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다. 심지어 그쪽으로 시선이 갈 일도 없었다.
"나리들. 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왕실에서 곧 공식 발표가 있을 것이다. 지나가도록."
하지만 궁금한 것을 참지 못 하는 누군가가 병사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제서야 입구부터 본관까지 반파된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뒤늦게 흥미를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예상치 못한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남자는 로브를 펄럭이며 뛰듯이 저택으로 향했다.
"지나가겠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태도에 미친놈이라도 만난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려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각을 잡으며 좌우로 물러났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은 이미 다른 것에 꽂혀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내부에서 현장 검증을 이어 나가던 이들조차 처음엔 대체 뭔가 하는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남자의 로브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뒤로 물러서기만 할 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파란 안광을 흩날리며 2층까지 걸어들어가 본디 엔벨데의 집무실이었던 공간에 도착한 그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장 요원 하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족이 습격해 온 것인가?"
"아, 아닙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직 공개 절차가 이뤄지지 않아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마족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마족이 개입했으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을 데려왔겠죠. 라는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기에 현장 요원은 대답을 마침과 동시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자신은 일개 현장 조사 요원에 불과했지만, 상대는 마족 연구의 권위자 중 한 명이자 도서관을 운영하는 마법사였으니까.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은 남자의 눈에 전혀 다른 이채가 돌기 시작하며 집무실에 올 때까지 냉철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던 얼굴에 놀라움이 덧칠해졌다.
"이 사건은 누가 책임지고 있지?"
"귀, 귀족원의 레스롬 공작 각하이십니다."
"고맙다."
남자는 지체하지 않았다. 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난 남자는 그대로 마법을 시전해서 하늘을 날았다.
본디 수도에서 마법사의 비행은 중죄에 해당했지만 남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의 실마리를 잡았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하지만 그런 범법 행위까지 저지르는 갑작스러운 내방자를 창문에서 맞이하게 된 레스롬 공작은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비행 마법까지 써서 날아온 이상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만, 좀 정상적으로 문을 통해 와줄 수 없겠는가? 몇 년 만에 얼굴을 비추는 방법 치고 별로 격식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구만."
"시간 낭비다."
누가 봐도 레스롬 공작보다 20살은 어려 보이는 남자였으나 그의 반말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그걸 들은 레스롬 공작마저도 고개를 내저을 뿐 그의 태도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것도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어쩐 일인가?"
"엔벨데 다 보샤 백작의 저택. 누가 저지른 일이지?"
"...그걸 물어보는 이유가 뭔가?"
남자와 엔벨데 간의 연결점이 있었나? 레스롬 공작이 알기로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끌만한 흔적이 있었던 것일까? 솔직히 그것도 회의적이다.
그의 오랜 동료는 오직 마족과 마력의 연구만을 위해 노화까지 억제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히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괴짜였다. 그런 그의 관심을 끌만한 건, 못해도 마법과 관련된 이들이지 엔벨데와 엘드미아같은 검사들이 아니었다.
"제자."
"음?"
"한 때 내가 제자로 삼으려던 이가 있었던 거. 기억하나?"
"기억은 하지. 벌써 10년은 지난 이야기 아닌가?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잊어 버리는 게 더 힘들다네.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평소 만족스러운 미소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무뚝뚝한 친구가 옅은 미소를 보인 날이었기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약속을 이행하러 갔다가 돌아왔을 때 진심으로 절망했던 것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랬던 오랜 친구가, 몇 년 만에 생기를 되찾은 눈으로 대답했다.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말해다오. 누가 저지른 거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싶은 충동 속에서 레스롬 공작은 단어 선택을 위해 고민에 잠겼다.
"혹시 이름이 엘드미아인가?"
그리고 그 고민이 제대로 이어질 틈도 없이 강한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기약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친구가 또 다른 폭풍을 몰고 온 것만 같았기에.
◈
"에, 에취!"
"어라. 에가 씨, 감기 걸리 셨어요?"
"그냥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말하면서도 혹시나 싶었지만, 딱히 감기의 전조가 느껴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난 뒤로는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보지 않았는데 그게 오늘 깨지면 섭섭하지.
"이제 다 왔으니 도착하면 약이라도 좀 드릴게요. 감기약이라기보단 몸을 데워주고 푹 자게 도와주는 약이지만 의외로 도움이 되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렐리에가 '저기예요.'라며 멀리 가리킨 건물은 의외로 나도 알고 있던 건물이었다.
"저게 다람쥐였습니까?"
"하하, 반응을 보아하니 알고는 계셨나보네."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 있다. 뒤틀린 황천의 벌꿀오소리인가 하면서 지나갔었거든. 저게 다람쥐라니, 간판 제작자는 한평생 다람쥐를 본 적 없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런 독특한 간판 외에는 굉장히 말끔한 외형과 내부를 가지고 있는 여관이길래 종종 지나가면서 훑어본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물건을 많이 살 거면 예카트리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습니까?"
"걔한테 그런 거 부탁하면 저 붙잡고 틈날 때마다 운동시키려고 난리를 친다구요. '렐리에, 친구로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이 정도 물건을 드는 게 힘들다는 건 일상적인 생존 활동에 지장이 있는 거 같아. 내일부터 나랑 운동 좀 하자.' 라고 할걸요."
실제로 몇 번 겪어본 것인지 상당히 생생하게 예카트리나의 말투를 따라 하는 렐리에를 보며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휘가 굉장히 지적인데? 역시 예카트리나는 문명전사인 것인가?
"그러고 보니 에가 씨도 근육이 엄청난 편이잖아요?"
"나름 단련은 했다고 자부하고 있죠. 그래도 옷 때문에 덩치만 커 보일거라 생각했는데 용케 알아차리셨네요."
물론 나름 단련한 정도가 아니라 내 이번 생 노력의 결정체 넘버 원으로 꼽을 정도로 자신 있지만 겸손하게 대응했다.
"아, 에가 씨는 자기 몸이라서 모르는구나? 전투할 때 보면 막 등 근육이 옷을 터트리려고 해요."
"풉. 아니, 진짜요?"
"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예카트리나랑 같이 세워두면 적들이 알아서 오줌을 지리겠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폐던전 때 예카트리나가 진짜 장난이 아니긴 했지. 숲에서 용병단 놈들 상대할 때도 그랬고.
"확실히 예카트리나 정도면 팔짱만 끼고 있어도 위협적이긴 하죠."
"그거 에가 씨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거든요?"
"저도 알고 있어서 자주 써 먹습니다."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여관에 들어서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거리와는 달리 한적하기 그지없는 홀과 그 한 켠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 이제 막 점심을 주문한 것 같은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엘드미아는 어떻게 데려온 거야?"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길 가다가 만났지. 예의 식사 초대에 관해 이야기했었는데 여관이 어딨는지 감을 못 잡으시길래 겸사겸사."
두 눈이 휘둥그레진 예카트리나가 앉아 있는 벽 쪽으로 들고 온 짐을 내려놓으며 렐리에가 대답하는 사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더니 긴 씨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허허, 이 정도면 정말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이런 맛에 모험가 일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긴 씨와 가엔달 씨를 보고 있으니 참으로 정겹기 그지없다.
마족놈들이랑 엮이지 않았으면 이런 파티원들과 함께 모험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을 텐데, 살짝 착잡하기도 하군.
"그보다 여관 위치를 알아보려고 했다는 건 동의했다는 거네?"
"저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만, 누나의 의견은 확인해야 해서요. 당장은 아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겠습니다."
"뭐 그 정도면 동의한 거지! 온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 금방 나올 거야. 주문한지 꽤 됐거든!"
아니, 방금 종업원이 주문 받고 들어가는 걸 내가 다 봤는데 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하지만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권하는 건 예카트리나 뿐만이 아니었던지라 사양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에 앉기로 했다. 호의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데 어떻게 무시하겠어.
그 뒤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렐리에가 했던 질문과 비슷한 질문들에 대답해주며 최근 며칠 사이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다시 한번 용혈일족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하하하! 뭐, 러빌 사람들의 토속신앙 비슷한 거야. 의외로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그 친구는 꽤나 박식한 편이었을지도?"
"마족 전선에서 싸웠던 적이 있다고 하니 한 번 정도는 직접 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더군요."
"오, 그래? 그럼 한 실력 하는 친구겠는걸."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영 시원찮더라구요."
하하하 하고 웃어 보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아까 전에 따로 이야기를 들은 렐리에는 왜 내가 용혈일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는지 이제서야 확실하게 이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