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구라는 것은 결코 수명이 무한하지 않다. 그런 건 마력으로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마나는 결국 시간에 따라 그리고 자주 사용함에 따라 점점 힘이 약해지게 되어 있다. 충전되어있는 마나의 고갈이라던가, 술식의 노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물론 마법사라면 관리 방법만 알아도 다시 처음과 비슷한 상태로 복구할 수 있었으나 마법에 문외한인 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세네란 도서관장은 거기에서 장사의 힌트를 얻었다. 상품의 유지와 보수마저 수익으로 연결지을 힌트를.
수준 높은 마도구는 수준 높은 마법사를 통해서만 보수가 가능하다. 그랬기에 구하는 비용도, 고치는 비용도 부담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전투에 유용한 물건이면 비장의 한 수라는 명목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모험에서의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그런 물건을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사치인 게 당연했다.
그래서 세네란 도서관장은 그 기준을 대폭 낮췄다.
마법사들만의 전유물 취급받던, 하지만 그다지 대수롭지는 않은 생활 용품들을 모험가 사양으로 만들어내고, 마나를 쓸 수 없어도 사용할 수 있게 설계한 뒤, 마나를 대체할 마나 카트리지를 만들었다. 보다 단순한 구조의 물건들은 실험 몇 번 하다 보면 넘쳐나게 되는 부스러기 마법석으로도 대체할 수 있게 손봤다.
항상 위를 추구하는 마법사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굳이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열화된 물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걸로 돈을 벌겠다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녀의 행적에 비웃음을 날렸다.
어떤 미친 마법사가 주문 한 번이면 끝날 불씨와 빛을 위해 돈을 쓰겠어. 어떤 미친 모험가가 그런 요상한 사치를 부리겠어.
어찌 보면 타당한 의견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편안함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기름 주머니와 병처럼 찢어지거나 깨질 우려가 없는 마나 카트리지와 마법석을 사용하는 발광 랜턴은, 일반 기름 랜턴보다 적은 광원을 확보하지만 더 오래 가고 불이 옮겨붙거나 바람에 꺼질 걱정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규격의 다른 카트리지를 사용하면 광원은 사라지지만 미세한 발열이 발생하여 난로로 쓸 수 있었다. 그 수준은 결코 모닥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모포나 작은 텐트 안에서는 충분한 온기를 가져다주었으며, 마찬가지로 불이 옮겨붙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뚜껑을 제거하고 그 안에 있는 버튼 하나를 누르면 10초 안에 불씨를 만드는 대신 나무로 만들어져 홀라당 타버리는 발화 도구는, 발동에 10초나 걸리는 소모품임에도 불구하고 개당 동화 6개라는 가격을 자랑해서 그 누구도 사가지 않을 거라 마법사들이 장담하던 물건이었으나, 이제는 돈 좀 있는 모험가들이라면 5개 씩은 기본적으로 챙기고 다닐 정도로 사랑받는 물건 중 하나가 됐다.
모든 물건이 그런 식이었다. 포장을 벗겨 물에 넣으면 겨우 컵 하나 정도 분량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열을 낸 뒤 전소해 버리는 돌. 충격을 받으면 그저 빛나는 게 고작인 돌멩이. 방수 능력이 좀 좋을 뿐인 모포. 그렇게 사용하다가 파손되거나 분실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다시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과 합리적인 성능.
도서관의 마법사들이라면 굳이 아쉬울 필요가 없고, 길거리 마법사는 자기가 직접 할 수 있는 별거 아닌 수준의 물건들로 돈방석에 앉아버린 세네란의 모습을 본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순순히 인정하고 그녀에게 황금의 마법사라는 이명을 붙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잊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너무나도 뛰어난 수완으로 거침없이 벌어들인 돈 때문에 잊어버리고만 것에 가까웠다.
왜 그녀가 갑자기 돈을 벌기 시작했으며, 그전에는 무엇을 연구하기 위해 드워프 지구에 도서관을 세웠는지.
세네란 마도서관이 언제 세워졌는지.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는 모습조차 보기 힘든 그녀가 대체 뭘 하고 사는지 관심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세네란 마도서관의 직원들에게는 작은 비밀이 있었다. 그들이 성실히 손님을 응대하게 만드는 아주 작은 비밀. 바로 급여와 별개로 존재하는 성과급이었다.
조건은 간단하다. 거짓말없이 많이 팔고, 비싸게 팔고, 비싼 물건을 팔고, 악성 재고를 판매하는 것. 가격을 올리고 내리는 건 거짓이 아니었기에 상관 없었다. 세네란 마도서관의 상품들은 권장가격만 있었으니까.
사실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은 세네란 마도서관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드문 경우였기에 대부분의 성과급은 앞에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달성하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세네란 마도서관에 오는 이들은 대부분 마법과 연이 없는 이들이었고, 직원들은 돈이 궁한 마법사 혹은 아카데미 마법학부 생도들이었기에.
얼마나 더 열성적이고 성실하냐로 부수입이 갈린다는 조건에 자신감 넘치게 들어와서 우수 사원으로 자리 잡은 넬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이제 막 가게에 들어선 장신의 남자와 엘프를 살펴보며 빠르게 판단했다.
'엘프는 마법을 익힌 거 같지만, 인간이랑 저렇게 같이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보아서 어릴 가능성이 높아.'
세상 물정 모르고 동경만을 품은 채 밖으로 나온 엘프들은 이종족과 쉽게 어울리지만, 점차 나이를 먹을 수록 거리감을 배운다. 나중엔 결국 해탈하다시피해서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인간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엘프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누나도 신기할 정도야?"
"수도 같은 곳은 잘 안 왔으니까. 모험은 대부분 변방에 있는 법 아니겠니."
꽤나 깔끔한 복장이라 혹시나 싶었는데 모험가가 맞았다. 젊고, 모험심이 넘치며 인간들의 수도에 발을 디딜 일이 적은 엘프들은 생각보다 쉬운 고객들 중 하나였다. 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건 궁금증만으로도 충분했고, 세네란 마도서관에는 마치 길거리 마술사들의 눈속임처럼 뜯어보면 별거 없지만 그냥 보기엔 어떻게 만든 건지 흥미를 가질만한 물건이 많았다.
넬비는 머릿속에서 모험가 인기 품목을 빠른 속도로 나열하며 이번에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에 비해 남자 쪽은... 오우야.'
그리 나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잘해봤자 열여덟에서 많아도 스물이지 않을까?
눈매가 조금 위협적이긴 했지만 엘프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예절과 애정이 뚝뚝 흘러내렸고, 입고 있는 옷은 모험가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매우 깔끔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마도서관의 난방을 느끼자마자 벗은 외투 안에서 나온 몸매 때문에 넬비는 저도 모르게 사심이 들어간 눈으로 바라보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야...'
큰 키와 얄쌍한 얼굴과 달리 코트가 유달리 펑퍼짐하다고 느꼈는데, 저 넓은 어깨를 보니 납득이 됐다. 팔뚝만 놓고 보면 자기 허벅지랑 맞먹을 것 같은데 광배근 아래로 이어지는 허리는 바짝 조여져 나머지 근육들과 비교하면 코르셋을 입은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다. 결코 얇은 상의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걸을 때마다 얼핏 보이는 복근의 윤곽은 넬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시선마저도 훔칠 정도였다.
'무슨 야만 전사도 아니고...'
남자보다 거대한 근육을 지닌, 그야말로 근육 돼지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이들은 많이 있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우렁찬 목소리와 예의 없는 행동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건 생각보다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신사적으로 보이는 행동과 폭발적인 근육이 이루는 대비에 넬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보니 날카로운 눈매마저도 잘생겨보였다. 그래, 저 정도면 옆에 엘프랑 같이 다녀도 개연성이 생기는 법이지. 얼굴이 좀 부족하면 어때, 나머지가 평균 이상인데.
납득은 빠르게 찾아왔지만, 넬비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였다.
"이 랜턴은 마법석 연소 효율이 별로 좋지 않네요. 같은 상품들도 비슷한 거 보면 이 가격에서는 이게 보편적인가요?"
"좋은 물건이지만, 거꾸로 제가 쓰기에 너무 좋은 물건이군요. 딱 중간 정도 성능의 물건도 있을 거 같은데 알아봐주실 수 있으실까요?"
"천에 마법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 때 마법을 이용해 만들었군요? 이 텐트를 두 개 사고 싶은...어? 한 개만 사라고? 어차피 겨울이니까 떨어져 봤자 춥기만 하다고? 그런가? 그래도 내년을 생각하면..."
"그땐 이미 날이 풀린 뒤일지도 모르니까. 미리 사서 저렴한 것도 아니잖니?"
"그것도 그런가...?"
엘프는 처음에 보여줬던 흥미와는 별개로 조곤조곤 웃는 얼굴로 불필요한 물품들을 걸러냈으며 남자는 설명하기도 전에 제품을 파악하고 장단점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나도 안 느껴지는데 뭐가 이리 예리해?'
덩치와 다르게 사실 드워프의 피라도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자가 물건을 살피는 눈은 뛰어났다.
처음엔 만만히 여기고 싼 물건들의 가격은 조금 높게, 비싼 물건은 아주 살짝 낮게 불러 '기왕 비슷한 가격이면 조금 더 보태서 좋은 것을' 이라는 심리로 이끌고 가려다가 앞에서 봤던 상품들의 딱 중간 정도 되는 물건을 들어 가격을 물어본 탓에 되려 원가보다 싸게 팔아버린 상황까지 나왔다.
그제서야 넬비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손님의 능력을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런 형태로 그가 산 물건만 두 개였고, 넬비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남자가 악성 재고 중 하나로 취급받는 오르골 앞에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밤에 잘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건 오르골 아닌가요? 여행용품이랑 연이 없는 거 같은데."
"해당 상품은 드워프 장인이 만든 오르골이랍니다. 여행용품은 아니고, 조금 특이한 기능이 있을 뿐이랍니다."
"특이한 기능이요?"
"마나 운용을 훈련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든요. 상자를 열면 음악이 한 번 흘러나오는데, 그 뒤로는 내부에 있는 장치들에 마나를 직접 흘려 넣어 사용자가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마나가 통하지 않는 부속품이 대부분이며, 그중 마나가 통하는 톱니에만 적정량의 마나를 주입하여 원래 음악과 같은 속도로 연주하는 걸 목표로 하는 도구랍니다."
그게 더럽게 힘든 주제에 정말 효과가 있는지도 미지수라는 평가 때문에, 겨우 하나 있는 물건조차 몇 년째 안 팔리고 있었지만 넬비는 굳이 그러한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건 얼마죠?"
"이티스엘 금화 한 개랍니다."
넬비는 굳이 가격을 속이지 않았다. 악성 재고에 그런 짓을 해봤자 안 팔릴 가능성만 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금화 한 개라는 말을 듣고도 남자는 아무 주저 없이 오르골을 구매했고, 옆에 있던 엘프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뿐 딱히 그를 말리지 않았기에 넬비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완벽하게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그녀가 외모에 홀리지 않은 채 시작부터 수작질을 부렸다면 골수까지 뽑히다가 도서관의 주인인 세네란을 호출해야만 하는 극악의 상황까지 끌려 갔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넬비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