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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5화 (165/412)

아무리 오러가 있다고 해도 신장과 사거리가 지니는 이점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고, 비슷한 실력이라면 당연히 창과 활의 유무를 통해 전투의 난이도가 달라진다.

근데 그것도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면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쟤들이 뭘 들고 있어도 달려들어서 뚝배기를 쪼개버리면 끝이니까. 기술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그 지경까지 숙련도와 실력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는 차라리 지금처럼 길이가 똑같은 검을 들고 있는 편이 더 번거롭다. 아예 동료애로 똘똘 뭉친 놈들이면 모를까, 저들끼리 공적에 눈이 돌아가서 아군이고 뭐고 기회만 오면 일단 나에게 칼빵을 놓으려 하는 놈들이면 더더욱 귀찮지.

하지만 상대가 아예 오러조차 깨우치지 못한 녀석들이라면? 개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보통 무기의 상태 정도는 신경 써야 하겠지만 이쪽은 개쩌는 전기톱으로 사람이고 장비고 다 갈아버릴 여력이 있으니 그마저도 논외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휘두른 첫 일격의 효과는 골목길 때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사람이 셋이 방어구랑 함께 무슨 두부마냥 썰렸으니까.

놈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지.

"우와아악?!"

"씨, 씨발! 비켜! 비키라고!"

겨우 그 한 번으로 나름 호기롭게 달려들던 사병들의 움직임이 꼬이고 개판 5분 전이던 것이 아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직접 눈앞에서 목격하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빼는 놈, 그래도 나름 머리를 쓴다고 한번 베었으니 틈이 생겼을 거라 믿으며 찌르고 들어오려는 놈, 지들끼리 가려져서 보지 못해 아직도 겁없이 달려드는 놈, 앞에서의 반응에 상황을 파악하고자 주춤거리는 놈 등등.

짧은 순간에 눈앞에서 펼쳐진 그 모든 반응들이 그냥 너무나도 한심해서 겨우 다잡은 의욕조차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엘드미아지."

의욕이 좀 죽었다고 해서 손속을 둘 정도로 가볍게 검을 휘두른 적은 없는 만큼, 빈틈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 하는 놈의 검을 피하며 그대로 복부를 걷어차 혼돈 그 자체인 무리들 한가운데로 날려 버렸다.

그러자 사람이 겨우 발차기 한 방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본 또 다른 놈들이 이상을 눈치채고 도주각을 재느라 혼란이 더욱 가중되기 시작했다.

애당초 힘에서부터 격이 다르다. 그냥 쌍검을 꼬나들고 좌우로 휘두르며 가는 것만으로도 길이 열리는 어이없는 광경이 연출된 탓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뻔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참았다. 암만 그래도 사람 베어 죽이면서 웃는 사이코패스까지 평가가 떨어지면 조금 위험할 거 같으니까.

사병들을 앞으로 내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놈들에게 달려가기 위해 시도한 중앙 돌파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이뤄졌다. 스무 명을 다섯 번에 나눠 상대하는 것조차 아니고 그냥 저 인파를 돌파하는 동안 벤 게 스무 명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다.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귀족 놈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며 삿대질과 함께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 막아라! 당장 저놈을 막으라고!"

"도, 도망치지 마라! 저 매국노를 죽여!"

도망을 치지 않은 건 자신들의 명령으로 인해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되도않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딱히 영양가는 없어 보였기에 난 주저 없이 가속해서 놈들의 목도 베어 주었다.

"양손에 검을 쥐니 어설픈 놈들 목을 베는 것 자체는 참 편하네."

처음 목이 날아간 그로샨이라는 놈의 사병들은 이미 내가 달려옴과 동시에 사방팔방 도주했고, 놈들이 호위랍시고 남겨둔 얼마 안 되는 사병들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귀족놈들의 머리를 따고나니 아무런 주저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것으로 대충 목적은 달성했군.

가벼운 성취감과 함께 엔벨데 저택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를 틀어막은 뒤 새로운 마음으로 저택을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혼란대신 허망함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생존자들의 이목이 나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무기를 내려놓든가, 날 죽이고 도망치려는 시도를 해보든가. 알아서 선택해라."

장대 높이뛰기로 담을 넘지 않는 이상 선택지는 그것 뿐이지.

다행스럽게도 보상을 약속할 대가리를 잃어 버린 사병들은 주저 없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장판파 장비를 흉내 내며 저택의 입구를 틀어 막고 있는 동안 점점 일반인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할 때, 저 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랍게도 레스롬 공작이었다.

"...늦었군."

어째서 저 영감님이 나타난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살갑게 물어볼 만한 입장도 아니라서 멀뚱히 바라보고 서 있었더니 지친 얼굴을 한 레스롬 공작이 말에서 내리며 가벼운 손짓으로 호위들을 대동하고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도록."

그러고는 반원 형태로 경계를 세운 뒤 내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감이 안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군."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생각나는 것부터 말씀하시죠. 하지만 그 전에, 어떻게 각하께서 먼저 오실 수 있었던 겁니까?"

"꿈을 섬기는 자가 언질을 넣어 주었네. 자네가 엔벨데의 저택에 돌격했다고 말이지."

난 당연히 오가토르프 저택이나 뭐 그런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몽순이의 상황 판단 능력과 임기응변 능력은 내 예상보다 뛰어났나보다.

다시금 몽순이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침착하게 나를 훑어본 레스롬 공작이 물었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엔벨데를... 아니지. 그건 나중의 일이군. 대체 어디까지 예상하고 움직였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역모를 꾸미고 있다 하더라도 엔벨데는 엄연히 귀족임과 동시에 아직은 죄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지. 그런 상황에서 저택에 들어가 그의 사병을 죽이고 당사자마저 죽여 버린다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일반적으로는 말이지."

레스롬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에 불편한 감정같은 건 없다. 그저 혹여라도 내가 본심을 숨기거나 대답을 회피할 경우를 대비해서 최대한 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네는 결코 불리할 상황에 먼저 움직이지 않아. 나는... 이번에 자네가 취한 행동을 왕실에 대한 항의라고 여기고 있다네."

"그거 참 굉장한 관점이로군요. 어째서입니까?"

"과정과 의도가 어쨌든 간에 왕실은 엔벨데를 잡기 위해 자네와 레비엥 변경백의 위험을 방치했으니까. '결국엔 좋게 좋게 끝나지 않았느냐.'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지. 누군가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분명 여러 위험한 상황들이 있었어.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그 '누군가'가 매우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겠네요. 하긴, 저라도 그건 좀 화가 날 거 같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지만 레스롬 공작은 딱히 불쾌해하기보단 그저 피곤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심지어 왕실은 엔벨데를 정리한 뒤 여러모로 자네와 레비엥 변경백으로 부수적인 이득을 보려고 시도했지. 그사이 아무런 보상도 안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네. 적어도 내가 판단한 자네는 그런 논리로 움직이며 '보상을 받았으니 지난 일은 봐 준다.' 같은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와 겨우 몇 마디 밖에 나눠보지 않았음에도 레스롬 공작은 예리했다. 이러니 정치인들은 상종을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랬기에 왕실에서 정당한 절차에 걸쳐 엔벨데를 처분하고 자네의 입지를 입맛에 맞춰 이용하기 전에 자네가 미리 선수를 쳤다는 게 내 예상이라네."

소위 말해 엿 먹인 거다.

왕실은 지금의 나를 내칠 수 없다. 심지어 라그니스도 내칠 수 없다. 애당초 내칠 생각이 없던 것을 떠나서 이젠 내치고 싶어도 못한다.

오그웬에서 그런 쓸데없는 극적인 연출까지 해가며 그녀를 수도로 데려온 것은,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만듦과 동시에 영토 수복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젊은 이들의 영웅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거니까.

거기에 예상치 못 하게 딸려온 나는 어떠한가? 이제 제국과 연이 닿을 뿐만 아니라 용사와 루드라의 개새끼를 이겨 먹은 인재이자, 철혈 황녀의 친서를 직접 전달한 사자使者이기까지 하다. 그것만으로 나와 에스뮈에의 사적인 관계까지는 짐작 못한다고 한들, 나라는 개인을 통해 나라의 서한을 전달했다는 게 최소한 무슨 의미였는지 알아낼 때까지는 내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상황인 것이다.

즉, 지금 이순간만큼은 내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한들 왕실에서는 어떻게든 커버하기 위해 기를 써야 한다는 거지. 근데 심지어 그 미쳐 날뛰었다고 볼 수 있는 행동마저도 반역자를 소탕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나무랄 수 있는 명분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귀족의 권위와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 행동으로 인한 일부 귀족들의 반발? 그거마저도 나에겐 이득이다. 그런 반발이 있다면 나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대대적으로 이용해먹을 각은 더더욱 나오지 않을 테니까.

왕실을 위해 열심히 깔아 놓고 있던 판 위에서 나홀로 술판을 벌이며 혼자 즐긴 수준이니, 엿 먹였다는 표현보다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지크멜의 말대로 정보라는 건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고객을 만나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인데 그걸 애먼 놈이 지 고깝다는 이유로 낚아채서는 좋을 대로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못했을 걸. 어느 미친놈이 한 나라의 왕실에 그딴 깽판을 쳐.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얼마나 잘 이용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 주면서도 피해 보단 이익을 안겨 줬으니... 건드리지 말아라.' 이 습격으로 자네가 하고 싶었던 말 아닌가?"

"글쎄요...?"

"그래도 내가 자네에게 모난 구석을 보이진 않았잖은가? 늙은 몸으로 여기까지 급하게 말을 몰고 온 정성을 봐서라도 대답해줬으면 하는군."

에잇 씻팔. 감성팔이. 그런데 이걸 또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힘들다.

이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지위마저 내려놓은 채 어울려주는 공작이라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왕실과 나라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움직이는 것만큼은 진심인 양반인 것이다.

오히려 엔벨데처럼 오만하다고 바락바락 화를 내고 역정을 내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날 좆같이 하는 상대에게 좆같이 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날 존중해주는 사람에게 좆같게 구는 건 좀 많이 어렵다.

"각하의 예상이 너무나도 정확하셔서 그냥 좀 튕겨봤습니다. 정확하게 봐주셔서 첨언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예를 갖추며 고개 숙여 대답하자 아까와는 달리 안도의 한숨과 함께 레스롬 공작이 물었다.

"왕실이 이 항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자네의 행보가 우호적으로 변할 여지가 있다고 여겨도 되겠는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 모든 걸 헤아려주신다면야 깔끔하게 청산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다행이군."

마치 그걸로 다 해결되었다는 듯, 레스롬 공작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는 서로에 대한 오해 없이 잘 이해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구만."

방금 전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밝은 어조의 대답에,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본 레스롬 공작은 피로에 찌든 얼굴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설마?"

"맞아. 이미 이곳에 출발하기 전에 보고를 마쳤네. 조금 허탈해 하셨지만 이해 하시더군."

이 영감탱이, 내가 더 강짜를 부릴까 봐 연기한 거였어...!

"서로서로 원만하게 배려한 끝에 끝날 수 있는 합의라니 얼마나 좋은가? 오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게나. 깔끔하게 처리하지."

허허허 웃으며 사람을 물리고 함께 온 사병들을 동원해 저택에 진입하는 레스롬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번만큼은 나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상당히 많은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텐 데도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니 넘어간다치고 추가적인 피해를 줄이는데 집중하는 레스롬 공작의 모습은 그야말로 능구렁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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