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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6화 (166/412)

레스롬 공작이 왔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떠넘기고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일을 저지른 건 사실이니까.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내가 기습을 받았던 장소를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 일종의 사정청취를 진행하는 동안 사병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죄수처럼 쇠고랑을 채우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왕실의 대처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어보였다.

"거하게도 질러놨구만."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 레스롬 공작을 구경하며 엔벨데의 저택을 바라보니 새삼 가관이긴 하다. 그걸 남 일처럼 중얼거리고 있자 하니 움찔거리면서 날 구경하던 다른 사병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저질러 놓은 사람이 입에 담을 감상이 아니긴 하니까.

명색에 귀족인데 저택에서 참살을 당했다는 소문이 좋게만 퍼지지는 않겠지 같은 생각이나 하며 멍때리고 있었더니 웅성거리는 인파를 뚫고 아실리에와 라그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일찍 왔네?"

짧은 순간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두 사람의 표정에 안도감이 물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오가토르프 저택이었다면 어김없이 등짝 스매쉬가 날아왔을 게 분명하다.

다행히 사병들은 라그니스를 알아보고 딱히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아실리에가 내 몸을 살피는 사이 보는 눈 때문에 차마 그 행동을 함께 하지 못한 라그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어."

아,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옌 티에한테 족쇄를 채우지 않기로 결정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밖에 안 들 정도였다고."

"확실히 능력이 좋긴 하지. 비싼 돈 주고 고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왜 이렇게 갑자기 움직인 거야? 언질이라도 해줬어야지!"

"응. 그건 누나도 같은 생각이야. 혼자서 움직인 거보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 아니니?"

배에 난 관통상의 흔적을 예리하게 캐치해내고 불만스럽게 손가락으로 찔러보이던 아실리에가 라그니스에게 동조하며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예상이라기보단 그저 한 놈만 걸려라 라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간 눈총에 찔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적당히 늘려서 둘러대기로 했다.

"당연히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어. 엔벨데가 서두른 건지, 부하들이 서두른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일이 좀 갑작스럽게 진행된 건 맞아. 나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저택에 돌아가서 이야기를 전달하면 연관성이라던가 개연성을 진술할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그냥 온 거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말을 즉석에서 지어낸 건 아니다.

이건 엘드미아 에가의 독단이어야만 했다. 왕국 귀족인 레비엥 가문과 오가토르프 가문이 엮였다는 인식을 줘봤자 좋을 게 없다. 나도 마침 에스뮈에의 편지가 왔으니 마음 편하게 지르고 본 거지, 그게 없었으면 일일이 사직서를 제출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니까 지금도 이렇게 아예 상관없는 아실리에와 재판의 당사자인 라그니스만 온 거겠지. 명확하게 왕실의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오가토르프 가문은 지금 나한테...

"엘드미아!"

"...쟤가 왜 여기 있어?"

인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셰릴을 보고 벙찐 나와 달리 라그니스와 아실리에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옌 티에가 말해줬겠지."

"아니, 걔가 말해주는 건 말해주는 거고. 쟨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야 임마. 네가 지금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무슨 헛소리냐. 전투 중에 머리라도 맞은 거냐?"

건방진 말투와 달리 셰릴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니가 날 걱정할 때가 아닌데?

"오가토르프 가문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하냐?"

"너 일단 우리 가문의 사용인으로 고용된 상태라는 건 기억하고 있는거 맞지?"

"아니 그거야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일이지. 이 상황에서 네가 온다는 게 말이 되냐?"

아무리 레스롬 공작이 우호적으로 대답하고 왕실의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한들 그건 구두로만 전달된 거지 확정된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물론 오가토르프 가문이 충신 가문이라고는 해도 최대한 이슈가 될 문제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인데 얘가 여기 있으면 괜한 구설수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내 계산과 달리 셰릴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반응한다.

"네가 엔벨데의 저택을 급습한 건... 말이 되고?"

"...아니, 그거야 나름 계산을 해서..."

"오가토르프는 신념을 따른다. 아버님도 일이 있어서 못 오신거지, 저택에 계셨다면 당장 달려오셨을 거다. 네가 네 일을 한 것처럼 나도 내 일을 할 뿐이니 걱정하지 마."

괘씸한 것. 할 말이 없네.

결국 어영부영 다 모인 이들에게 적당히 상황을 전달해준 나는, 돌아가면 등짝이 거덜날 것이라는 강한 확신 속에서 그들을 배웅하며 사병들과 이동하게 되었다.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래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레스롬 공작은 말을 타고 왔으면서도 굳이 나와 걸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어째 걱정해주는 이들이 전부 여성이로군?"

되게 바쁘게 움직이던데 그걸 또 봤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듣기로는 하얀 별의 서한도 자네가 가져 왔다던데 말이지."

참 미워하기 힘든 영감님이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 살갑게 대할 줄 아는 유연함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간에 이번에 고생시킨 것도 사실이니 이번엔 나도 좀 사근사근 대해주기로 했다.

"그랬죠. 아, 혹시 그때 저 못 들어가게 했던 문지기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아십니까?"

"한 나흘을 변소에 가지 못한 듯한 안색을 했다던데? 그래도 딱히 경질되거나 하진 않았으니 또 볼 수 있을걸세. 어찌 보면 월권을 저지른 거라 시말서를 쓰고 감봉은 좀 받았겠지만."

"월권이요?"

"예기치 못한 상황은 전부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하지 않겠나. 제멋대로 대수롭지 않다 판단해서 자네의 언질이 있었음에도 문전박대를 한 것이니 제 권한을 넘어선 건 사실이지."

"그런 거 일일이 다 보고하면 또 보고한다고 욕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알아서 잘 판단해야지."

하여간 군대는 어딜 가나 똑같다니까.

그래도 그 문지기 덕분에 대화의 주제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으니 다음에 보면 적당히 넘어가줘야겠다.

그 뒤의 일은 상상 이상으로 평범했다.

귀족원으로 들어가서 마차로 옮겨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싶었더니 정말 예전에 라그니스가 묵었던 임시 구금소가 개 쓰레기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임시 구금소에 머물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끝에 깔끔하게 씻고 침대에 눕게 된 나는 격렬하게 육체에서 이탈하려는 어이를 붙잡느라 고분고투해야만 했다.

"생각하니 더 어이가 없네."

나름 단출하다고 할 수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겉으로 봤을 땐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뭔 또 새로운 사람이라도 만나나 싶었다. 근데 여기가 임시 구금소라더라.

레스롬 공작이 한 번 더 라그니스에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공식적인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으면 반파된 구금소에서 밤하늘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가 귀족 사회를 몰라도 너무 몰랐나보다.

"후... 그래. 그래도 인생에 큰 걸림돌을 던지던 놈 하나는 잘 정리했으니 그거로 만족해야지."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국 엔벨데의 개입이 없었으면 내가 수도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나와 아실리에의 관계는 정말 약속된 기간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이별이었기에 좀 더 진솔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정리되었다는 건 확실하지. 드디어 지긋지긋한 정치 놀음에서 빠져나올 때가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내년에 받게 될 방랑 기사 서훈이니, 그 뒤로는 알뜰살뜰하게 모은 돈으로 장비를 갖추고 전선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아, 그 전에 오그웬에 한 번 들리기로 했지."

그럼 비룡을 타던가 해서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부 전선 쪽으로 가야겠네 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참 기구한 인생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의문이 생겨났다.

"대체 마족 새끼들은 왜 애먼 서부까지 와서 우리 마을에 그 지랄 깽판을 치고 간 거지?"

예전에는 그냥 이티스엘 남부 지역과 동부 언저리가 마족령이니 운이 없었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날 이후로 서부에 마족이 침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마을에 뭐가 있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흔한 클리셰대로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마을이었으면 애저녁에 눈치챘을 것이다.

"노예 상단? 그 새끼들하고 뭔가 문제가 있었나?"

아실리에는 분명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에 의해 자기가 잡혀있던 노예 상단이 전멸 당했다고 했다. 당시엔 굳이 티를 내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우리 마을을 습격했던 마왕군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방적으로 습격해서 싹 다 죽인 다음 전리품도 안 챙기고 갔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

"...잠이나 자자."

정보도 없는데 고민해봤자 시간만 날아가고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 차라리 한숨이라도 더 자서 몸을 회복하는 게 이득이었다.

이곳에 머무는데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모처럼만의 휴식을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잠들고, 일어나서 가벼운 운동을 하고, 사용인에게 부탁해서 빌려온 책을 읽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영위한지 이틀 째가 되던 날.

에스뮈에가 왕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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