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히 놀랐던 것인지, 에스뮈에가 진정하고 제대로 눈앞에 떠 있는 검을 살펴보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아, 아티팩트를 주워서 여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누가 보면 삼류 마법사라고 오해할 만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황녀님."
누가 흘리고 간 마검을 주웠다는 말만큼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차라리 마검쪽이 더 현실성 있지.
당연히 에스뮈에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했는지 잘 알고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햄찌 펀치를 날려 투닥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마법을 배운 사람답게 단번에 상황을 납득하긴 한 모양이다.
"세상에.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더냐? 몸은? 몸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냐?"
"대충...5살? 정도 였나? 그때부터 연습하고 지금까지 써 왔지만 멀쩡해. 오히려 갈수록 사용하는데 요령도 생기고 조정도 세밀하게 할 수 있게 됐고."
"으음, 그대의 몸에 문제가 생기는 걸 아실리에가 멀뚱히 방치하고 있진 않았겠지. 허나 놀라운 건 놀라운 거로구나."
몇 번 이야기 나눴던 게 고작일 텐데도 에스뮈에는 아실리에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을 견뎌 낸다라...허나, 그렇다면 그대의 힘은 어떻게 성장하는 것이냐? 오러와 마나는 정제 과정에서 순도를 점차 높히고 이를 받이들일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위로 올라간다지만, 그대는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고 마력을 온전히 다룬다고 하기엔..."
"약하지."
"후후. 그래.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실로 그러하지."
당장 엔벨데한테도 칼찌를 당했는데 뭔 말이 더 필요할까.
"굳이 표현하자면... 숙련된 마법사들은 보호 마법을 몇중에 걸쳐서 펼치잖아."
"음. 음."
"난 그냥 엄청 튼튼한 보호 마법 하나만 두른 상태인 거지. 오러 사용자들은 수준에 따라 약한 보호마법 몇 개만 두르거나, 견고하게 두르거나."
"그리고 먼저 보호 마법을 파괴하면 이기게 되지만... 그대의 보호 마법이 엄청 튼튼하다?"
"그렇지. 그 보호 마법보다 더 강한 걸 시전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겹겹이 쌓을 방법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딱 하나인 상황. 근데 효율마저 좋지 않은?"
힘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누수가 생기니, 제대로 일검을 휘두른다 한들 마력을 쓰는 놈이라고 하기엔 상대적으로 평범한 공격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오러와 비교하면 그것도 어마어마한 성과로 보이겠지만, 마족이라는 예시와 비교하면 한참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인류와는 연이 없는 영역이다 보니 쉬이 이해하긴 힘들구나. 그래도 얼추 납득은 되는 기분이다만..."
"나도 그 외에 뭐라 표현은 못 하겠어.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확히는 있긴 했지. 어릴 때 만났던 마법사. 비록 마력을 느끼는 것까지만 배웠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난 진즉 뒈졌을 테니 스승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은 뭐 하고 살고 있으려나? 모험가 같던데 언젠가는 만날 지도 모르겠네.
그런 회상에 잠깐 심취해 있는 사이,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에스뮈에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여의 친위대들이 하나 같이 그대의 실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비밀이 있었구나."
"엥? 그랬어?"
"음.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땐 자신들의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으나,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니 하나 같이 그대의 실력을 오판했다고 보고했느니라.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여의 친위대 전부가 그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꽤나 중요 사안으로 분류해서 검토 중이었지."
굉장한 자신감이지만... 납득은 간다. 그때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마족 놈도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거의 순살瞬殺시켜 버렸다던데, 난 걔랑 싸우면 무조건 죽을 걸. 다구리를 놓네 마네의 문제가 아니라 막는 것도 급급했으니.
"맹점이로구나. 도울 방법이 보이질 않아."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문제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아무튼, 그런 이유가 있어서 에스뮈에의 제안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래서 오가토르프 가문에 있으면서 정식 기사 과정도 밟지 않은 것이냐?"
"뭐,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지만. 그건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게 싫어서 그랬지."
정식 기사가 되려면 배울 게 많다.
배울 게 많은 건 좋은데 과도한 궁중 예법과 악기 연주는 선 넘지. 종사로서 주군을 대하는 바람직한 60가지 자세따위를 싯팔 내가 어디에 써먹어.
심지어 심화 과정인 기사로서 주군을 대하는 방법, 레이디를 대하는 방법, 적에게 예를 갖추는 방법 등을 보면 대환장 파티가 따로없다. 대학교 수강 신청하듯 내가 선택해서 검술과 전략 전술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타인에게 끌려나기는 시간의 비중 엄청 많이 늘어나는 건 덤에 불과하다.
그렇게 다 배워서 기사가 되고 나면? 오가토르프 가문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았으니 갚을 것도 많아지고 국가는 국가대로 이용한다.
기사 육성은 공짜도 아니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당연한 결과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니 피한 거에 불과하다.
"어차피 내 실력에 에카프 경에게 직접 검술을 하사 받는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하사는 받았으니 책임과 의무만 생기잖아. 전속 집사라는 형태로 있다 하더라도 다른 종사들의 전투 훈련은 똑같이 받는데 굳이? 차라리 시간을 쪼개서 모험가 일을 하나라도 더 해보는 게 유익하지."
"...그대는 정말 권력에 욕심이 없구나."
"관심이 없긴. 복수가 먼저일 뿐이지."
"그런 것치고는 상식적인 부분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느냐."
"복수한 뒤의 삶을 포기할 생각도 없으니까. 세상이라는 게 무식하게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당연한 거 아니겠어?"
복수도 마치고, 목적도 달성한 뒤 이번만큼은 천수를 누리다가 갈 거다. 반드시.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겨운 이웃들이 많은 게 좋잖아?
"그대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로다. 행동만 놓고 보면 실로 패도覇道적인 발상을 소유하고 있을 거 같은데 정작 말하는 것은 왕도王道적이로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트리스프 리히카에트라는 학자가 주장한 내용이니라. 간단하게 말하면 권위를 존경심으로 얻으면 왕도. 공포로 얻으면 패도인 것이지."
에엥? 그거 완전 맹자...
"뭐, 그런 점이 매력적이니 아무래도 좋다만."
또 사람 부끄러워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군. 이런 건 보통 남자 역할 아니야? 미치겠네 진짜.
뭔가 반응하기 민망해져서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검을 은근슬쩍 다시 검집에 넣고나니,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황녀 저하.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만, 잠시 엘드미아를 데려갈 수 있을지 여쭙고자 합니다.-
"꽤나 다급한 것 같다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여유로운 목소리와는 달리 영 내키지 않은 것처럼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스뮈에였다.
-이번 엔벨데 전前 백작과 관련된 일로 궁정 마법사께서 찾아오셨기에...-
"...그렇다면 응당 협조해야지. 알겠느니라."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궁정 마법사아?
첨단 마법 수사라도 하는 건가? 예상치 못한 방문에 벙찐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익숙한 얼굴의 메이드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에 몇 안 되는 동갑내기 메이드인 제니는 아마 에스뮈에가 거절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나 보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가슴 졸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알면 좀!"
찰싹! 하고 팔뚝을 맞았지만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적당히 사과를 한 뒤 이번에는 본관 홀로 안내를 받았다.
"마법사님 성함 들은 거 있어?"
"아으, 뭐라고 하셨더라. 분명 들었는데..."
"침착해.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뭘 그리 조바심을 내니?"
"넌 진짜 어딘가 이상한 게 분명해. 어떻게 황녀 저하를 뵙고도 그렇게 침착해?"
거기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단다... 입싼 사춘기 소녀에게 말해 줄 수 없는 무거운 비밀이.
"나 백작 목도 딴 사람이야."
"...하긴, 애초부터 정상적인 강단이 아니네."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제니는 그래도 긴장이 조금은 풀렸는지 바로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아! 맞아. 레그네바! 위드라 레그네바 라고 하셨어!"
"...이름 굉장히 특이하지 않아...?"
"...그런가? 잘 모르겠어."
레스롬 공작의 성인 라위네라 만큼 발음이 특이하다고 생각되는데 나만 그런가?
"혹시 그분도 엄청난 근육질의 소유자라거나 그랬어?"
"어...아니? 그냥 평범하시던데."
고위 마법사라고 전부 전사 뺨치는 근육질인 건 아닌가보군. 그러고 보니 제국의 잘생겨서 재수 없던 미남도 아실리에 말대로라면 실력 있는 마법사지만 호리호리했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홀에 도착하니 어김없이 고위직의 인사와의 갑작스러운 대면으로 눈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셰릴과 후드를 푹 눌러 쓴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었다.
겨우 로브와 후드인데도 디자인에 따라 저렇게나 고급져 보일 수 있구나 라는 감탄을 하며 다가가니, 구원자라도 본 것처럼 정신을 차린 셰릴이 나에게 상대방을 소개시켜줬다.
"엘드미아. 이분은 궁정 마법사 중 한 분이신 위드라 레그네바 님이시다. 이번 엔벨데 전 백작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으셔서 라위네라 공작님께 허가를 받고 찾아오셨다고 한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그네바 궁정 마법사님.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엘드미아 에가?"
"네. 그렇습니다."
"오그웬 서쪽에 있던 마을의 생존자. 맞나?"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를 거기까지 안다고?
"맞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죠?"
왕실에서 조사를 한건가 싶으면서도, 그걸 굳이 지금 언급할 이유가 있나 싶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긴 숨을 토해낸 마법사가 천천히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4년이... 10년이 되었구나."
순간 정수리부터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이 진짜 충격을 받으면 현기증이 일긴 하는구나.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마법사 아저씨...?"
"그래."
어딘가 우울한 것처럼 쳐진 눈매. 그와 반대로 어딘가 화난 것처럼 살짝 솟아 있는 눈썹. 그리고 맑디맑은 하늘빛 눈동자.
후드를 걷어내고 드러난 것은 내 기억 속에서 그대로 꺼내온 것처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마법사의 얼굴이었다.
"이제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