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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4화 (164/412)

전생에서도 비가 내리는 것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걷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비 맞는 거까지 걱정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외출할 일이 없다면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빗소리가 좋다기보단 나는 집에서 비 걱정 없이 있을 때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비 때문에 고생하겠지라는 뒤틀린 심보로 낄낄 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그친 뒤에 확연하게 올라오는 흙내음은 확실히 좋아했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극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냥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정체불명의 습격자여! 너는 포위됐다! 순순히 투항하라!"

물론 지금은 온천지에 진동하는 피 냄새 때문에 그딴걸 느낄 틈이 없지.

난 밖에서 들려오는 우스운 외침과 별개로 고요하기 그지없는 저택의 본관을 느긋하게 거닐며 말했다.

"내가 정보상에게 들은 기억을 더듬어보고 결론 내린 건데 말이야. 쟤들은 대부분 엔벨데의 기준에서도 한참 미달된 놈들이라서 자기 측근들로만 중요한 일을 준비한 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윌슨?"

지크멜은 말했다. 엔벨데는 철저하게 사람을 관리해서 측근들로만 일을 진행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라고.

얼핏 보면 정예 육성이지만, 결국 소수 인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는 법이고 반역은 그런 소수가 넘볼 수 있는 규모의 일이 아니다.

그랬기에 엔벨데도 세력을 꾸린 거겠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건 자신의 손안에서 움직이게 뒀다.

그렇게 피해를 입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나를 회유하려고 했던 놈의 성격을 봤을 때, 그 손안에 들지 못 하는 나머지들은 버림패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손에 들린 엔벨데의 머리는 당연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공감할 줄 알았어 윌슨. 역시 엔벨데의 대가리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쟤들과는 다르구나."

미친놈처럼 보이는 이 짓거리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고요하다는 게 인기척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2층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말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엄연히 사실이기도 했다.

비전투원인지 전투원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숨죽이고 지들딴에는 몸을 숨긴 채 눈알만 굴려 나를 바라보고 있길래 대놓고 미친놈인것마냥 떠든 것이다.

하지만 곧 밖에 놈들과도 싸워야 할텐데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저런 것들을 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 말이 통하는 윌슨은 지금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는 엔벨데의 하수인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 뭐? 싹 다 죽여서 에가의 윌슨 공장을 차리자고? 네가 한때 엔벨데의 투구걸이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의견이구나!"

"히야아악!"

"저, 저놈은 미쳤어! 도망쳐!"

병신들. 조용히 숨어 있었으면 그냥 조용히 튀는 게 더 안전할 텐데 굳이 비명을 지르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기에 미친놈 흉내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본관을 나섰다. 그러는 사이 누가 떨궜는지 알 수 없는 단검 하나도 눈에 들어와서 적당히 챙겨들고나니 어두운 와중에 횃불을 들고 정렬해 있는 인파가 나를 반겼다.

"허어. 많이 모였다."

저게 대체 몇 명이야? 다른 디자인의 깃발이 다섯 개 정도 있는 걸 보면 귀족놈들 다섯이 모였다는 소리이려나? 저렇게 온 이상 왕실에서 보낸 놈들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고,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 최대 사병수가 열다섯에서 스물 정도였던가? 어림잡아 백여 명은 모였다는 이야기인데.

"새끼, 재주는 좋았네."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 중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즉각 반응해서 올 정도의 간신배들 다섯은 두고 있었다라.

내가 엔벨데의 저택을 습격한지 30분도 제대로 안 지난 거 같은데 이런 수준이라는 건 솔직히 놀라웠다.

"보, 보샤 백작님이!"

"저 천인공노할 놈 같으니!"

우그러진 저택의 철문을 가로막고 밖으로 퍼져 있는 놈들 중 목소리 좀 낸다 싶은 놈들만 안으로 들어와 떠들고 있는 걸 보며 천천히 머리를 굴려본다.

분명 침입자인 나를 향해 외쳤지만 사실 쟤넨 내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정말로 사태가 위급하다고 느꼈다면 당장 저택으로 진입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저만한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진입은커녕 문만 지키고 있는 모습은... 엔벨데의 저택이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기에 귀족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로만 반응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어쩌면 놈들의 뇌내망상 속에서는 저렇게 당당하게 외치면 엔벨데가 내 모가지를 들고 나타나서 그들의 충성심에 감격하거나 마음에 들어하고 치하하는 형태가 그려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러고서야 당장 엔벨데의 대가리를 보고 사색이 되는, 전투와는 연이 먼 것 같은 놈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앞으로 튀어나와서 제 존재감을 어필하려고 했을 리가 없으니까.

이 상황이 위험이라 인식했으면 지들이 끌고 온 사병들 꽁무니에 숨어 있었겠지.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놈들 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놈이 유일하게 침착한 반응을 보이며 언성을 높였다. 다른 놈들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 허나 저놈 역시 엔벨데의 대가리를 보고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뭔가 주워 먹는 게 목적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엘드미아 에가다."

어차피 놈들 말고는 정적만이 흐르는 저택이었기에 굳이 목소리를 높힐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침착하고 태연하게 나가는 게 더 효과가 좋겠지. 난 저택 정문 좌우에 장식되어 있던 석상받이에 적당히 엔벨데의 머리를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다. 반역자 엔벨데는 죽었다. 그의 죽음에 불만이 있다면 너희도 같은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어찌 감히 왕국의 충신인 엔벨데 다 보샤 백작께 반역의 누명을 씌우며 이 부당한 습격과 살인을 정당화 하려고 하느냐! 그런 거짓 궤변을 늘여놓기 전에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리고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라!"

가만히 들어 보니 아까 투항하라던 것도 저놈이었네.

"엔벨데의 죄를 옹호하겠다는 말인가?"

"있지도 않은 죄를 어찌 옹호한단 말인가! 나는 너를 단두대에 올려 억울한 보샤 백작의 넋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 법을 바로 세우려는 것뿐이다!"

마치 웅변하는 듯한 말투. 과장된 몸짓. 그러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와 호기롭게 행동하는 모습.

어차피 엔벨데가 뒈진 건 뒈진 거고 남은 걸 긁어먹으려는 스멜이 난다.

"얌전히 해산해라. 너희는 엔벨데의 반역을 모르고 있었다고 여기겠다. 차후 왕실에서 그 진위여부를 밝히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겠지. 하지만 거절한다면 너희 역시 반역의 공모자로 여기겠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세 치의 혀를 놀려 위기를 모면하려 들다니!"

이름도 알 수 없는 중년의 털북숭이는 더욱 언성을 높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이미 너를 알고 있거늘!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레비엥의 창녀를 따라다니는 무법자 엘드미아 에가가 바로 네놈이라는 것을 정녕 모를 거라 여겼느냐!"

그리고 거하게 선을 넘기 시작했다.

"지고한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한 보샤 백작의 노력으로 인해 제 주인이 위기에 처하자 기어이 미친개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을 물어뜯었다는 사실을 이미 세상이 알고 있다! 더 이상 네놈의 헛소리를 듣고 있다간 귀가 썩겠구나! 나 그로샨 다 자비쉬와 함께 저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심판할 자는 누구인...각?!"

호기롭게 고개를 돌려 뒤의 사병들을 선동하려던 놈의 목을 향해 던진 단검이 깔끔하게 박히며 마지막 말을 끊었다.

파악은 끝났다.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며, 저놈은 사자가 없는 숲속에서 왕이 되려는 여우 새끼였단 말이지.

그럼 자질구레하게 말하는 것보다 행동이 더 빠르게 먹히는 법이다.

"씹새가 한눈을 팔고 있어."

단검을 줍길 잘했지. 버둥거리며 제 목을 더듬거리던 그로샨인지 하는 놈이 허물어지는 것을 넋 놓고 지켜보던 놈들이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고, 공격! 저놈을 당장 처단해라!"

그리고 그나마 생명의 위기를 감지한 한 놈이 뒤로 도망치며 제 병력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다른 세 놈들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뒤로 내빼며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야, 윌슨아. 넌 정말 저런 애들을 데리고 반역에 성공할 거라 믿었던 거니?"

나야 뭐 오러를 못 느끼고 귀족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쳐도, 쟤들은 엔벨데를 알만큼 알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엔벨데와 그 저택의 전투 병력을 작살낸 인간을 향해 무지성 돌격을 시도한다고?

심지어 그 사병이라는 놈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그래, 인생 씨발 힘든 게 있으면 쉬운 것도 있는 법이지."

정말 놀랍게도 백 명은 되는 인간들이 한 번에 달려오는데 겁이 안 난다.

다섯 집단의 병력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지들이 먼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앞다투며 달려오고 있는데, 거기에 두려움을 느끼기엔 이미 내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농담 안 하고 대충 각 잡고 검 한 번만 휘둘러도 두 세놈씩은 죽을 거 같은데?

말이 백명이지 스무 놈 정도를 다섯 번 상대하는 수준일 뿐더러, 이미 지휘자 한 놈이 죽어 버린 터라 그놈 휘하의 사병들로 보이는 몇 놈들은 주저하며 뒤로 물러선 상태다.

저렇게 개판이면 저택까지 끌어들여 싸우는 것만으로도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손쉽게 끝나겠군.

"나는 엘드미아 에가다!"

그래도 진지하게 임하려고 했는데 검을 뽑으며 외치자마자 우르르 뒤로 물러서는 꼴을 보고 있으니 힘이 빠졌다. 보는 눈이 많으니 진지하게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해먹겠다.

"하아... 알아서 빠질 놈들은 빠지고, 아니면 들어와 씨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얕보는 태도를 보인 탓일까. 그나마 욱 하는 반응을 보이는 몇 놈들이 검을 뽑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선두에 섰다.

사이좋게 일렬로 달려드는 세 놈들을 한 번에 베면 조금은 도망을 칠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기에 난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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