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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9화 (169/412)

별로 길지 않은 포옹 끝에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뮈에는 살짝 빨개진 귀에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 아무튼. 그대와 같은 경우는 솔직히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시피 한 터라 확실하진 않지만, 공적인 자리에 끌려가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느니라."

"그, 괜히 안았나...?"

"허, 허튼소리 하지 말거라. 바로 왕실에 가야 하는데 흐트러진 상태면 좋지 않기 때문에 움직인 것이니. 결과에 따라 좀 더 강하게 안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니라!"

좋은 결과가 있으면 또 안기겠다는 말 같은데... 안긴 건 부끄러우면서 당당하게 자기 입으로 저렇게 선포하는 건 부끄럽지 않은 걸까.

나도 조금 부끄러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 외에 내가 더 알아 둘 건 없고?"

"딱히 없을 것 같구나. 사실 그대가 보상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이것저것 조율을 해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전혀 관심도 없으니. 졸지에 여의 사심만 채우는 시간이 되어버렸느니라."

에스뮈에는 심호흡과 함께 빠르게 정상화 되어가는 안색을 방에 비치되어있던 거울로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정리가 되는 대로 기별을 넣을 터이니 편히 쉬고 있도록. 솔직히 제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너무 몸을 함부로 굴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느니라."

"좀 그렇긴 하지...?"

"그대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죽으면 뭣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마지막 말만큼은 장난기 하나 없는 단호함으로 이루어졌기에, 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방문을 마친 에스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 흑기사들을 이끌고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따르는 왕국 귀족들의 얼굴에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걸 알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내 알 바는 아닌 만큼 그녀가 가는 길을 배웅하는 것만 신경 쓰기로 했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에스뮈에의 방문 이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사용인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바뀐 고급 가구만이 어색하게 남아 있을 뿐.

갑작스러운 방문에 조금 싱숭생숭해지긴 했지만, 마음을 다잡은 나는 기왕 씻은 거 남은 시간은 메이드가 빌려온 마법 서적이나 읽으며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에는 이를 갈며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내 언젠가 반드시 이 책을 저자의 면전에 집어던지고 말테다..."

[초보 입문자를 위한 간결하고 손쉬운 마법학]

저자 타네벨로 비스탈.

제목만 놓고 보면 분명 지금의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겼던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믿고 버티고 버티다가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딜 봐서 초보 입문자를 위한 책이야 씻팔!"

제국 아카데미에서 라그니스가 잠깐 들고 다니던 책만 해도 이거보단 쉽겠다!

도무지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전문용어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며 이 시대 특유의 복잡한 문체와 어우러지는 것을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읽어보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혹시 급작스러운 난독증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심혈을 기울여 다시 읽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난 이를 갈며 탁자 위에 책을 올려 둘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던지고 싶을 정도지만 비싼 물건이라 참는다!

"설마 마법학 관련 서적은 다 이런가...?"

아실리에에게 말로 배울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 이게 평균이라면 독학은 좀 많이 무리일지도.

"정리되는대로 배울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이라는 건 단편적인 지식을 제외하면 결국 전부 전생에서 읽고 봤던 판타지에 기인한다.

하지만 과학을 대신해 한 세계의 문명을 견인하고 있는 학문답다고 해야 할까, 그 정도로는 마법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는 게 이곳의 현실이다.

그냥 불씨를 붙이거나 하는 간단한 건 가능해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불덩이를 쏜다던가, 보호막을 치게 한다던가 하는 마법들은 전용 공식과 이론을 기반으로 행해진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런 이론 없이 '진짜' 마법을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라? 아실리에가 이거에 대해 뭔가 역사 같은 걸 말해줬던 거 같은데."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네. 대부분의 종들이 마나와 오러를 정제하는 법을 배우고 마법을 깨우치며 문명이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던 거 같은데...

용이 전수해줬다고 했나, 용에게 마법을 배운 누군가가 전수해줬다고 했나 좀 가물가물하다.

지나가는 투로 마나로 된 공식으로 이루어진 마법들이라서 내가 익히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 좀 더 원류에 가까운 마법을 연구하는 책을 보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식의 대화도 나눴던 거 같다.

"라드넬반데스 경한테 도움받아 볼 수 있으려나."

사실 이전까지는 딱히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마력을 오러처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마무시 하니까. 애당초 마법사와 전사 모두 존중받는다는 것부터가 오러와 마나 중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고, 조금은 안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 살고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도 마법은 모르고 사는 편이니 괜찮을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마족 씹새를 겪고, 렐리에의 마법을 보고 나니 생각이 좀 많이 바뀌었다.

내가 모르는 모든 마법은 그 자체로 변수다. 심지어 제국에서 만난 노래하는 정신 나간 계집의 경우엔 눈으로 보고도 끊을 방법이 없었다.

평범하게 살면 모르겠는데 원대한 복수의 꿈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마법을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전투에 있어 마법이 대체 어떻게 쓰이는지는 겉핥기로나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만큼은 일단 손이 닿는 대로 조언을 구하고 부탁을 해 봐야겠군."

혹시 알아? 그림자 발과 같이 예상치 못한 만남이 또 있을지.

거기까지 고민하고 나니 새삼 구금소에 묶여 있는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지만, 이것만큼은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냥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그런 생활을 3일 간 반복한 끝에, 나는 구금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 평안하시길."

"메시엘라 씨도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잘 쉬다가 가네요."

길고 긴 호캉스가 호캉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인 침착 유능 메이드 메시엘라 씨는 내 활기찬 인사에 그간 지내면서 보여줬던 것 중 가장 큰 감정 변화를 보여줬다. 무려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려 웃어 보인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그런 인사를 들어 본 것은 처음이군요. 부디 다시 뵐 일이 없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결국 이곳은 아무리 편해도 임시 구금소니까. 이곳을 아무 문제없이 나간다는 건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거나 모함을 당한 경우이니, 앞으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다는 정겨운 인사일 뿐이다.

내가 뭐 진상을 부렸다던가, 그녀에게 추파를 날렸다던가 해서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겠지? 나 진짜 조용히 잘 지냈으니까.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구금소를 벗어나 겨우 열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갑작스럽게 내 옆에 고급 마차가 달려와 멈추더니 마부석에서 누군가가 내려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대충봐도 고급인 것을 알 수 있는 집사복을 입은 사람은 특이하게도 여성이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차의 문을 열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십니까?"

출소하자마자 뜬금없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하려는 목적을 지닌 거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정작 아무런 이야기도 들은 게 없으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난 일주일 가까이 짱박혀 있는 동안 뭐가 어떻게 바뀌었나 확인할 겸 걸어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똑같은 자세로 마차의 문을 연 채 집사처럼 서 있을 뿐. 심지어 마차 입구에 커튼까지 있는 거보면 엄청 고급 마차인데, 셰릴도 라그니스도 직접 데리러 오면 데리러 왔지 이런 과묵한 사람을 시켜서 데리고 오게 시킬 애들은 아니란 말이지.

상대가 벙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거야 저쪽 사정이고 내가 정체불명의 마차에 올라탈 이유는 없었기에 난 별 이상한 꼴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마차를 피해 움직였다.

"타시죠. 오가토르프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걸음이 멀어지는 것은 확인했는지 이제야 정체불명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내 적대감은 MAX를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물어 봤지 목적지를 물어 봤냐?"

내 질문에 동문서답 하는 인간들은 대부분 머지않은 미래에 나랑 척을 지거나 뒤가 구린 새끼들이다. 대놓고 불쾌감을 내비쳤지만 여성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 일말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과묵한 거 좋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누구고 목적지가 어디인지까지 아는 거 같은데, 이딴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접선을 시도하면 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알리는 좋은 지표가 되어주겠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기쉬의 검을 뽑아 들고 나서야 허리를 숙이고 있던 여성이 움찔거렸지만 정작 말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듣던 대로 매우 과감한 행동력을 지닌 분이로군요."

마차 안에서 난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것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큰 소리로 이야기할 처지는 되지 못합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이어지는 요청과 함께 마차 속 커튼을 비집고 나온 것은 접혀 있는 여성용 부채.

하지만 그 끝에 박힌 문장은 이티스엘 왕가의 문장이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아아, 안 사요 안 사."

그리고 난 그 문장을 확인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걸어 나아갔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정치인은 필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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