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행동력과 과감함이 상승하는 기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몰래 움직여놓고서 저런 형태로 얼굴을 내비치는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상상 못했기에, 나는 일단 손을 내저으며 상대방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으니 우선 그 커튼부터 좀 내리시지요. 모습을 보이시면 서로에게 이득될 게 없으니."
"이, 이건 당신이 대놓고 무시를 하니까..."
"전 이제야 막 임시 구금소에서 벗어난 몸입니다. 아직 왕실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공문조차 보내지 않은 상황인데 비밀스러운 만남은 당연히 기피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설령 레스롬 공작과 국왕이 나를 향한 방침을 정말 방임주의로 정했다한들 아직은 여러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힐 가능성이 넘쳐흐른다. 그런 와중에 괜히 비밀리에 왕족을 만났다는 게 밝혀지면 이 모든 게 사실 왕실에서 준비한 자작극이다뭐다 하면서 시나리오 쓰는 미친놈들이 나올 수 있다.
그걸 빌미로 제 2, 제 3의 엔벨데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내가 나 건들지말라고 지랄하고 다니는 미친놈인 것은 맞는데, 나한테 지랄할 명분을 막 억지로 만들고 다니면서 그래도 건드리지 말라는 미친놈까지는 아니라고.
"흠, 흠. 그 부분에 대해 개인적인 감사를 표하고 싶으니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그럼 안으로..."
"아뇨.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집사분은 잠깐 저랑 같이 마차 호위하는 것처럼 시늉이나 해주십시오."
"여, 여기서요?"
"네. 여기서."
마차에 기대면서도 단호하게 끊으며 말하자 짧은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결코 이 대화를 길게 이어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자세를 풀지 않으며 상대방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돌아온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좋습니다. 이번 만남의 목적은 고마움과 성의를 내비치기 위함이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니까요."
"이미 충분히 불편합니다만."
"...저, 정말 과감하시군요. 솔직히 이렇게나 한결같은 반응으로 대응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왜 아버님께서 공적인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려고 하시는지 알 거 같네요."
그건 아직 서로 주고받은 게 불확실한 상황이라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내 사견을 말하며 대화를 질질 끌 필요는 없었기에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이번엔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왕실의 공식적인 보상과 별개로 개인적인 사례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뭐... 내 편이 되어라, 나대지 마라 같은 제안들과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나온 건 다행이다만.
"말씀드리고 나면 그냥 가도 됩니까?"
당장 떠오르는 게 있어서 물었더니 뭔가 알게 모르게 기가 죽은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 그렇게나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정확히는 더 이상 정치와 엮이고 싶지 않은 것에 불과한 것이지,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아무튼 당장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딱히 어렵거나 무리한 요구도 아니니 부담도 없으실 겁니다. 말씀드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앞으로 이런 만남이 없도록 신경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길."
어차피 얼굴도 안 보이니 그냥 대답을 마치자마자 마차에서 몸을 뗐지만, 요구를 받아들인 것인지 기가 차서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아무런 제재없이 걸음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왕실에서 주는 것도 받아먹을지 말지 고민해야 하는 와중에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개인적으로 받아먹겠니?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던데, 아가씨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기사 소설 같은 걸 너무 많이 본 게 아닐런가 몰라.
◈
메시나 반스 다 이티스엘은 얼빠진 표정으로 소년의 발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평생동안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대우를 받아본 적 없었기에 생겨난 인지부조화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소 자신의 감정 기복을 체크하며 바로 행동해 주는 유능한 집사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커튼이 드리워진 상태에서 그녀의 유능한 집사가 주인의 변화를 제대로 눈치채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메시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소년의 발걸음은커녕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된 뒤였다.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을 잘못했거나, 행동을 잘못했거나, 판단을 잘못했거나, 대답을 잘못했거나. 스스로가 느끼기에 그런 실책이라 할 수 있는 게 있었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그렇기에 지금의 메시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너무 억울해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살짝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감히 첨언드리건데, 상대방이 정상이 아닌 게 문제였다고 사료됩니다."
그런 주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집사 헤이리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단언하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이미 엘드미아라는 인물 평가란에 평가를 기입하고 책을 덮은 뒤였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폭력을 신봉하지도 않습니다. 그랬다면 아가씨께서 모습을 비췄을 때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을 테니까요. 법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합법적이기만 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합니다. 그 결과는 보샤 백작이 몸소 증명해 보였죠."
엘드미아는 흔히 말하는 미친놈이다.
그것도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지니고 있는 능력과 상식을 제 편의에 맞게 사용할 줄 알아서 더욱 위험한 부류의 미친놈.
"아가씨의 대응이 잘못되었다고 고민하기보단 상대방이 이례적인 광인이었다는 게 합당한 판단이라고 여겨집니다."
"광인이라니. 좀 무례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멀쩡했잖아?"
쉽게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니었지만 메시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비단 방금 있었던 대화만이 아니라 그가 저질러놓은 일련의 사건들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었다.
미쳐서 저지른 행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톱니바퀴들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라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었지만, 전후 사정을 다 따져보고 저지른 일이라는 건 일목요연했다.
비록 이번에는 왕족과 평민의 신분 차이를 뛰어넘는 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신분을 숨기고 접근하려고 했던 건 그녀였지 엘드미아가 아니었기에 아주 납득이 안 가는 상황도 아니었다.
마음 한 켠에 '나 그래도 왕족인데...?' 라는 강한 회의감이 생겨서 그렇지.
"그와 같은 신분을 지닌 이가 아가씨와 같은 분들을 목도하고도 저런 행동을 취할 경우, 세간에서는 보통 광인으로 취급합니다."
평범한 백성이 사적인 자리에서 몰래 귀족과 왕족을 모욕하는 건, 불경죄이긴 하나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왕이 되면 더 잘할 수 있다, 귀족이 별거냐 운운하며 얼마든지 헐뜯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닌 이상 직접 앞에서 험담을 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런 행동이 죽음과 직결된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냥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이번에 방문한 에스뮈에 황녀님도 그를 염두하고 있었던 걸 보면 충분히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질 법하다고 보는데. 나중에 제국으로의 망명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대련이라고는 하나 용사를 이겼으며, 황녀를 위기에서 구해 냈을 뿐만 아니라 검으로 백작의 작위를 얻어낸 숙련된 기사조차 이긴 15살 소년. 비록 겉으로 봐서는 나이를 속인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성숙한 외모였지만, 그걸 제외하고 짧은 시간 동안 이뤄놓은 것만 놓고봐도 그는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재다.
저 나이에 그만한 업적을 쌓았다면, 조금은 오만해도 예상 범주 내라는 게 솔직한 소감이다 보니 광인이라는 헤이리의 평가에 쉬이 공감하지 못하는 메시나였다.
"차라리 그런 경우라면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런 이들은 보통 사례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다른 제안을 한 게 아니라 호의를 표하려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그가 망명을 시도하려면 굳이 나중을 기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저 당당함은 그런 사안들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보입니다."
"...그것도 그렇지."
에스뮈에 황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건 이번 방문을 통해 증명되었다. 오히려 보샤 백작과의 분쟁에 얽히자마자 망명을 시도하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엘드미아라는 남자는 그러지 않았고, 메시나는 거기서 희망을 가졌다.
"그래도 그런 힘과 기회들을 내버려 둔 채 왕국의 고름을 직접 짜내는 선택을 했으니, 냉랭한 태도와는 별개로 왕국을 향한 애국심같은 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음엔 공식적인 자리를 가져 봐야겠어."
아주 크게 어긋난 가설에서 비롯된 덧없는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