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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81화 (181/412)

결정을 했으면 빠른 실천이 이어져야 하는 법.

정말 간만에 제대로 된 평상복을 꺼내 입은 난 아실리에와 함께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요 며칠 사이 도시가 극적으로 변한 것도 아닐 텐데, 인생의 짐 하나를 처리했다는 성취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세상이 좀 더 쾌활하고 빛나는 기분이 든다.

이건...그래.

남들 다 출근할 때 나 혼자 휴가내서 동네를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괜히 뭔가 더 흥미로운 것에 시선이 잘 가고, 쉽게 발걸음을 멈추는 등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할 정도였다.

분명 아실리에도 그런 내 변화를 눈치챘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저 평소보다 좀 더 많이 웃으며 같은 걸 구경하는 식으로 내 기분을 맞춰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모험가 길드의 홀에는 겨울을 대비하는 것인지 이것저것 본 적 없던 가구들이 들어선 상태였다.

대수롭다고 할 만한 물건은 없었지만 상당히 본격적이긴 했다. 좀 더 두터운 커튼, 평소라면 꺼져 있었을 두 번째 벽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 접수처에 비치된 작은 마석 발열 난로 등등.

그사이를 오고 가는 모험가들의 복장도 내 마지막 기억보다 확연하게 두터워진 것을 바라보며 접수처에 다가서니 사무적으로 고개를 들어 반응하던 접수원이 활짝 웃으며 맞이해줬다.

"엘드미아 씨! 진짜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예전에 당텔 놈을 두들겨 팼을 때 환호하며 우편 비용을 깎아줬던 접수원이었다.

"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한동안 다른 일로 정신없이 바빴지 뭡니까. 잘 지내셨어요?"

"저희야 뭐 항상 똑같죠. 그 뒤로 당텔 놈 얼굴 안 보게 된 것 정도? 아, 편지 왔는지 확인해드릴까요?"

"아뇨. 이번엔 안 왔을 겁니다. 당사자가 여기 있거든요."

모험 의뢰 수주만큼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유가 아실리에와의 펜팔이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물어봐주는 접수원의 호의에 손을 내저으며 아실리에를 가리키자, 접수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일을 처리하며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주워듣던 다른 몇몇 접수원들까지도 반응을 보이는 것을 깨달은 난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오늘은 뭐 좀 여쭤보려고 온 거였어요. 지난번에 길드의 의뢰를 받아 움직일 때 텐트 같은 물자를 좀 지원 받은 적이 있었는데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물자 지원이요? 굉장히 드문 경우라서 어지간하면 기억이 날 텐데... 혹시 무슨 의뢰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길드장님께서... 주도하신 의뢰였어요."

"아."

그녀의 말대로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 담당자가 아니면 알기 힘들 거라 여겼던 내 예상은 정확했나보다. 잠깐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비운 접수원은 이내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 접수원과 함께 돌아왔다.

"반갑습니다 엘드미아 님. 말씀하신 의뢰에서 사용하셨던 보급품을 관리한 멕델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멕델린. 다름이 아니라 그때 사용한 텐트와 같은 것을 구매하고 싶은데, 혹시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로군요. 해당 제품은 세네란 마도서관에서 들여온 물건이었습니다. 모험가분들을 위한 다양한 마도구를 만들고 파는 곳이라 충분히 개인 구매가 가능하실 겁니다."

이미 날 만나러 올 때 이야기를 간략하게 듣고 미리 준비된 대답을 해준 것인지, 듣자마자 떠올린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 주저 없이 즉답한 멕델린은 접수처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장사 수완도 상당한 분이 운영 중인 곳이라, 이런 경우를 대비해 이런 재미있는 물건을 길드에 맡겨 놓으셨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심플하게 생긴...뭐라고 하더라 저걸? 펜듈럼?

머리카락 한 열 가닥 정도를 땋아 만든 것 같은 실 끝에 물방울 모양의 푸른 무언가가 시계추처럼 달려 있는 모습은 딱 펜듈럼이었다.

"이걸 들고 드워프 지구로 가시면 알아서 반응하며 길을 찾아줄 것입니다. 들고 가서 반납하시면 조금이나마 할인도 해준다고 하더군요."

"오..."

저 물건도 신기하지만 이런 형태로 장사 수완을 발휘하는 그 마도서관의 주인이 더 신기했다. 그리고 그건 아실리에도 마찬가지였는지 옆으로 다가와 굉장히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펜듈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해당 의뢰는 추가 보상 지급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지급해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어차피 왕실에서 대응해주는 거라 길드는 멀뚱히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일 텐데도 멕델린은 굳이 고개를 숙여가며 양해를 구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그런 일은 오래 걸리는 법이니까요."

양식있는 사회인은 언제나 환영이지. 난 웃는 얼굴로 인사한 뒤 아실리에와 함께 길드를 나왔다. 뒤에서 접수원들이 나와 아실리에의 관계에 대해 한창 수근거리기 시작하는 게 얼핏 들려왔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고 아실리에는 펜듈럼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하지만... 영리해. 이건 드워프 지구에 들어서야 제대로 알 수 있겠는걸."

"누나가 흥미로워할 정도야?"

"발상이 흥미로워. 이 사람은 분명 마법사라기보단 상인에 가까운 사람일 거야."

나와 비슷한 감상을 입에 담은 아실리에는 볼 만큼 봤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펜듈럼을 돌려주었다.

"드워프 지구에도 뭔가 손을 써놨을 거야. 한 구역에 그렇게 손을 쓸 수 있을 정도라는 건 꽤나 신뢰받고 있는 도서관장이라는 소리고, 실력 뿐만 아니라 규모도 크겠지. 엘디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쌀지도?"

"그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금화가 있는데 설마."

은화도 아니고 금화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이십 여개다. 기사 가문의 소가주 전속 집사라는 게 나름 고급 인력인 만큼 매달 금화 한 개가 넘는 수준의 급여를 받아온 것도 있지만, 모험가 일과 병행하면서도 정말 꾸준하게 모아온 덕에 모인 금액이었다.

텐트 사는데 이걸 다 달라고 하면 금화로 정수리를 쪼개버릴 테다.

"후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직접 사용해 보고 사는 거니 다행이네."

"누나도 써 보면 마음에 들 거야."

도서관이라고 했으니 아까 접수대에 있던 마법석 발열 난로 같은 것도 같이 사면 최소한 텐트에서 잘 때 추워서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고급물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부피가 크지도 않고, 마법석 대신 발광석을 넣으면 그대로 랜턴의 역할도 하는 놈인지라 일부러 돈 아끼며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쇼핑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한 게, 딱히 사치품을 사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필요한 물건을 내 돈 주고 사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즐거워지게 만든다. 음식이나 소모품을 살 때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라 간만에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대화 상대가 있어서인지, 들뜬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드워프 지구까지 가는 길은 정말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구역을 나누는 관문을 넘어서자마자 내 손에 들려 있던 펜듈럼이 제멋대로 은은한 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

이건 나도 신기해서 못 참겠다. 바로 마력을 사용해 보는 시야를 바꿨더니 길 좌우로 놓여 있는 가로등들과 펜듈럼 사이에 가느다란 마력이 연결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가로등이랑 뭔가 상호작용을 하나 본데?"

"어? 어떻...아. 보인다고 했지? 진짜 신기하다."

아무래도 아실리에 앞에서 직접 사용한 건 처음이다 보니 참신한 반응이 돌아왔다.

"근데 딱히 쓴다고 뭐가 달라지거나 하진 않네? 보통 눈에 작용하는 마법은 겉으로 티가 나는 법인데."

"마법이 아니니까...?"

"으음. 마안도 보통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말이지. 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좋은 거니까."

대충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설명하면서 나아가다 보니 우리 앞에 결코 도서관이라 부를 수 없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네란 마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찾으시나요?"

"이 제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이번 분기 최신작으로..."

"마도구는 1층, 마법사들을 위한 마법용품은 2층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장담컨데 지금 드워프 지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여기일 거다. 발쿤 씨가 있던 무구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마도서관...?"

"이건 그냥... 상점이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처음 오는 도서관이었기에 어떤 모습일지 꽤 궁금했는데, 이건 아실리에가 방금 말한 것처럼 도서관이 아니라 그냥 종합 상점에 가까운 형태였다. 혹시나 싶어 펜듈럼을 확인했지만, 이젠 아주 빳빳하게 서서 가게를 가리키는 탓에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될 뿐이었다.

"어서오세요 손님! 그 펜듈럼을 보아하니 길드의 추천으로 오셨군요!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접객. 무구점 때도 그랬지만 묘하게 드워프 지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들은 접객에서 현대의 냄새가 난다.

손님을 한 번 물고 결코 놓지 않기 위해 웃음과 질문으로 만든 구렁텅이의 냄새가.

"길드에서 사용한 텐트와 기타 여행 용품을 좀 보려고 왔습니다."

"아! 저희 마도서관은 항상 최고의 물건만 골라 길드의 높은 눈을 충족시켜 주고 있죠! 그걸 알아보는 안목을 지니셨다니 정말 잘 찾아오셨어요!"

어찌보면 뻔하고 익숙하다 할 수 있는 호객 행위에 난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아실리에가 굉장히 진중한 얼굴을 하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엘디. 여기가 어느 정도 수준의 물건을 파는지는 모르지만 저런 호객 행위에 휘둘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

"...응. 조심할게."

전생에서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호객 행위도 심심치 않게 겪어봤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손님 맞을래요?' 같은 게 만연하던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던 현대인은 강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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