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라는 건 가까이 두면 좋을지 몰라도 남용하면 위험한 법이다. 언제 어디서 권력 없는 이들의 비수가 날아와 박힐지 알 수 없으니까.
에스뮈에는 차기 황제의 자리에 있는 이답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호적인 일을 행하더라도 항상 배려와 호의를 깔아 둬야 뒤탈이 없는 법 아니겠느냐. 그 아이에게 한 말이 거짓말인 것도 아니니 여는 켕길 것이 없느니라."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 옆에 앉아 있는 에스뮈에를 바라보았지만, 틀린 말도 아닌지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말한 '말을 맞추기 위한 정보 공유'라는 게 3분도 안 걸려서 끝났다는 게 문제지.
"독점욕이 강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또 상황과 이어지다보니 그렇지만도 않구나. 최대한 머리를 써서 합당한 사유를 만들고 시간을 내 정당하게 둘만의 시간을 만드는 과정에 묘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느니라. 무엇보다 성공하면 실제로 그대와 같이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구나."
해맑게 웃는다는 표현에 걸맞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다 쑥스럽다.
"이런 건 셋이서 했다는 협의에 위반되는 거 아냐?"
"그러면 아실리에에게 너무 유리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아무 문제 없느니라."
나름 철저하게 따져 보고 그들만의 계약을 맺은 것인지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그대가 구금소에 있었던 시간까지 합쳐도 한 주가 겨우 넘는 시간이지만, 분명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테니."
"...그러긴 했지."
결국 제국에서 그녀와 헤어진 뒤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가며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상당히 추려가며서 이야기는 했지만, 결국 설명이 아니라 대화의 형태였기에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다 된 뒤였다.
그리고 라그니스를 도와주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아실리에가 돌아왔다.
"어째 저택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에스뮈에가 있었네?"
"오가토르프의 소가주에게 부탁해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느니라."
"흐응.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엘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줬다고 이야기 들었어. 고마워."
"...후후. 미래의 낭군을 위해 나선 것에 불과한데 어찌 감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후후후. 역시 예리하네."
좀 있으면 저녁 먹어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소화불량에 걸릴 거 같아서 난 재빨리 화제 전환에 들어갔다.
"누나도 빨리 와서 앉아봐. 오늘 정말 예상못한 일이 있었어."
어릴 적 만난 지나가던 마법사 사실 한 국가의 궁정 마법사이자 알아주는 마력 연구자였으며, 10년 만에 우연히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실리에조차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잠깐의 텀을 두고 아실리에의 표정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엘디? 엘프들에게는 '유년기의 끝'이라는 말이 있어."
듣자마자 아서 C. 클라크의 소설이 떠올랐지만 당연히 그것과는 연관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엘프는 아이들을 적게 낳다 보니 굉장히 귀하게 기르거든. 특히 정령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고 마나조차 감지하지 못 하는 시기에는 병적으로 보호하는 편이야. 그렇게 지내다가 두 능력 모두 얻게 되면 그걸 축하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는 덜 보호받게 되는 아이의 미래가 항상 안전하길 기리는 의식같은걸 치뤄."
"그게 유년기의 끝?"
"아니, 정확히는 그 시기가 오기 직전을 의미해. 예상치 못한 가르침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개화가 되는 시기가 있거든."
모든 엘프가 겪는 건 아니지만 어느 부족이든 통용될 정도로 드물지 않은 현상이라고 아실리에는 말을 덧붙였다.
"근데 그런 일을 겪은 엘프들은 삶이 기구해."
거의 전설 속에서 나올 법한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거나, 밑도 끝도 없는 불운을 맞이하거나 하는 둥 엘프의 삶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일부는 그걸 신의 마지막 보살핌이라고 부르기도 해. 직접적으로 신의 축복 아래 보호받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 그들의 운명을 미리 보고 안타깝게 여긴 신께서... 자비를 베푸는 과정이라고 여기는 거지."
"나도 비슷한 상황으로 보인다는 거네."
"...응."
왜 굳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조차도 앞으로 맨날 신께 기도드리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기연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이었으니까. 지금 아실리에가 보기엔 분명 앞서 설명했던 예시의 인물들처럼 내 앞에 갑작스러운 가시밭길이 펼쳐지게 될까 봐 걱정이 든 것이리라.
"그게 뭐 별건가. 어차피 내 삶은 8살 때부터 기구했는데."
사실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게 맞겠지. 그 뒤로도 많은 사건 사고들이 따라다녔지만, 기구한 운명이라는 건 지금의 내 삶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조차도 이미 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걸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
오히려 아실리에가 말한 대로 정말 신이 마지막 축복을 준비해주는 거라면 쌍수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게 없었으면 난 멀뚱히 앉아서 어떻게 하면 지금 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앉아 있었어야 했으니까.
불행의 징조냐, 불행에 대비할 수 있는 선물이냐 를 놓고 본다면 무조건 후자인 상황이다.
"난 객기 부리다가 죽을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들 또한 그대를 쉬이 죽게 두지 않을 것이고 말이지. 괜한 걱정이니라."
순간의 감정 변화가 워낙 갑작스러웠던 것인지 에스뮈에도 나를 도와 아실리에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실리에는 우리의 위로에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응. 예전에 안 좋은 일을 당한 지인들이 있어서 내가 너무 안 좋게만 생각했을 수도. 그럼 엘디의 일상에 이젠 마법 수업까지 들어가는 거네?"
"구체적으로 얼마나 시간을 할애할지 알 수는 없어도...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 그래도 셰릴이나 에카프 경에게 이야기하려고."
원래 셰릴에게 말하고 차후 계획이 구체화되면 에카프 경에게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집에 제국의 황녀가 머물고 가게 되면 왕성에서 억지로 돌려보내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음, 좀 더 생각해보니 마땅한 통신기기 같은 게 없으니 연락이 안 닿을지도? 수정구도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저택에서의 일은 관두고 여관을 잡은 다음 훈련만 참관할지도 모르겠네."
"네가 오가토르프 저택을 나선다고 하면 라그니스가 바로 데리러 오지 않을까?"
"일리가... 있어...!"
애초에 처음 수도에 상경했을 때조차 오가토르프에 신세를 진다는 말에 잔뜩 삐졌던 라그니스다. 내가 나간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려고 할 거 같다.
"그래도 슬슬 고급진 생활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말이지..."
인간이 아무리 적응하는 생물이라 할지언정 너무 급격하게 바뀌면 뭐든 적응하기 힘든 법.
방랑 기사 서훈을 못해도 내년 초중반이면 받을 텐데, 그 후에 전선까지 여행할 것을 감안하면 지금부터라도 일반적인 생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거 같긴 하다.
저택에서 집사로 일하며 대략적인 물가와 시세 그리고 지식과 상식등은 자발적인 노력 끝에 익힐만큼 익혔으니 이젠 그 시간을 비워서 모험가 일과 마법에 할애하는 게 맞는 거 같고.
"저택에서 나가면 생활하는데 있어 돈이 꽤 들지 않겠느냐."
"나 돈 많아."
제국의 황녀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난 돈 많은 게 맞다.
수도 물가가 만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그간 내가 벌어놓은 돈에 아직 미처 다 받지 못한 폐던전의 보상 그리고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줄 보상까지 합치면 여행자금까지도 빵빵하니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사안이다.
"안 그래도 왕실하고 거리를 두고 싶었는데 정말 그편이 나을지도."
별 생각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해 본 계획치고는 참 마음에 든다.
그 뒤로 마치 간만에 단체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들처럼 이걸할까 저걸할까 고민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더니 사용인이 와서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아니나다를까 사용인을 따라 도착한 식당에 에카프 경은 없었다. 불편하게 가주 자리에 앉아 있는 셰릴을 보아하니 쟤도 이 상황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아 보였다.
바짝 긴장한 식당의 분위기 속에서 어중간한 거리감을 연기해야하나 고민하던 나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그놈의 예법 덕분에 에스뮈에는 소가주로서 그녀를 환대해 준 셰릴하고만 대화하기 바빴다.
덕분에 나는 모든 불편함을 셰릴에게 전가한 뒤 황녀맞이 특별 만찬을 마음껏 음미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종종 셰릴이 눈치를 보며 제발 대화에 참여해 달라는 구원 신호를 보내는 거 같았지만 일단 외면했다.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쩔쩔매는 셰릴을 구경하겠어? 너무 재밌어서 식사 도중에 팝콘을 주워 먹고 싶을 정도구만.
"하여간 이상한 부분에서 심술을 부린다니까."
그런 내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 챈 아실리에만이 혀를 차며 못말리겠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건 원래 나만 아니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