 잠잠한 거지, 머지않아 또 한 푸닥거리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술을 마실 수는 없었기에 난 결국 한숨만 내쉬며 몸이 치료되는 걸 기다렸다.
육체적인 능력? 말이 15살이지, 나는 내가 봐도 18살은 되어 보인다. 사실 이 이상 키가 더 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고, 근육은 탄탄하다. 죄다 검 휘두르고 뛰어다니면서 쌓은 거에 가까우니 나름 실전 압축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검술? 내가 거기에 조예가 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꿀리지 않은 건 맞다고 본다.
이 세계가 마법이 있고 오러가 있다고 해서 싸움조차 흔한 만화에서 연출하는 것처럼 촤악 촤악 텔레폰 어택을 시도하며 싸우는 게 아니다. 결국 일반적인 신체 능력을 초월한 초월자들이 그 초월한 힘으로 인간의 기술을 펼치는 거에 불과하지.
능력이 상향평준화 되어 있을 뿐 기술은 비슷하다는 소리다.
오히려 무언가 미묘하게 현실성 있으면서 판타지스러운 비기는 전생에서 봤던 만화를 참고하는 게 더 빠를 지경이다. 내가 특정 상황에 검을 휘두를 때 아슬아슬하게 폼멜을 쥐어서 최대한 사거리를 늘려 베는 거라던가 뭐 그런 거.
"차라리 세상에 비천어검류 같은 거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네."
그럼 내가 익힌 검술이 평범하니까 상대적으로 약할 뿐이라는 정신 승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알기로 그런 특별한 검술이 존재하는 세상은 아니다. 제발 어딘가에 있어서 나도 좀 얻어보고 싶지만 없을 거 같다.
즉, 내가 엔벨데에게 칼빵을 맞은 가장 큰 원인은 육체적, 검술적 문제가 아니다.
경험. 그리고 오러.
결국 가장 큰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경험이야... 뭐, 납득한다. 그리고 그건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 하지만 오러는 전혀 다른 문제다.
"매번 임사 체험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정말."
처음으로 게이트를 넘을 때 감각이 개화되었고, 마족놈과 싸우면서 조금이나마 눈이 트인 건 확실하다. 적어도 그 당시엔 지금처럼 마력을 동조해서 검을 날리는 묘기따위는 부릴 수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일반적인 오러 유저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큰 성과를 얻은 상태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마족에게 겁먹고 튄 엔벨데 하나도 압도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였다.
내가 인간들만 상대하며 무쌍찍는 게 목적인 게 아니니까 아주 존나게 심각한 문제다. 오러는 선행자가 있지만 내 마력은 선행자가 없다고.
"마족 스승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언젠가는 성장하겠지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법은 찾아봐야겠는데, 내 상식과 지식 안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니 고구마가 목구멍에 막히는 기분이다.
"일단은... 아실리에하고 상의라도 해 봐야지."
결국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어서 움직임에 지장이 없어질 때까지 번뜩이는 무언가는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슬슬 아래에서 다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그친 비 뿐.
마족놈 대가리 뽑았을 때보다 멀쩡하게 이겼는데 만족감은 반도 안 되니 참담할 따름이다.
"그래, 인생 마음대로 된 적이 얼마나 있다고."
미뤄놓은 잡무를 처리한다는 기분으로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뗀 나는, 벽에 거치되어 있던 엔벨데의 검도 허리에 차고 기쉬의 검도 다시 집어넣은 뒤 엔벨데의 시체로 다가 갔다.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많은 사병을 보유하지 못한다. 그치들끼리 뭉쳐서 반역을 저지르기 쉬운 환경을 굳이 일부러 조성해 줄 필요는 없잖아?
내가 엔벨데 하우스에 들어온 뒤 베어 버린 놈들 숫자가 한 30 정도 될 거 같은데, 그러고도 기쉬 놈의 말을 따라 도망칠 인력이 있었다는 건 고용한 인원 수를 속였다던가 저택 운용을 위한 모든 인원을 전투 인원으로 채워 넣었다는 수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아래에 느껴지는 저 웅성거림만큼은 될 수 없어야 한다.
"그럼 쟤들은 누굴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왕국군일까? 아니면 기회를 노려 엔벨데에게 점수라도 더 따기 위해 지원을 보낸 다른 귀족들일까? 어느 쪽이든 좋았다. 둘 다 결국은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전자라면 엔벨데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싸움을 포기하는 놈들도 생기겠지."
이미 죽은 놈의 목을 벤다는 게 좀 그랬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진심이었다.
착해진 엔벨데에게 더 이상 원한은 없었으니까.
◈
비가 그쳤음에도 레스롬의 가슴 안에 드리운 어둠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본디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아주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리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군."
스스로를 꿈을 섬기는 자라고 밝힌 자가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솔직히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생기려나 싶어 주책맞게도 설레이긴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건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의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감시라도 붙여 놨어야 했거늘...'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런 후회의 시간을 느긋하게 가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엘드미아가 단신으로 엔벨데의 자택에 처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는 귀를 의심하기도 전에 연락용 수정구부터 꺼내 들었다.
생각이 얕았다. 철저하게 주변만 건드리길래 나름 이쪽의 움직임에 따라준다고 생각했다.
왕실도 자칫 잘못하면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했지만, 그것도 결국 일이 모두 마무리된 뒤가 될 것이라 여겼다.
설마 암살 위협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대뜸 수도 귀족, 그것도 백작의 저택으로 대뜸 처들어갈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엔벨데의 실력.
엘드미아가 아무리 독보적인 인재라 하더라도 엔벨데는 반평생을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오러 익스퍼트였다. 그의 반역에 동참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많은 것도 그 경험과 연관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평가가 좋았던 인물이다. 짧은 사이에 아무리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들 레스롬의 머릿속에서 엘드미아가 엔벨데를 이기는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그로 인한 엘드미아의 패배 혹은 사망으로 빚어지는 후폭풍.
이미 철혈 황녀는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비록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너무나도 원리원칙주의인 문지기 때문에 살짝 삐그덕 거리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 입장을 왕실 관계자들은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엘드미아가 죽는다면? 어차피 반역을 모의했기에 처리할 생각이었던 엔벨데의 정당 방위를 옹호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렇게 될 경우 철혈 황녀가 왕실에게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도 입 하나 뻥끗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멋대로 날뛰다가 죽었습니다, 라고 말하기엔 이미 깔린 판이 너무나도 컸다. 확실하게 억울함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으로 보인다. 제국이 들은 척도 안 한다고해서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조차 없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선문선답도 수준이 비슷할 때나 가능한 것이지..."
세 번째 문제는 엘드미아가 정말 홀로 엔벨데 저택을 초토화 시키고 기어이 그를 죽였을 경우.
어차피 엔벨데를 처리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온 상태였기에 그의 안전을 확보하고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무마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다. 엄청난 반발을 일으킬 것이고, 그를 견제하거나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커질 것이며, 원래대로라면 엘드미아를 통해 시도해보려고 했던 많은 계획이 갈아 엎거나 미루어지게 될 것이다.
"당돌한 친구같으니."
엘드미아는 분명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그 상황을 계산하고 움직였을 것이다.
15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소년은, 항상 움직인 뒤에 별 탈이 없을 때를 정확히 노리고 움직였으니까.
"각하. 척후가 돌아왔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기 위해 폭우 속에서 마차도 타지 않고 직접 말을 타며 사병들과 함께 저택으로 향하던 레스롬 공작에게 보고한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출발했을 때 미리 저택의 상황을 파악하고 오도록 시켰던 척후병이 거리를 박차며 달려오고 있었다.
"보고합니다! 엔벨데 저택은 본관까지 반파! 다른 귀족들의 사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으며 수는 백 여명 정도 되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인식한 척후병의 과정을 생략한 핵심 보고만큼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최소 다섯 명 정도 되는 반역자들이 사병을 이끌고 콩고물을 핥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레스롬이 보기엔 콩고물이 아니라 쥐약이었지만... 어차피 먹으려 드는 건 다른 놈들이니 알 바는 아니었다.
"저택 내부 상황은?"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허나..."
접속사 뒤에 따라올 말에 이렇게 가슴 졸여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느끼며 레스롬은 기도했다.
제발 아직 둘 다 살아 있기를.
"엘드미아 에가로 보이는 인물이... 보샤 백작으로 예상되는 이의 수급을 들고 본관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기도는 배신당했으나 레스롬은 이번에도 억울해할 틈 없이 있는 힘껏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