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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84화 (184/412)

오가토르프 저택에 돌아온 나와 아실리에는 간단한 준비를 마친 뒤, 말을 빌려 수도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휴가 쓰고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 취급인지라 사용인들도 그냥 평범하게 배웅해줬기에 특별할 건 없다. 셰릴이 없는 이상 내가 인수인계를 할 업무도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택을 벗어날 수 있었다.

"5일치 식량이면 충분하겠지?"

"여유롭지.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말을 타고 가는데."

모험가들을 상대로 보존식 위주의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나름 영양 밸런스를 신경 쓰며 이것저것 구입한 우리는 별다른 검문없이 성문을 지나 차디찬 평원으로 나아갔다.

처음엔 그냥 평범하게 갈 생각이었는데, 뭐가 그리 신난 것인지 뜬금없이 아실리에가 먼저 달려 나가기 시작한 걸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서로 경쟁하듯이 말을 달렸다.

기사 가문의 말답게 본디 군마인 놈들은 쉬이 지칠 줄도 몰랐다. 마갑이라도 걸치면 모를까, 갑옷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태운 군마들은 지칠 기미 없이 충분히 빠른 속도로 평원 위를 질주했다.

더럽게 비싼 녀석들이다 보니 원래는 사양하고 적당히 말을 빌려주는 곳이나 찾아보려고 했지만, 말이 죽더라도 책임지라는 말 안 할 테니 그냥 가져가라는 에카프 경의 확고한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평원은 휑 했다. 드문드문 길을 따라 걷는 모험가나 여행자들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빠르게 달리며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우리들이 그렇게 마주친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이었다면 그 광경에서 황량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아실리에의 고조된 감정이 전이 된 것인지 내가 느끼는 건 묘한 상쾌함이었다.

"엘디! 말 타는 솜씨가 많이 늘었네!"

"이것도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

수도에 오기 전에도 오그웬에 가느라 말은 자주 탔지만 어디까지나 교통 수단으로 내 몸을 맡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마상 전투를 전제로 기마술을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아직도 말 타는 게 딱히 즐겁다는 느낌은 없지만 아쉽지 않을 수준까지는 탈 수 있게 됐다.

"이제 슬슬 말에서 활 쏘는 것도 배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말이지!"

즐겁게 웃으며 말하는 아실리에였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말 타고 움직일 일 자체도 얼마 없는데 숙련되기까지도 엄청 오래 걸리는 고급 기술을 익힐 여력따위 나한텐 없다고.

그런 내 주장따윈 상쾌한 웃음으로 적당히 흘려넘기는 아실리에와 함께 한참을 더 달리다가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챙겨 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처음 수도로 올라올 땐 주변을 살펴볼 경황이 없었고, 그 뒤로는 오그웬 방향으로 굳이 갈 일이 없어서 낯설기 그지없는 풍경을 감상하며 햄과 치즈를 비롯한 야채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더니 귀엽게 귀를 파닥이던 아실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실리에가 귀를 저렇게 어수선하게 움직이면 보통 주변에서 흔하지 않은 소리가 난다는 건데.

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건 사고에 휘말릴까 싶으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바라보자 아실리에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 먹고난 뒤에 오른쪽으로 좀 우회해서 가자."

"...뭔 소리가 나길래?"

"싸우는 소리. 우르르 움직이는 거에 비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적은 걸 보면 소수가 다수에게 쫓기고 있는 것일지도? 하필 방향도 우리랑 비슷한 거 같고. 그래도 거리를 두면 별문제 없을 거야."

망할 판타지 세상은 언제 어디서나 쉴 틈 없이 칼싸움 중이로군.

번거롭고 귀찮은 일에 솔선수범해서 휘말리는 취미는 없었기에 후다닥 샌드위치를 먹어치운 뒤 아실리에를 따라 말을 몰았다. 서둘러 달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앞에서 너무 신나게 달린 터라 속도를 내긴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좀 늦게 움직여서 저 싸움과 거리를 두는 거였는데 라는 부질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30분 정도를 더 갔을까.

"안 좋은데."

아실리에가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이젠 이쪽으로 와?"

"그냥 오는 정도가 아니야. 갑자기 가까워지기 시작했어."

"갑자기?"

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 있길래? 라는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기가 무섭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실리에가 설명해줬다.

"아마... 우리를 자기들 일에 억지로 휘말리게 만들 생각인 거 같아."

"...대체 왜?"

"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서 시간이라도 벌어보려고? 혹은 우리를 자기들의 일행이라 착각하게 만들어서 적에게 혼란을 주려고?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를 배려하려고 오는 게 아닌 건 확실해."

덤덤하게 말하는 아실리에와 달리 내 안에서 정말 오랜만에 나쁜 엘드미아와 더 나쁜 엘드미아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말이지?"

"어떻게 우리를 파악한 건지는 몰라도, 그렇겠지. 아마 마법사가 독수리의 눈 같은 가시성 확대 마법을 써서 주변을 탐지한 거 같은데."

마법이라고? 혹시나 싶어서 마력을 끌어올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지상에서는 말이지.

묘한 불쾌감 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력이 응집된 거대한 구체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마력을 빼고 보면 안 보이는걸 보아하니 저게 맞나보다.

이제 와서 아실리에의 활을 빌려 저기다가 마력을 담아 활을 쏜다해도 의미가 없을 거 같다는 게 사람을 빡치게 만들었다.

"예전에 누가 그랬었지."

"응?"

"만일 누군가가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한다면, 그 씹새끼한테 이유를 만들어 주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싫어할 짓을 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으니 날 싫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게 맞는 거 아니겠어?

한 대의 마차가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려 네 마리나 되는 말이 요란한 투레질과 함께 몰고 있는 마차는 얼핏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나 바퀴와 다른 연결고리들이 마치 전차처럼 보강되어 있다. 거칠게 말을 모는 마부는 누가 봐도 중무장한 모험가였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는 방어구만 가벼울 뿐 딱 봐도 상등품인 석궁을 두 개 씩이나 지님으로써 자신들이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10명의 무리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격렬하게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벗겨지지 않도록 후드를 푹 눌러 쓴 채 검과 활을 빼 들고 달리는 그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막 위치를 바꾼 것처럼 보이는 그들 중 네 명이 최대한 마차 뒤에 바짝 붙으며 바퀴를 향해 말 안장에 실린 단창을 꺼내 내질렀으나 단창은 바퀴살을 부수기는커녕 파쇄기에 끼인 것처럼 박살 나버리고 말았다.

벌써 준비해온 단창을 거의 다 써버린 복면 괴한들 중 누군가가 이를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새끼들! 아주 전투 마차로 개조해 놓았군!"

"알았으면 좀 꺼져라!"

다리 사이에 끼고 있던 석궁을 마부에게 맡기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조수석의 남자가 최대한 신중하게 괴한들 중 한 명을 노리고 장전된 석궁을 발사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추격전 속에서 계속 반복해온 행동이었고, 괴한은 그걸 어렵지 않게 방패로 막아 냈다.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에 박힌 수많은 볼트 중 하나가 되어버린 볼트를 바라보며 남자는 혀를 찼다.

"그러는 지들도 방패에 씨발 인챈트를 때려 박아 놓았네! 졸렬한 새끼들!"

마부는 방패에 인챈트를 한 것과 졸렬한 것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넘쳐오르는 짜증을 담아 그냥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여서 욕하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으니까. 대신 능숙하게 석궁의 장전을 마치고 조수석으로 넘겨줄 뿐이었다.

"메르델라! 이쪽이 확실해?!"

"집중 흐트러지니까 그만 물어보고 달리기나 해! 곧 있으면 보일 거야!"

격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을 보고 있는 시야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보는 마법의 눈이 보여주는 시야가 멋대로 뒤섞이려는 것을 가까스로 구분지으며 마법사 메르델라는 힘겹게 대답했다.

"근데 쟤들이 도움이 될까?"

"지금 우리 상황보다는 나아지겠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쪽도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마법의 눈이 보여 준 모험가 중 한 명은 엘프였고, 활을 들고 있었으니 당장 맞지도 않는 석궁을 열심히 쏘아대는 일행보다는 큰 도움될 게 분명했다.

"엘프의 정령술이면 저 방패를 우회하고 활을 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야!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쪽이랑 붙어야 해!"

말들에게 걸어 준 강화의 효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추격자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무리해서 쫓기보다 적당히 뒤를 따라오며 천천히 몰이사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티스엘 왕국 치안대가 보였으면 당장 거기로 달려갔겠지만, 이 인근에서 그나마 전투가 가능할 만한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은 저 둘 뿐이었다.

"보인다! 이제 어쩌냐!"

"일행인 척 해!"

"뭐?!"

"그래야 저 망할 것들도 예상외의 상황이라 여기고 당황할 거 아냐! 쟤들이 도망가더라도 우리랑 연관이 있다고 여기면 최소한 별동대를 보내겠지!"

"하지만 그러면..."

"칼스 이 병신 새끼야! 그럼 이대로 그냥 다같이 뒈질래?!"

이제는 필요 없는 마법의 눈을 해제한 메르델라는 욕지기를 내뱉은 뒤 바로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모험가란 원래 그런 거였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동료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몹쓸 짓을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그런 거. 꿈과 낭만을 품고 살아가기엔 그들 모두 너무나도 오랜 시간 현실의 굴레 속에서 버텨 왔다. 메르델라가 공감각이 결여된 정신병자라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일행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스라 불린 조수석의 남자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메르델라의 외침에 반박하지 못했다.

"이봐! 계획이 틀어졌다! 꼬리를 잡혔어!"

그랬기에 최대한 다급함을 연기하며 저 멀리 있는 두 모험가들과 일행인 것처럼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였다.

"어?"

장신의 남자가 느긋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리고 옆에 있던 엘프가 능숙하게 그의 말을 몰아 옆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 친구 왜 저래?"

"빌어먹을, 이대로는 부딪칠..."

"나는!"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따윈 아랑곳하지 않으며 장신의 남자가 외쳤다.

"엘드미아 에가다!"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뭘 하는 건가 같은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그들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까지 폭발적인 속도로 접근한 남자가 휘두른 주먹이 앞에서 달리던 말 한 마리의 미간을 후려쳤다.

-히이이잉!

미간을 후려맞은 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울려 퍼지는 말들의 울음소리는 시체로 인해 나자빠지고 있는 다른 말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에 불과했다. 그리고 칼스는 절명한 말에 걸려 나자빠지기 시작하는 다른 말들과, 거기에 걸려 전복되는 마차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씨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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