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이었다.
고대에 지어진 마신의 제단이 던전이 되어 솟아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왕명을 받들어 은급 모험가들을 고용해 이티스엘의 최서단에 위치한 백색 산맥을 향했던 날의 기억.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기에 최대한 신분을 숨긴 채 조용히 움직이며 조사를 끝마칠 수 있었던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런저런 차질이 겹쳐 결국 당시엔 이름도 없던 마을에 불과한 오그웬에서 좀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식량을 보급하게 되었다.
영주의 관리가 닿지 않는 마을치고 굉장히 정비가 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사냥꾼들이 있어 식량을 보급하는 과정도 굉장히 수월했지만, 그 속에서 위드라의 관심을 끈 것은 작은 꼬마였다.
"아저씨 마법사예요?"
이티스엘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에 짙은 남색 눈동자가 유독 빛나는 당돌한 꼬마는 또래들 사이에서는 보기 힘든 침착함과 확실한 발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복장이 전형적인 마법사 같아서요."
전형적이라니. 상당히 풍부한 어휘력을 가진 아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마법사라고 생각했음에도 기대감이나 흥미로 다가오기보단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하는 아이의 반응이 더 마음에 걸렸다.
"마법사는 맞단다."
"그럼 혹시 마법을 배우고 싶으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마법을 보여달라 혹은 마법을 쓰고 싶다도 아닌,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슨 과정을 준비하면 되냐는 아이답지 않은 발상은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꼬마가 학문적 호기심을 기반으로 마법을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위드라는 고용한 모험가들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잠깐 꼬마의 등에 손을 얹어 마력을 느끼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마력이 아이의 몸속에 자연스럽게 퍼져있는 것에 경악했다.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연구에 사용하고 있던 마력 가시화 마법을 조용히 펼친 위드라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들은 어디 계시니?"
"고기 떼어 드리고 계신 분들이 제 부모님이세요. 예전에 모험가 일 좀 하다가 사냥꾼으로 자리 잡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첫 대면에서도 그랬지만 두 사냥꾼들에게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 마을이 마족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위드라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마족과의 마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대로 마왕이 나타나고 용사와 대척점을 그으며 살아가는 종족인 만큼 조심할 수밖에 없다. 마족들의 신이기에 마신이라 불리는 고대신의 제단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유였는데 그 산맥 아래에 위치한 촌락에서 마력을 지닌 아이를 만났으니, 경계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부모가 인간이라면, 이 아이 역시 인간이라는 뜻.
'인류 최초일지도 모른다.'
날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용족과 마족 뿐이다. 마력을 품고 태어나는 건 신들의 뜻 아래 그들에게만 윤허된 일이었기에.
태고부터 살아온 위대한 용 중 하나인 노이가르드뮈가 마력을 정제해 마나를 생성하는 기술을 모든 종족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베풀기 전까지, 마법은 오직 마력의 사용을 허락받고 태어나는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마나를 운용하는 방법을 듣거나 배워 본 적도 없니?"
"네. 저희 마을에는 손님도 별로 안 오거든요. 모험가분들은 말할 것도 없죠."
놀라움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일지도 모르는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마력을 품은 소년이, 심지어 마력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친 마법사와 우연히 만날 가능성은 또 어떻고?
'분명 신들께서 인도하셨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등에 얹은 손으로 극소량의 마력을 운용해 소년의 체내에서 운용하기 시작한 위드라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흘려보낸 극소량의 마력은 위드라가 평생에 걸쳐 연구해 온 결정체였다.
인간의 몸으로 아무런 부담 없이 운용할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마력. 화염구 한 번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마력이지만, 오직 인간이 마력을 운용할 가능성만을 바라보며 연구해 온 결과물. 일반인이라면 느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오? 뭔가 움직여요."
하지만 그저 넣기만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신기해하며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는 소년의 반응에, 위드라는 환호성과 함께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게... 마력이란다."
"오오오."
오직 마도에 모든 것을 헌신한 자신의 삶을 인정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속에서, 위드라는 진심으로 감격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간만에 느껴보는 감정의 격류 탓에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도 잊은 채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법은 이론이 없으면 구현할 수 없지만 마력을 느끼는 건 감각에 의존한다. 지금 네 흉부로 보낸 마력에 신경을 집중해 보겠니?"
"집중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도와주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걸 네 손바닥으로 옮기려고 해 보거라."
나이를 배려하지 않은 단어까지 섞어가며 대화 중임에도 아무런 질문없이 받아들이는 소년을 이상하게 여길 여유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력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몸과도 같은 것. 그렇기에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없는 부위를 강제로 붙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위드라 본인과 달리,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소년은 분명 마력을 운용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그는 모든 신경을 마력에 집중했다.
"오."
그리고 소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력을 움직였다. 그가 처음에 넣어 준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력을.
"오오. 한번 하고 나니까 마음대로는 아니지만 움직이기는 하네요?"
"...그게, 마법을 배우기 위한 기초란다."
마족이 있기 전에는 오직 용들에게만 허가되었던, 진정한 마법의 기초.
"마법사가 되고 싶니?"
"마법사를 목표로 삼은 적은 딱히 없었어요. 마법이 있으니까 꼭 한번은 배워 보고 싶다에 가까웠죠."
새로운 감각에 놀랍고 즐거워 푹 빠질 법도 했는데, '이런 거구만.'이라는 반응과 함께 금방 대화에 집중하는 아이를 보고 위드라는 결심했다.
"네가 원한다면, 당장은 아니지만 내가 스승이 되어 줄 수 있단다."
"정말요?"
"그럼. 진정한 마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용언龍言으로 시작된 마법이었기에 결코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렇기에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 실제 거짓을 입에 담는다고 마법이 약해지진 않을지언정 언젠가 그 댓가는 반드시 마법사를 좀 먹는다고 여기기에.
그랬기에 위대한 용들은 결코 입에 거짓을 담지 않고, 그들에게 배움을 얻은 마법사들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과거의 신념이기에 지키지 않은 이들도 많지만 위드라는 그 고리타분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아저씨는 지금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그 일을 완전히 끝내려면... 못해도 4년은 걸리겠구나."
"그럼 제가 9살 때겠네요."
벌써 수의 개념까지 확실하게 익히고 있다니. 확실히 영특한 아이였다.
"매우 긴 시간이지. 네가 그때까지 방금 알려 준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을 잘 터득하고, 진심으로 마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어엿한 마법사로 만들어 주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의 부모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 귀환길을 함께하고 싶었다. 제국 신성회의 예언과 마신의 제단이 엮인 모든 일들을 제쳐두고서라도 아이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인류의 마도학 발전에 있어 이 아이가 큰 역할을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 때문에 아이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잘못된 길이었다.
5살은 아직 어린 나이다. 끈기도, 흥미도 오래가지 못 하는 나이. 그런 나이의 아이가 4년간 꾸준하게 훈련을 해서 마력을 온전히 터득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 부모를 설득해도 늦지 않으리라.
만약 아이가 뒤늦게 마법에 흥미가 떨어지고 배우는 걸 거절하더라도... 여러 가지 조건을 통해 아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연구를 도와줄 수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그렇게 돕다보면 다시금 마법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그랬기에 위드라는 웃는 얼굴로 소년과 약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3년 후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몰살沒殺.
제국으로 파견된 와중에 들려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생존자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만든 무덤을 제외하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절망적인 보고에 위드라는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처음으로 오열했다.
신들의 인도에 따라 찾은 기연이라 생각했던 만남이 마신을 섬기는 마족들의 손에 짓밟혔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선으로 향하고, 수년 간 싸운 끝에 마족 연구의 필요성을 느껴 수도로 돌아와 도서관에 틀어박힌 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삶을 부정당한 분노를 원동력 삼아 움직이던 위드라는, 신들의 보살핌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알 지 못한 채 긴 회상을 마무리 지으며 잠깐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이제는 어릴 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 큰 소년이었다.
정말 15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커져 버린 소년은 검은 머리와 남색 눈동자 뿐만 아니라 확실하게 마력을 품고 있었다. 마치 오러처럼 온 몸에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가르침 없이도 꾸준하게 마력을 단련해 왔다는 확고한 증거였다.
"네게 제대로 마법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용과 마족을 제외하면 대륙에서 나 혼자일 것 같구나."
그 사실만으로 위드라는 다시금 지난 삶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