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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7화 (167/412)

에스뮈에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정말 '매우' 좋았다.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를 상대하는 이들은 의중을 떠보는 것으로 밥그릇을 키워온 귀족들. 천재인 그녀가 노력했음에도 미세한 심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정치판에서 오랜 시간을 구르고 굴러 온 정치의 베테랑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눈에 비친 에스뮈에는 '기분 좋은 것을 억지로 감추는' 게 아니라 '매우 불편한 기색을 억지웃음으로 감추는' 중이라는 점이다.

그녀를 환대하기 위해 나온 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예를 표했다.

"제국의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별을 뵙게 되어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리는 심리에서 나온 완벽한 오해였다. 상식적으로만 따져 봤을 때 그녀의 이번 방문은 절대 기분 좋은 사유가 아니었으니까.

제국에 직접 초대해서 좋은 관계를 맺은 인물은 반역 혐의로 재판 중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제국의 서한을 왕실로 전달까지 한 인물은 반역자를 도륙냈단 이유로 임시 구금소에 갇혀 있었다.

심지어 서한을 들고 입성하긴 커녕 문지기에게 문전박대까지 당했으니, 설령 그녀의 얼굴에 맺힌 것이 진실된 미소로 보일지라도 과도하게 분노하면 웃는 병에 걸렸을 거라 생각하는 게 그들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제국의 철혈 황녀가 며칠 만에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기분이 좋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게 당연했으니까.

"저는..."

"엘드미아 에가는 어디 있느냐."

무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녀였으니까. 오히려 허락 없이 감히 먼저 자신을 밝히려 한 게 무례였다. 그러니 지금 자신은 무례를 용서받은 상황이며, 침착해도 된다.

황녀 환영단의 대표로서 자리에 서 있던 귀족은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가며 최대한 빨리 머리를 굴렸다.

"에가 경은 현재 왕실에서 제공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휴식?"

"예. 혼란한 시기에 왕국의 전복을 시도한 반역자들을 단신으로 처단하였으나, 아직 그 잔당들이 남아 있는 터라 왕실의 이름으로 보호 중입니다."

이미 정해진 대답이었음에도 몇 번이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탓에 겨우겨우 완성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귀족은 자신이 해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 납득한 황녀를 데리고 왕성으로 향한 뒤, 국왕 폐하와 환담을 나누는 동안 엘드미아 에가를 데리고...

"호오, 듣던 것과는 달리 꽤나 양호한 상태로구나."

겨우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한 머리가 다시 한번 굳었다.

듣던 것과는 달리...?

"여가 마지막으로 소식을 접했을 땐 조금 다른 양상이었는데 말이지. 그대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느니라."

식은땀 때문에 등이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다. 황녀가 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설마... '보호'가 아니라 '구금'인 것을 지적하는 건가...?

고개를 숙인 상태로 핑핑 돌아가는 그의 머리 위로 철혈 황녀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느니라. 안내하도록."

"왕성으로 향하시는 동안 그도 초청하여..."

"왕성은 그를 확인한 다음이니라. 애당초 이번 내방은 그를 대동할 필요가 없을 터. 굳이 휴식을 취하는 중인 이를 끌고 움직일 필요가 어딨겠느냐."

식은땀이 등을 적시다 못해 옆구리까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지만 황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황녀의 친위대라는 흑기사들과 수행원들마저 묵묵히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며 대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결단을 내리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황녀님. 너희는 왕성으로 향해 황녀님의 의사를 전달해 두도록. 그리고 에가 경이 칩거중인 곳에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언질을 넣어라."

지시를 받은 이들은 이해했다. 저 '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황녀가 도착하기 전까지, 임시 구금소 내부를 귀족 저택 저리가라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놓으라는 의미라는 것을.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말이 임시 구금이지 사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외의 모든 행동이 가능한 상태인지라 나의 하루 일과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용인이 차려 준 식사를 먹고, 씻고, 홀로 개인 단련을 하고, 심심하면 책 보고 뒹굴거리고 진짜 뭘 하든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게 있으면 상전 받들듯이 구해다 주기까지 하니 이건 구금이 아니라 호캉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아무도 면회를 오지 못한다는 점. 하지만 대우가 너무 좋다 보니 딱히 불만스럽지는 않다.

무기도 그대로 둘 뿐더러 엔벨데 저택에서 약탈한 기쉬와 엔벨데의 검도 그대로 방치 중인데, 겨우 면회 못하게 한다고 성질을 내긴 좀 그래.

"양아치 공룡 둘리가 된 기분이군."

내 편의에 맞춰 그 난리를 치고도 이렇게 호화스러운 대우를 받다니.

나는 오묘한 기분 속에서 간만에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한 몸과 검 세 자루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곳에 박혀 있다고 해서 게을러질 생각은 없으니 여유가 있을 때 마력 컨트롤을 연습해볼 요량이었다.

그래도 구금소답게 뒷마당은 없다. 하지만 뒷마당을 대체하는 작은 훈련장이 존재한다.

대체 어디까지 편의를 봐주려는 건지, 정말 죄가 의심되는 사람을 잠시 가둬두는 장소가 맞기는 한 것인지 의구심이 치솟을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되고 격리된 훈련장이.

거기서 훈련하고 있다 보면 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려서 식사를 챙겨 주는 서비스도 함께 한다.

덕분에 자꾸 라그니스가 겪어야 했던 대우와 대비되는 바람에 이가 갈렸지만 꾸역꾸역 참아가며 훈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일단 내구도 테스트부터 해 봐야지."

구데기 같은 검은 아예 마력을 모아두지 못하고 밑 빠진 독에 들이부은 물처럼 흘러나간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검은 마력을 담을 줄 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좋은 검은 한계치 이상의 마력을 주입해도 가능한 만큼만 담고 나머지는 알아서 흘려보내지만 어중간한 검은 보내는 족족 다 담으려다가 깨지려고 한다는 점이다.

"쇠붙이 주제에 왜 물풍선처럼 굴어서 터지는지 모르겠네."

스승이 없으니 물어볼 사람도 없고, 결국 남은 건 독학 뿐. 그래도 구체적인 이론보다 감각에 의존한다는 점에 감사하며 나는 엔벨데의 검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흐음."

이어서 기쉬의 검에도 마력을 흘려보내 반응을 확인한 나는 두 검을 바닥에 내려 두고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 검보다...구려...!"

압도적이라고 할 것까진 아닌데, 명백히 구리다! 그래도 두놈 다 명색에 기사인데 이런 무기를 썼다고?

마력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분명 좋은 무기이긴 한데... 한계가 명확하다. 여기다가 마력을 씌우면 무조건 작살난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데.

"실망스럽네. 그냥 적당히 팔아서 밑천 마련에 써먹어야지."

그래도 오늘 연습하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난 바닥에 놓인 두 검을 향해 마력을 운용하며 신경을 집중했다.

목표는 간단하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 어검술의 완성.

손에 닿지 않은 무기를 끌고 오는 것과 그렇게 끌고 온 무기를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투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거대한 이점인지는 엔벨데가 몸소 증명해주었으니, 그걸 극대화시키기 위한 훈련이었다.

나름 커리큘럼도 구상해 두었다.

처음엔 가만히 서서 검 두 자루와 연동을 하고, 다음에는 움직이면서 연동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마력을 이용해 강화한 상태로 달리면서도 연동이 가능하게 만든 뒤, 투척하는 식으로 천천히 진도를 뺄 생각이다. 일단 이런 운용만이라도 익숙해지고 나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능숙해지면 싸구려 검도 마음대로 움직이고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시...요령만 터득하면 연동은 할 만 해."

그전까지는 효율 좋은 검으로 훈련이지.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장인이 아니니까.

두 자루의 검을 내 눈높이까지 올리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그 상태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것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검을 날리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답답해!"

한 손으로는 세모를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원을 그리며 혓바닥으로 글을 쓰는 기분이다!

아무리 두 자루라고는 해도 내 검 한 자루를 움직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말을 안 들어 먹는지라 뭐라 형언하기 힘든 불편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나 차이가 심하게 날 줄은 몰랐는...어억!"

분명 집중한다고 집중했는데 갑자기 통제를 잃어 버린 기쉬의 검이 돌연 엄청난 속도로 내 귓가를 지나 쏘아졌다!

"씨벌... 귀 떨어질 뻔했네."

3D 게임에서 물리 엔진 오류가 생긴 오브젝트가 갑자기 튕겨 날아가는 모습을 현실로 본 기분이다.

"별로 마력도 안 넣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날아간 거지...?"

뭔가 약간의 마력만으로도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 걸까?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심오하게 다가오는 어검술이었다.

그래도 기왕 멀리 날아간 거 마력으로 다시 회수하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었더니 훈련장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에가 경. 잠시 괜찮으신지요."

맛있는 식사와 청소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 유능한 메이드의 목소리였다. 어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에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정체불명의 부산함이 함께하고 있었다.

"내방자가 있을 예정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내방자...? 면회는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제국의 제 1 황녀님께서 왕국을 방문하셨다는 전갈입니다. 강력하게 에가 경과의 만남을 원하고 계시기에..."

"에스... 제 1 황녀님께서?"

편지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에 놀라 훈련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나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이게?"

수많은 사용인들이 그리 넓지도 않은 구금소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두 눈에 불을 킨 채 전투적으로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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