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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80화 (180/412)

바짝 긴장한 셰릴과 저택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호화롭던 식사를 마친 나와 아실리에는, 에스뮈에의 제안에 따라 먼저 방으로 올라왔다. 남의 집에 와서 그 집 식객하고만 대화하면 집주인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보니 오가토르프의 체면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셰릴의 표정을 놓고 보면 차라리 개무시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어림도 없었다.

구금 때문에 간만에 보는 것이기도 하고, 에스뮈에가 기회를 노려 찰떡같이 붙어 있었을 거라는 것까지 완벽하게 예측한 아실리에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작은 해프닝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시간이 흘러 갔다.

그사이 아실리에에게 렐리에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제안한 식사 초대에 대해 이야기해서 동의를 얻고, 용무를 마치고 올라온 에스뮈에에게 다시 노빠꾸 상남자식 애정 표현을 받은 뒤에야 하루를 얼추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간만에 돌아온 걸 감안하더라도 참 정신없네."

원래 종사들과 함께 쓰던 내 짐은 마지막 손님 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나름 2년간 먹고 자고 한 사이인 만큼 그들과의 유대감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군대조차 그 정도 붙어지내다 보면 군 생활을 개판으로 하지 않은 이상 전우애 비스무리한 게 생기기 마련인데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는 애들끼리 모아 놓은 곳의 유대감은 말할 것도 없지. 그저 기사 엔벨데를 죽인 이를 종사들과 한 방에 두고 재우는 게 대외적으로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취한 조치에 불과했다.

괜히 그대로 뒀다가 '우리는 종사조차 전장 경험있는 기사를 이길 수 있다.'라고 으스대는 걸로 여겨져서 되도 않는 시비가 들어오면 귀찮아진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이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들이 필요하다 느끼면 정말 삼라만상 모든 것을 동원해서 태클을 걸어오거든.

당장 나만 하더라도 수틀리면 치고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떠오르는 수준이니 평생을 그런 사회에서 살아온 이들은 어련할까.

"여러모로 시기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거 같군."

방랑 기사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 라고는 해도 열심히 일하면서 정든 직장이랑 다를 바 없으니 되도록 좋게 나갈 수 있을 때 나가고 싶다. 왕가에서조차 나를 일방적으로 칭찬하기 힘든 와중에 아무리 왕의 10검이라 불리며 잘나가는 기사 가문이라 하더라도 내가 안에 있으면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적당히 해고하는 거로 내부 징계를 하되 가르침을 받는 형태가 유지되면... 귀족 사회에서는 상당히 그럴싸한 대응으로 보일 것이다.

간편한 복장으로 환복한 뒤 침대에 눕고 나서야 손님용 침대조차 구금소의 침대보다는 조금 질이 떨어진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지만 심리적인 안정감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서 내일 셰릴이나 에카프 경에게 설명해야 할 내용들은 적당히 정리하다 보니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나름 집이라는 안도감 때문일까.

평소라면 새벽같이 일어났을 텐데, 아침 식사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 어김없이 에스뮈에를 신경 쓴 극진한 상차림으로 끼니를 때운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사절단이 묵고 있는 숙소로 돌아간 에스뮈에를 배웅한 뒤 어제의 계획대로 신변정리를 시작했다.

셰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제 구상한 계획을 말한 순간 뭔가 예상했던 것보다 쉬이 납득하지 못 하는 반응이 돌아와 첫 시작은 위태로워 보였으나, 집사장님과의 3자 면담을 통해 내 주장이 나름 합당하는 결론이 나와 어찌저찌 정리될 수 있었다.

"...그럼 결국, 내년에는 진짜로 나간다는 거잖아."

"새삼스럽게. 이미 여기 올 때부터 정해진 일이잖냐."

셰릴은 뭔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내 퇴직서에 승인 사인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라그니스의 저택이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고 정상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라서 그런 건지, 저택의 모습은 활기 가득 찬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정신없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괜히 바쁜 시기에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 방문 보류를 고민하고 있었더니 제국 방문 첫날 때처럼 정신없이 진두지휘를 하고 있던 레니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와주었다.

"엘드미아 경! 구금이 끝났나보군요!"

"오랜만입니다 레니사 경.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다 엘드미아 경께서 같이 힘 써 주신 덕이죠. 안 그래도 변경백께서 매일 같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들어가시죠."

"굉장히 바빠보이시네요. 좀 도와 드릴까요?"

"하하, 아닙니다. 이미 어제 지인분의 도움도 받았는데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이름을 언급 안 하는 걸 보니 딱 그 정도만 통성명을 했나보다.

괜히 여기서 돕네 마네 시간을 끄는 것조차 방해일 거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저택에 들어가 집무실로 향하니 밖의 부산함과는 티끌만큼의 인연도 없는 것처럼 소파에 드러누운 채 천장이나 보고 있던 라그니스가 나를 반겨 주었다.

"구금 끝났구나!"

"어, 원래는 어제 나왔는데 이것저것 밖의 일을 처리하다 보니 바로 못 왔어. 근데 어째 저택에서 너만 여유로운 거 같다?"

"강제로 방치되고 있는 거라고..."

말인즉슨, 마음 고생이 심했을 그녀를 배려해 저택이 정상화되고 왕실에서 확실하게 성명문을 발표하기 전까지 철저하게 휴식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레니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라고 과장되게 설명하는 라그니스는 몇 번이고 지루함을 강조했다.

물론 하소연만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기에스도 모든 일이 풀린 덕에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던가, 그녀에게 막고라를 걸어온 귀족이 단두대에 올랐다던가 하는 등의 내용이 이어졌으니까. 지루하다고는 해도 확실히 그간 꽤 지쳐 있었던 건 사실인지, 말하는 내내 라그니스는 뭔가 묘하게 기운이 없긴 했다. 저러니까 레니사가 요양을 하라고 한 거 같네.

"그러고보니 마침 네 지루함을 덜어줄 이야기를 들고 왔지."

"응? 뭔데?"

"나 궁정 마법사한테 마법 배울 거 같다."

"...어?"

지루함을 덜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황과 놀라움이 혼재된 건 확실했다. 적당히 어제 있었던 이야기들을 추려서 전해줬더니 그 감정은 경악과 어이없음으로 형태를 바꿔나갔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인연이다."

"내 인생에 말도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

"...그, 그럼 이번에야말로 우리 집에 머무는 건 어때?"

"그 역시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고 했지."

아니나 다를까 라그니스는 거의 생때를 쓸 각오까지 했으나 내 성공적인 설득에 넘어가서 겨우겨우 납득하고 날 끌고 오는 것을 포기했다.

"구체적인 건 위드라 님과 이야기하고 시간을 분배해야 확실해지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될 거 같다."

"개인적인 연구로 유명한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력을 연구하고 엘드미아랑 그런 인연까지 있었을 줄이야."

다시 되새겨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 라그니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공감과 헛웃음 뿐이었다.

그 뒤로 며칠은 정말 휴가를 얻은 것처럼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아실리에와 함께 여관을 찾아가 가엔달 일행과 저녁 만찬을 즐기고, 드디어 저택으로 돌아온 에카프 경에게 상황을 설명해서 양해를 구한다든가 발쿤 씨가 완성해준 투척 무기를 받아 성능 테스트를 해본다든가, 미리 장기 투숙하기 좋은 여관을 찾아본다든가 하는 식의 평온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3일 정도가 더 지났을 때, 아실리에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제안 했다.

"엘디? 이 기회에 오그웬에 한 번 들리자."

"오."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시간이 빠듯할 게 분명하다. 어차피 당장 못 움직일 이유도 없을뿐더러 내년이면 더 멀어질 테니 지금이 적절한 시기이긴 했다.

퇴직서를 제출했다고는 해도 계속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생활하며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에카프 경에게 먼저 이야기했더니 말까지 빌려주었다.

"많은 것을 해주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도와줘야지. 셰릴에게는 내가 말해 두겠네."

확실하게 왕실 성명문까지 발표되자마자 셰릴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솔직히 그간 너무 자연스럽게 저택에 있다 보니 난 영락없이 걔가 방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성적을 유지하려면 한동안은 꽤나 바쁘게 지내야 한다고 하더라.

뭐, 그거야 어쨌든 원래는 순행 마차를 타던지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에카프 경의 집무실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아실리에와 함께 간단한 여행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모험가 지구로 향했다. 아실리에도 갑작스레 수도로 날아온 탓에 준비가 미흡하고, 나도 일의 특성상 모험가 일을 하더라도 대부분 당일치기 일을 해왔기에 사실상 거의 모든 물품들을 새로 구입해야 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엔벨데 저택이 반파된 그날 내린 비가 세상의 기온을 다 깎아 먹은 것인지, 곧 있으면 눈도 내릴 것처럼 확실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기존에 쓰던 물품들이 있다 하더라도 점검 후 교체할 시기였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방한 용품은 고급품을 사자고."

"그러자. 누나도 오그웬의 기후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제는 버티기 힘들더라."

"그럼 잠깐 길드에 좀 들리자. 나 안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던 물건들이 있거든."

사제 A형 텐트. 그리고 마법처럼 포근한 모포.

이렇게 빨리 사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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