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70화 (170/412)

내가 드워프 지구로 걸음을 옮기고 발쿤씨의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던 마차는 점점 인파가 몰리고 나서야 겨우겨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죠.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부채를 판다는 게 아니라 문장을...'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어수룩하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 야할까?

그 와중에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으니 사실 멍청하다는 표현은 너무 평가가 박한 면이 있다.

무게를 잡으려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내가 거들떠도 보지 않자 허둥대며 집사로 보이는 여성에게 마차를 몰게 시키던 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를 지언정 왕족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왕족이라는 특수성을 놓고 보면, 어수룩하다는 평가가 어울릴 것이다.

"출소하자마자 순두부를 받아 먹지는 못할망정 재수 옴 붙을 뻔했네 아주."

반역자들 대가리 깨주고 반파 시킨 거로 만족을 못 했나, 아직 왕도 못 만났는데 뜬금없이 왕족이 달라붙으려고 하다니 소름이 다 끼친다.

내가 인생의 목표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바빠 죽겠는데 자꾸 뭐가 와서 엉겨 붙으려고 해? 단순히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목적이었든, 경고의 목적이었든 간에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오늘은 꽤 손님이 많네."

비가 내린 뒤로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와는 동떨어지는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입구부터 후끈거리는 발쿤 씨의 가게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어쩐 일인지몰라도 손님들로 북적이는 중이다. 평소에 내가 방문 했을 땐 항상 시간대가 어중간해서 이런 광경을 못 봤던 건가?

어차피 발쿤 씨는 장인이니 저 북적임과는 거리가 멀겠거니 하는 마음에 평소처럼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실례합니다 손님! 이곳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품은 진열대에 있으니 구매는 이쪽에서 부탁드립니다!"

생각해 보면 이 가게의 직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건 아닌지 굉장히 깔끔한 유니폼 같은걸 입고 있는 젊은 여성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확실하게 대장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막아섰다.

오늘따라 당황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게 되네. 혹시 내가 지금까지 좀 염치 없이 굴어왔던 건가 싶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일단은 확인이라도 할 겸 내 앞을 가로막은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발쿤 씨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만..."

"발쿤 씨를 통한 무구제작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혹시 예약을 하고 오셨나요?"

"에, 예약이요?"

내 표정이 어떤지 굳이 거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엄청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발쿤 씨가 예약을 받고 일하는 장인이었다고? 나 지금까지 친구 패스로 개진상 부리고 있었던 거야...?

그런 내 심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여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나를 안내했다.

"어색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많은 검사분들이 발쿤 씨를 뵙고자 방문하시지만 이 사실을 몰라서 난감해 하신답니다.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죠! 그 분께서 만드는 장비는 귀족도 줄을 서서 구매하고 싶어 하는 장식용부터 기사와 전사들을 위한 실전용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명품이니까요!"

대체 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얼이 빠진 나를 두고 여직원은 열심히 나를 위로하며 은근슬쩍 다른 물건들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애초에 여기 온 것부터가 쓸데없는 기쉬와 엔벨데의 검을 팔아치우고 부무장으로 쓸만한 단검이나 보려 했던 것이기에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했다.

"우선은 이 검부터 좀 팔고 물건을 보고 싶은데요."

"역시 발쿤 씨를 찾아오신 분답군요! 저희는 매입가도 최고로 쳐드린답니다!"

영업에 그 누구보다도 진심인 직원이로군. 일단 그녀의 안내를 받아 유달리 한적한 카운터로 향하니 동그란 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고 있던 중년남성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나?"

"별생각 없이 왔습니다."

그래도 꼴에 귀족과 기사인 놈들이라서 처음엔 기대했었지만, 당장 발쿤 씨가 팔아준 내 검보다 질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이미 기대감은 증발한지 오래였다.

별난 놈 다보겠다는 시선을 무시하며 기쉬의 검과 엔벨데의 검을 올려 두자, 안경남은 시큰둥한 표정과는 달리 매우 신중한 동작으로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장인의 곁에는 장인들이 모이는 법인 걸까? 다들 하나 같이 자신의 일에 진심이로군. 보기 좋네.

"꽤 오래... 그것도 아주 잘 써 온 검이로군. 심지어 잘 만들어졌어. 그냥 자네가 부무장으로 써도 되지 않겠나?"

"손에 맞질 않아서."

"흐음, 좋은 검을 쓰고 있나 보군."

무심하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시선이 잠깐 내 허리춤에 남아 있는 검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뭔가 고심하는 시늉을 하고는 인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격을 입에 담았다.

"합쳐서 금화 두 개를 주지."

"...예?"

금화 두 개? 은화 두 개를 잘못말한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표정 관리에 실패해서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더니 오히려 안경남은 내 의도를 거꾸로 해석했다.

"결국 중고 아니겠는가? 이 정도도 많이 쳐준걸세. 그나마 인챈트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높게 불러 준 거야."

너무 싸서 놀랐다고 생각한다라. 그래도 기쉬와 엔벨데가 무기에 돈을 아끼지는 않았나 보다.

솔직히 이 구데기 검 두 자루가 발쿤 씨의 검이랑 같은 가격에 되팔린다는 게 믿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일단 왜 가격을 높게 불렀는지 눈치챌 수 있었기에 그 부분은 한 번 파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니, 이거 인챈트는 무조건 되잖습니까."

아무런 주저 없이 튀어나온 내 말에 남자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인챈트. 일반적인 경우 일회성 마법부여를 의미하지만 이런 무구점에서는 아예 마법이 부여된 장비를 의미한다. 에스뮈에에게 받은 저주막이 반지라던가, 내 건틀릿이라던가 그런 거.

그리고 구체적인 원리는 모르지만, 잘 만들어진 무구일수록 인챈트도 하기 쉬워진다고 한다. 그렇게 쉬우면 쉬울 수록 견고하게 인챈트를 새기기는 작업도 수월해지다 보니, 중고품이라 하더라도 영구 인챈트가 가능한 물건은 상태에 따라 좋은 값에 팔리기도한다.

거기까지는 아실리에의 상식 교육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좋은 값이 얼마인지는 몰랐지 뭐야. 발쿤 씨의 검이 금화 한 개였으니 잘해봤자 은화에서 놀 줄 알았다.

"에잉,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봐놓고서는."

안경남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카운터 위에 금화 네 개를 올려 두었다.

"이번엔 진짜일세. 이 이상은 이쪽도 손익이 간당간당해."

미쳤다 미쳤어. 죽어서 착해진 기쉬와 엔벨데의 마지막 선물이로구나! 라그니스가 내 검을 보고 드워프들의 금전 감각에 강한 의구심을 가졌던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어!

나중에 두놈과 관련된 누군가가 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내 손은 그보다도 빠르게 카운터 위의 돈을 움켜쥐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뭐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긴 정보상이 아닌데."

"저도 압니다. 이 검이랑 비슷한 수준의 단검을 몇 개 구해 보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내 검을 뽑아 카운터에 올려놓으니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슬쩍 검을 바라본 안경남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에이 씨. 발쿤 씨 손님이었네."

"와, 그걸 그냥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까?"

"난 인챈터야. 검에 들어간 드워프의 연금술식을 보는 거지. 기다리게. 발쿤 씨를 불러 올 테니."

"아까 직원 말로는 예약을 해야 한다고..."

"그거야 새로 만들어달라는 인간들이나 그렇지. 이미 검증된 고객한테 그런 게 왜 필요하겠나."

아, 진상 고객 차단용이었나보구나.

단번에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대장간으로 들어간 안경남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발쿤 씨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오, 엘드미아였군. 단검을 보고 싶다고?"

한창 일을 하고 있었던 건지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손짓하는 발쿤 씨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가자 정겨운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네온다.

"일단은 그냥 '보고'만 싶네요. 가격이 감당 안 될 거 같거든요."

내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발쿤 씨에게 방금 받은 금화를 보여주자 익숙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얼마에 줬는지 말한 건 아니지?"

이 아저씨 이거 취미 생활에 과소비 하는 타입이었구만!

"그걸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영원히 입 다물고 가겠습니다."

"역시 긴이 데려온 친구로군. 영특해."

내 은인인데 그깟 과소비 정도야 눈감아줄 수 있지! 내 돈 내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그 검이랑 같은 수준의 단검이라... 당장 만들어놓은 건 없지만, 그거 만들 때 쓰고 남은 재료들은 좀 있을걸세. 안 그래도 달리 써먹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객이 만족스럽다면야 충분히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 줄 수 있지."

주문 제작! 이건 귀하군요.

발쿤 씨의 제안에 머릿속 계획안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따로 원하는 형태가 있습니다만..."

어검술은 어떨지 몰라도 핀판넬 정도는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