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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71화 (171/412)

"골 때리는 모양새로군."

대장간 안에 들어가 짜투리 종이에 적당히 그려놓은 걸 이리저리 살펴보던 발쿤 씨가 내뱉은 첫 마디에는 떨떠름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런걸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단검을 찾았다고?"

"주문 제작이라는 사치까지 부릴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이세계도 오더메이드는 비싼 법이고, 원래 이번에 구입하려고 했던 단검은 철저한 소모품이었다. 절삭력을 높일 정도의 마력을 주입할 수는 없겠지만 손 안 대고 날아다니게 하는 정도는 가능한 수준의 물건을 구입해서 써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주문 제작이 가능하다면 굳이 단검일 필요가 없지.

"마치 일각고래의 뿔같구만."

그렇게 나온 디자인은 그냥 큰 바늘이었다. 평범한 바늘이 아니라 드릴처럼 베베 꼬여 있는 형태의 바늘.

내 손바닥 정도 길이에 검지 손가락 정도 되는 굵기로 그려진 그림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발쿤 씨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흐음. 드릴이라. 확실히 화염구 마법도 위력 증가의 기본은 회전력에 있지. 오러를 도구에 주입하려 할 때 일어나는 반발력으로 회전시키려는 겐가? 굉장한 발상이로군. 하지만 사용하기 쉽지는 않을 거야."

보자마자 거기까지 추측하고 용도를 파악할 줄이야. 하지만 난 오러를 쓸 줄 모르니 그런 반발력이 있다는 것도 지금에야 알았다. 이 세계에 왜 검강 같은 게 없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군.

적당히 다른 마도구를 이용해볼 생각이라고 둘러댈 요량이었는데 핑계가 생겨서 참 다행이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반복 학습이 답이죠."

"아주 좋은 마음가짐일세. 인간들은 명줄이 짧아서 그 진리를 쉽게 간과하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발쿤 씨는 그림 위에 추가로 몇 글자 끄적이고는 옆에 놓여 있던 주판을 튕겼다. 처음엔 가격을 책정하는 건가 싶었는데, 계산 결과를 내 대충 그린 그림 위에 적어가며 도안으로 만드는 것을 보아하니 전혀 다른 용도인 듯싶다.

"이 정도면 딱히 수고스러울 것도 없군. 투척에 용이하게 무게감을 조절하면 조금은 형태가 달라질거야. 그래 봤자 이 홈의 어딘가가 조금 볼록해지는 정도라서 티도 안나겠지만."

"몇 개 정도 만들어질 것 같습니까?"

"자네의 요구에 맞추면 다섯 개 정도 나올 거 같군. 좀 가늘게 만들면 열 개까지도 가능하긴 할 거야. 어쩌겠는가?"

"내구도를 염두해서 생각한 굵기인데 괜찮을까요?"

"재료가 재료인지라 좀 가늘어져도 어중간하게 휘두른 검 정도는 무리 없이 막아 낼 수 있다네. 무게감이 있는 쪽이 더 치명적이긴 하겠지만, 자네가 생각한 대로 오러를 이용해 회전력을 심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추진력으로도 응용이 가능할 거야. 그렇게되면 손으로 던지는 화살이랑 다를 바 없으니 굳이 무게에 집착할 이유도 없지."

덤덤하게 이어지는 발쿤의 설명을 듣다 보니 의문점이 생긴다.

내 손가락보다도 가는 굵기로도 휘둘러진 검을 막아 낼 정도라니, 암만 봐도 겨우 금화 한 개에 팔려나갈 재료가 아니지 않나? 대체 왜 이런 게 안 팔리고 짱박혀 있다가 이렇게 헐값에 내 손에 들어 온거지?

"그 정도 물건이면 엄청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런 것치고는 악성재고 취급인 거 같은데..."

이게 정말 적정가라면 대부분의 검사들은 웃돈을 얹어서라도 나와 같은 검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발쿤 씨는 그저 엄청 튼튼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사용해 본 입장에서 봤을 땐 과도한 저평가에 불과하다.

당장 엔벨데 저택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도 불구하고 이 하나 빠지지 않은 검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발쿤 씨의 대답은 싱거우리만치 단순하고 간결했다.

"그 검, 인챈트가 안 먹힌다네."

마치 그걸로 다 설명이 되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발쿤 씨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 납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네 마족들의 무구를 본 적 있나?"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그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 적당히 담뱃잎을 채워 넣으며 설명을 이어갈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폐던전에서 뺏어 썼던 검 정도였으나, 그건 공식적으로는 없던 일이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딱히 무구라고 할 만한 건 본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뭐, 교류도 딱히 없었을뿐더러 전선도 계속 유지는 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놈들이 마나나 오러가 아닌 마력을 쓰는 건 알지? 덕분에 좀 강하다 싶은 놈들은 오러 익스퍼트 정도 되는 이들을 우습게 이길 정도고, 마법사들이 펼치는 마법의 규모도 무시무시해. 하지만 놈들이 나고 자란 땅의 모든 것들은 결국 대지모신의 은총 아래 평등하기 때문에 그치들처럼 강인하지 못 하지. 일반적인 장비에 그 강한 마력을 부여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박살 날 거 같군요."

직접 해봤으니 아는 거였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발쿤 씨는 '눈치가 빠르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말 장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만든 물건 정도는 돼야 버티지 안 그러면 수명이 깎여. 그래서 놈들이 개발한 게 마장금魔裝金이라는 합금이지. 잠깐 기다려보게나."

마법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간 발쿤 씨가 들고나온 건 내 검이랑 비슷한 색의 쇳덩이었으나, 마치 수은처럼 꿀렁거리고 있었다.

"이거라네. 아주 특별하다고 할 만한 건 없어. '마력이 주는 부하를 견딜 수 있다.' 딱 그 정도가 특징이지. 과정은 워낙 전문적인 부분이니 설명하기 힘들지만... 굳이 표현하면 마력을 먹여서 키운 금속이라는 느낌이지."

"항상 느끼지만 설명이 정말 확 와닿는군요."

"그런가? 우리 도제들은 영 애매한 반응이던데 아무튼, 그렇게 마력을 먹여 만들어서 마도공학으로 연금하고 나니 굉장히 튼튼한 물건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 문제는 이놈의 금속이 입맛이 고급이 된 건지는 몰라도 마나에는 영 반응이 없어. 오러 역시 다른 금속들마냥 주입하려 하면 같은 극끼리 부딪친 자석마냥 튕겨 나가고."

"그래서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으로는..."

"...인챈트를 할 수 없는 것이지. 오직 마력을 사용하는 마족이나 용족같은 종족들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버린거야. 그러다 보니 이 마장금을 만드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보니 굳이 이걸로 뭘 하고 싶다면 전장에서 회수한 마족들의 병장기를 녹여 재활용하는 게 고작이고."

튼튼한 것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으니 무기로써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기껏 구해서 만들어 봤지만, 결국 튼튼하기만 한 물건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는 소리다.

이렇게나 형편 좋은 무기가 손에 들어온 거였다니. 역시 신은 실존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 물건조차 드워프 분들의 연금술로 가공이 가능하다는 게 새삼 놀랍군요."

"그건 또 전문가끼리나 논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냥 전혀 다른 영역이라서 가공은 별로 어렵지 않아. 자네가 대장장이의 꿈을 키운다면야 얼마든지 설명해 줄 의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고 평생 쓸 일 없는 잡지식이라네."

바로 며칠 전에 초보용이라는 거짓부렁에 속아 읽은 마법 전문 서적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썩혀야 했던 나는 발쿤 씨의 배려를 존중하기로 했다.

마족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들을 들으며 주문 발주서를 작성한 뒤, 이번에도 금화 한 개라는 대금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자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왕족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시작이 좋은 걸."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검인데 그거랑 같은 재료로 같은 장인이 만들어 주는 물건을 이번에도 금화 한 개로 받을 수 있다니. 해외 직구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알찬 쇼핑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이번엔 지크멜한테 좀 가 볼까나."

고마움의 표시를 하는 건 둘째치고 엔벨데의 목이 날아갔다는 정보를 분명히 주워들었을 녀석의 반응이 궁금한 게 컸다. 출소하자마자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실리에에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기왕 밖으로 나온 김에 처리할 일들은 최대한 처리해야 여가 시간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들뜬 마음과 가벼운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드워프 지구에서 벗어나 주위의 인파들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할 무렵, 아까 전의 마차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포기를 모르시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걸보면 농담이 아니라 내가 나올 때까지 대기를 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마부 겸 집사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점 정도였다.

"부디 제..."

"댁 주인의 명예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좀 올라타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에이, 아닐 거야. 공식 석상에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몰래 부르는데 명예를 따질리가 있나. 그럴 거면 당당하게 이름을 밝혀야지."

말을 끊고 늘어놓은 장황한 설명에 여성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진다. 아니긴 왜 아니겠어.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겠지. 애당초 왕족인 거 뻔한데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신하의 입장에서 참 불쾌하긴 할 거다.

근데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입을 다물어 버리는 여성과 마차를 지나 다시 갈 길을 가려던 찰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커튼이 젖혀지며 딱 봐도 공주처럼 보이는 금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둥순둥하고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눈매와 달리 눈동자만큼은 매우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는 그녀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나에게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좀 이야기하죠!"

씨이이이바아아알.

대체 왜 나서는 거야.

얼굴을 보고도 도망치면 불경죄가 되어 버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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