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참으로 놀라운 일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며칠 전까지 왜 비천어검류 없냐고 찡찡거리던 과거의 나에게 좀 더 참을성을 기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군.
분위기상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셰릴이 에스뮈에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려고 하자, 위드라 씨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미 6년이나 늦어졌는데 새삼스럽게 하루 이틀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지. 선객이 우선이지 않겠나."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위드라 씨는 정말 10년 전과 비교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역시 마법사 정도 되면 노화를 늦추는 방법도 있는 것일까. 어쩌면 라드넬반데스도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거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행하려는 모습은 굉장히 감격스러웠지만, 아무래도 방금 그가 했던 말이 걸렸다.
굳이 용족과 마족을 언급했다는 건... 역시 내가 마력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많이... 노력했구나.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딱 봐도 마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푸른빛이 안광처럼 빛나는 모습이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는 듯했다.
"음. 소가주. 갑작스러운 방문인 주제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미안하네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제니? 레그네바 궁정 마법사님을 안내해드리도록."
뒤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제니의 안색이 파리해지는 것 같았지만, 일단 외면하고 에스뮈에부터 챙기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방금 전의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해 전해주니 헛웃음과 함께 상당히 심플한 반응이 돌아왔다.
"여는 괜찮으니 그자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거라."
"응?"
"뭘 그리 놀라느냐. 여는 우선순위를 결코 착각하지 않느니라. 그저 가기 전에 오가토르프의 소가주를 다시 불러 주면 좋겠구나. 이래저래 아직 할 이야기도 남아 있고 양해도 구해야 하니."
혹시나 싶어 입가에 머문 미소에 불만 같은 게 담기진 않았나 살펴보았지만 되려 자기를 소인배로 여기냐며 햄찌 펀치를 맞아버렸다.
"위드라 레그네바는 제국과도 많은 교류를 해온 고명한 마법사이니라. 전쟁 이전엔 마도魔道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고, 이후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마족을 이해하고 탐구하는데 헌신했지. 그런 마법사가 그대의 상황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사제의 연까지 맺을 각오를 했는데 어찌 뒤로 미룰 수 있겠느냐."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방문한 것일 텐데도 이런 세련된 배려라니. 이것이 황녀의 품격이로군. 이번만큼은 나도 궁금한 게 넘쳐흘렀기 때문에 주저 없이 에스뮈에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무려 지식 없이 순전히 감에 의존하며 버텨 오던 분야에 학술적 지식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이를 만난 상황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들을 생각하면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달한 끝에 다시금 제니의 안내를 받아 손님용 방에 들어서자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위드라 씨는 제니가 방문을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네가 마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황녀도 알고 있구나?"
"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독심술이라도 익힌건가?
"어떻게..."
"어떻게라니, 무려 제국의 황녀와 면담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이쪽 일을 급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을 리가 있나."
생각도 못 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어? 정말? 나는 몰라도 에스뮈에도 이걸 예상 못 했다고? 이거 뭔가 다분히 사심 가득한 의도가 느껴지는데?
"걱정 말거라. 황녀와 네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디 가서 말할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며 맞은 편으로 손을 뻗는 위드라 씨를 살피면서 멋쩍게 자리에 앉았다.
한없이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위드라 씨도 당장에 할 말을 고르기 위해 나름 고뇌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특수한 상황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구나."
"열심히 숨기고 살아왔죠."
"현명한 판단이야. 지금은 마족과 전쟁 중이니까. 입지가 확실한 이들의 지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면서도 위드라 씨는 여전히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네 의사부터 확실히 물어보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구나. 마법을 배우겠느냐?"
"배우고자 하는 의사는 가득한데 말이죠... 일단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게 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위드라 씨에게 설명한 것들은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것들이었다.
복수를 준비 중이라는 것. 정치와 의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오가토르프 가문의 가르침도 편법으로 받았다는 것. 마법을 배우고는 싶지만 그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여러모로 고민을 해봐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등등.
굉장히 내 편의만 보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드라 씨는 너무나도 간단히 동의했다.
"이해한다.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매듭이 생기기 마련이지. 나 역시 네게 일방적으로 마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도움도 받아야 하는 몸이니 충분히 감안 할 수 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있나요?"
"네 존재 자체가 도움이지. 내가 아는 선에서 넌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세워왔던 많은 가설들이 너를 통해 검증될 수 있는데 어찌 도움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위드라 씨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네가 해온 노력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솔직히 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의 강함은 궤를 벗어난 상태다. 혹시 마족을 조우한 적이 있니?"
"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다행이구나. 내 눈을 보면 얼추 짐작하겠지만, 난 지금 네 몸에 흐르는 마력을 살펴볼 수 있는 상태란다. 지금의 넌 마족들과 비교했을 때 딱히 뒤처지지 않지만... 너보다 확연히 강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물론 대부분은 일정 계급 이상일 테니 쉬이 마주칠 일은 없겠으나 위험한 건 사실이지."
결국,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륙에만 박혀 있으면 알 길이 없기에 직접 발로 뛰어 정보를 얻으려고 했던 거니까. 오히려 경험자의 조언은 고마울 따름이다.
"침착하게 들어 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너무 걱정은 말거라. 마력은 오러와 마나와는 다르니까. 지금의 네 상태는 마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법을 몰라 중구난방으로 사용하다 보니 생긴 정체라고 보고 있단다. 확실한 건 두고 봐야 알겠으나, 운용법만 제대로 깨닫는다면 성과는 순식간에 나올 수 있어."
내가 느끼고 있던 벽을 마치 옆에서 지켜봐 왔던 것처럼 확실하게 짚어내는 위드라 씨의 모습에 난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도, 너도. 어긋난 10년을 결코 허비하며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단다. 조바심이 날 수 있지만 믿어다오.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야."
결심했다. 오늘부터는 말로만 신께 감사하는 게 아니라 일단 기도부터 박고 본다.
그런 다짐 속에서 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위드라 씨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당장 나눌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에, 짧은 대화를 마친 위드라 씨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마쳤다.
"연락은 내가 먼저 하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동안 많이 피폐하게 지냈거든. 너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환경을 꾸리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걸린단다. 그래도 일주일은 넘기지 않으마."
"배려 감사합니다. 위드라 님."
"음. 다음에는 스승으로서 오도록 하마."
다시 후드를 눌러 쓴 위드라 씨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저택을 떠났다.
그리고 소가주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그를 배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지막 대화를 듣게 된 셰릴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르침? 스승? 정말로?"
"어휘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셨습니다 소가주님."
정강이로 날아오는 발차기를 번개 같이 피하자 셰릴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레그네바 궁정 마법사를 알고 있었어?"
"어... 나도 저분이 궁정 마법사인 건 몰랐는데, 아직 우리 마을이 멀쩡했을 때 만났었지."
이야기를 꺼낸 탓에 정말 오랜만에 멀쩡했던 마을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정겨운 이웃들. 유쾌했던 꼬마들. 화목했던 부모님.
평소에 일부러 외면하던 추억들이었는데 색 바랜 것 없이 또렷하게 떠오를 줄은 몰랐다.
"후우. 이제야 겨우 라그니스의 일도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궁정 마법사가 들이닥치질 않나, 제국의 황녀가 묵고 간다고 하질 않나. 빨리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좋겠군."
"...황녀 저하께서 묵고 가신다고?"
"그래. 이번에 네 무죄에 꽤나 크게 조력하셨으니까. 최대한 빨리 정보를 공유해서 빈틈 없도록 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하시더군. 저렇게까지 널 신경 써서 시간을 내주시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셰릴...! 맨날 심심하면 폭력을 휘두르려고 들지만 역시 그간의 정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근데 미안해!
에스뮈에가 말한 그거 분명 죄다 핑계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