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다행스럽게도 마차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게 정말 호의에서 비롯된 배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우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지크멜의 가게에 들어갈 때 굳이 눈치볼 필요도 없고.
그래도 명색에 정보상이 눈속임으로 차린 가게인데 나 때문에 들키면 미안하잖아?
"어서 오십시오 손님! 안 그래도 지난번에 주문하신 물건이 준비되어 점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답니다!"
그렇게 녀석의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생판 모르는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건네오는 종업원이 나를 맞이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자연스럽게 대면할 핑계를 만들면서 내가 오자마자 자신에게 알리라고 이런 대본까지 준비할 줄이야. 정말 내가 알던 과거의 그 지크멜이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적당히 말을 맞춰가며 안으로 들어가니 평소보다 더 많은 문서 더미 속에서 지크멜이 나를 맞이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엘드미아 님은 정말 비정상적인 행동력을 지니신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네 반응도 궁금해져서 와 봤다."
"전자의 이유는 납득하지만 후자는 정말 너무하시다는 말밖에 떠오르질 않네요."
말하는 것과 달리 딱히 사정이 나쁘진 않은 것인지 녀석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덕분에 제 일도 좀 편해진 게 있으니 감사한 상황이긴 합니다."
"너 뭐 엔벨데랑 안 좋게 엮인 거라도 있었니?"
어깨를 으쓱인 지크멜이 늘어난 문서 더미들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경쟁자 중 누군가가 보샤 백작과 좋게 엮인 게 있었나 봅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한 명이 자취를 감췄죠."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군. 하긴, 노예상도 운영하던 놈이니 정보상 하나 정도는 끼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긴 하...나? 우연찮게 지크멜을 찾아낸 입장이다 보니 잘 모르겠군.
"다 주워 먹다간 탈이 나는 수준이라 거르고 걸렀는데도 이 모양이니 감사할 수밖에 없죠. 그나저나, 이제 정리되신 겁니까?"
"글쎄? 나야 모르지."
"...예?"
"내가 어찌 알겠냐. 나야 앞에 떨어진 불똥을 걷어찬 거에 불과하지. 그게 불이 꺼졌는지 다른 데 옮겨붙었는지는 시간이 알려주지 않을까?"
엔벨데의 죽음으로 알게 모르게 몇 년간 꼬여 있던 매듭이 풀린 건 사실이고, 그로 인해 나도 한시름 놓은 것 역시 사실이지만 이게 완전히 '정리'가 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엔벨데가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었을지도 모르고, 그 누군가가 나처럼 복수하겠답시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도 인생에 걸림돌이었던 거 하나 치운 건 맞는 거 같다."
"...엘드미아 님은 하루만 살다 갈 것처럼 행동하는 거랑 달리 굉장히 삶을 멀리 보고 계시는군요?"
"뭐 임마?"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그냥 웃어넘겼다. 실제로 남들이 보기엔 그래 보일 거 같기도하고.
"아무튼 오늘은 인사차 들린 거다. 이대로 별 일 없으면 어지간해서는 너한테 따로 뭐 의뢰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기도하고."
"예? 오히려 앞으로 더 자주 보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 좀 일을 크게 벌리시긴 했어도 잠잠해지면 왕실에서 작위를 주려고 난리를 칠텐데?"
"뭔 작위?"
"...엘드미아 님, 혹시 보샤 백작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들이 받으신겁니까?"
"모르긴 왜 몰라 잘 알지. 나 건드린 씹새끼."
"...허어. 어떻게 살아돌아오신거지...? 아닌가? 얼마나 강한 건지 의문을 가져야 하나?"
지크멜 녀석이 납득을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시전하길래 꿀밤이나 먹여줄까 하다가, 엔벨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칼밥으로 백작 작위 땄다는 거 말하는 거냐?"
"표현이 참 그렇긴 한데, 맞기는 하죠. 그 칼밥을 사람 상대로 먹은 게 아니라 마족 상대로 먹어서 그렇지."
"지 입으로도 대충 그런 느낌의 말을 하긴 하던데..."
"부하들도 그렇고 전장에서 나름 알아주던 기사였습니다. 전시라서 진급이 빨랐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공을 많이 세우기도 했다더라구요. 말로는 전쟁 중 부상으로 물러났다고 하던데 당연히 거짓말이고. 지금까지 계속 반역을 준비해왔으니 그때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 익스퍼트급 기사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할걸요?"
어쩐지 칼질 잘하더라.
반격에 허초를 섞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긴 했다. 검술은 순전히 그거 때문에 밀렸다고 봐도 될 정도로.
"지금의 용사보다 쎄긴 하더라고."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지크멜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강해지시는 겁니까?"
"억울함...?"
"...분노라던가 뭐 그런 게 아니라요?"
"나도 주워듣기로는 그렇다고 들었지만, 나는 분노보다는 억울함이었다."
'억울하게 만드는 거에만 익숙할 거 같은데...' 라는 실없는 말이나 하길래 이번엔 꿀밤을 먹여줬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인간을 15살 먹은 놈이 죽였으니 귀족들이 어떻게든 키워 먹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쪽 정보에 능한 너와 많이 엮이게 될 거라는 거지?"
"아주 정확하십니다."
"뭐, 그런 건 감안하고 있지만, 그건 최소한 몇 년은 걸릴 거다. 내년이면 방랑 기사 서훈 받고 전선으로 갈 거니까."
'이 난리를 쳤는데 과연 서훈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면, 당연히 받을 수 있다.
아무나 물어뜯는 미친개를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 막을 리가 있나. 진정한 기사도를 깨우쳐서 올바른 길로 걷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아주 완벽한 방안이라며 쌍수들고 환영할 거다. 아마 내가 싫다고 하더라도 보내고 싶어 할걸?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도 나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시간과 핑계를 가짐과 동시에 내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길 테니 딱히 거절은 안 할 것이고. 뭐, 나에게 우호적이라 할 만한 건 라그니스와 에카프 경 정도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 그때까지만 잠잠하면 나중엔 어떨지 몰라도 한동안은 서로 갈 길 가는 거지."
지크멜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어차피 신세를 진 입장에서 떠나기 전에 얼굴 한 번은 더 비출 예정인지라 평소처럼 인사를 건넨 뒤 가게를 나와서 십 여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어? 에가 씨?"
"오?"
길드로 향하던 도중 뭔가 이것저것 잔뜩 사든 렐리에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게 그 가는 날이 장날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그거구나!
트루먼 쇼가 의심될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만남에 신기해 하는 사이 웃으며 다가온 렐리에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의외로 수도도 넓지만은 않나 봐요. 지난번 일은 잘 정리 되셨나요?"
"네. 아주 잘 정리될 거 같습니다. 렐리에 씨도 그 뒤로 무사히 돌아오셨나보군요."
"이야, 정말 말도 아니었다니까요. 그 망할 길드장 놈이랑 도시 관리 몇 명이 진짜로 일을 저질러 놓은 상태였던지라 그거 증언한다고 끌려다니다가 최근에야 겨우 돌아왔어요."
덕분에 주머니 사정은 꽤 넉넉해졌지만 여러모로 귀찮았던 모양인지 렐리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실상 그때 얻은 부수익은 에가 씨 덕분에 얻은 거니까 다 같이 모여 회식이나 하자고 제안 하려고 했는데, 어떠세요? 아실리에 씨도 같이 모시고 싶은데."
"저는 좋은데 누나한테는 한 번 물어봐야 할 거 같네요. 혹시 묵고 계시는 숙소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야기가 정리되는대로 찾아가겠습니다."
"술취한 다람쥐라는 여관 아세요? 지금은 저희 다 그 여관에 신세지는 중인데."
즈언혀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 2년 가까이 수도에서 지내 왔는데도 이 모양이네. 그래도 꽤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렇게 하죠. 짐이 많아 보이시니 제가 좀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하! 뭐예요 그게. 길 안내 해 달라는 말을 참 정중하게도 돌려 하시네."
그래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는지 품에 안고 있던 바구니를 나에게 맡기는 렐리에였다. 그러고도 양손 한가득 바구니가 들려 있으니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산 건가 궁금할 지경이다.
"숙소에서 따로 요리라도 하시는 겁니까? 엄청난 짐인데요."
"아, 시약 제조를 위한 재료들이에요. 숙성 기간이 있다 보니 한 번에 많이 만들어야 제때제때 보충이 되거든요."
"연금술도 할 줄 아십니까?"
"물약 값 아낄 정도는 되죠."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는 렐리에였지만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약초로 응급치료를 하는 것과 시약을 직접 만드는 건 좆문가와 전문가 수준으로 격이 다른 거였으니까. 잘못 만들면 부작용으로 애먼 고생을 하게 된다.
"굉장하군요. 독학이신 건가요?"
"에이, 그런 목숨 아까운 짓은 못 하죠. 러빌에서 배웠어요."
"러빌이면..."
"맞아요. 예카트리나의 고향이죠. 거기서 연이 닿아서 예카트리나랑 동행하게 된 거예요."
이티스엘을 넘고, 제국을 넘어, 갈라진 평원을 지나 북쪽 대산맥에 이르러야지만 도착하는 게 러빌인데... 상당히 오래된 인연인가 보다.
"아. 렐리에? 러빌에 용혈 일족? 이라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기쉬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렐리에가 러빌 태생인지는 몰라도 거기서 연금술을 배웠을 정도라면 그래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니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던 렐리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핏? 러빌의 설화와 관련된 가문이었던가? 그랬죠?"
"설화요?"
"흔히 있는 탄생 설화죠. 용과의 혼혈. 용의 피를 이었다 하여 용혈. 그들의 가문이 퍼졌으니 일족. 그래서 용혈일족. 갑자기 그건 왜요?"
"며칠 전에 예카트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는데, 녀석이 듣자마자 물어보더라구요. 용혈일족이라도 만난 거냐고."
"엥. 그분한테 여쭤보지 그랬어요?"
"안 그래도 궁금해서 되물었는데 칼을 휘둘러서 물어볼 틈이 없었네요."
"...???"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갈고리를 수집하는 렐리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