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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86화 (186/412)

괴한들은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긴장에 의해 몸이 굳어 버리거나 공포로 사고가 마비된 탓은 아니었다.

그냥 진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에, 괴한들은 눈앞에서 대장이 썰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수많은 훈련을 받고 교단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던 그들이었으나 겨우 롱소드 한 자루로 말의 목과 사람의 몸통을 양단해 버리는 정신 나간 생물을 상대하는 방법을 훈련한 적은 없었다.

말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조차 말의 목이나 몸통이 아닌 다리를 베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좀 길 뿐인 롱소드로 저렇게 아무 저항 없이 목을 대각선으로 벨 수 있단 말인가?

저게 마법검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더라면 심각한 문제였고, 그저 오러와 터질 듯한 근육이 만들어 낸 노력의 산물이라면 절망적인 문제였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마법검과 실력이 합쳐진 거라면, 당장 도망쳐야 했고.

하지만 그들의 훈련된 육체와 두뇌는 자신들의 종교만큼이나 보편적인 상식도 신봉했다. 인신 공양을 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상식이다 보니 여러모로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식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감히 신을 욕 보인 이교도들이 그저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한 지나가던 모험가가 마법검과 오러 익스퍼트 끝자락을 넘어서는 끔찍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에, 그들은 남자의 검만 마법검일 거라 믿기로 했다. 움직임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긴 했으나, 겉으로 느껴지는 오러가 미미해 결코 익스퍼트 급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러 비기너 정도의 실력만 되어도 타이밍과 배분만 잘 한다면 주먹으로 바위를 부순다. 반동을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그래 봤자 바위 끄트머리를 부수는 수준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말의 두개골도 부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창을 써라!"

대장 다음으로 명령권을 지닌 이가 외치자 괴한들은 남아 있는 투창을 집어 들었다. 이미 다 써버린 이는 다른 이의 투창을 받아들며 오직 창으로만 무장한 그들은 잠깐 시선을 교환한 뒤 마음을 굳게 먹으며 말에서 내렸다.

말을 타고 있기에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점이 부질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괜히 타고 달려들다가 말이 죽어 버리면 그들만 손해였기에.

마차를 몰던 말조차 주먹 한 번 휘둘러서 죽인 인물이니, 그 판단만큼은 꽤 과감하지만 나름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가죽 흉갑 하나와 철제 건틀릿 외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와 달리 괴한들은 하나 같이 로브 안에 철갑옷에 사슬갑옷까지 껴입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엄청난 우위여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일격에 썰려 나간 그들의 대장 역시 같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그들에게 있는 전술적 우위라고 할 만한 것은 투창용 단창 뿐인 것이다. 오히려 무거운 갑옷 때문에 불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 이어진 대치는 그리 길지 않았다.

괴한들의 반응을 가만히 확인한 남자가 짧은 한숨과 함께 번개 같은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포위해라! 몬스터를 상대한다고 생각해!"

명령을 내리면서도 가장 앞장서서 움직인 괴한의 창이 깔끔하고 숙련된 움직임이 만들어 낸 가속 끝에 남자의 미간을 정확히 노리고 찔러 들어간다. 그 깔끔한 궤적만으로도 괴한이 얼마나 실력을 갈고 닦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남자는 시선을 괴한에게 둔 채 검 끝만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별 어려움없이 정확하게 창을 흘려보냈다. 틀어진 창끝이 아주 미세한 차이를 두고 남자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그 결과를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는 주저 없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딜 뿐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려보내고, 그 와중에 눈길 한 번 흔들리는 일 없이 괴한의 눈이 있을 위치만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는 남자가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음은 자명했다. 괴한 역시 뛰어난 전사였기에 즉각 상대의 시선에서 공격 위치를 읽어내려 시도했으나, 남자의 눈은 못이라도 박아 놓은 것인지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도 꼼짝하지 않았기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제기랄!"

판단은 늦었고, 남자는 너무나도 빨랐다. 찔러 넣은 창을 뺄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괴한은 이를 악물며 자신의 유일한 이점일지도 모르는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늦어 버린 터라 완벽한 방어는 힘들다. 반 정도밖에 안 뽑힌 검으로 막아 내면 자세는 흐트러지겠지만 동료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순간 판단을 마치고 검을 뽑는 괴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일격에 양단되어 버리는 대장의 모습이었다.

'그걸... 막아?'

대체 지금 무슨 짓을?

순간 전신에 돋는 소름와 공포속에서도 괴한은 멈추지 못했다. 이미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채앵!

"어?!"

그랬기에 괴한은 남자의 검이 막힌 것을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 너무 놀라서 다음 동작은커녕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그는 남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판단보다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오판을 내리고 말았다.

"마법이 사라졌...!"

머리를 베어 내려는 움직임은 막았을지언정 그대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까지는 막지못한 괴한은 성대를 찢으며 파고드는 칼날의 방해 속에서 말을 맺지 못했다. 대신 다른 동료가 그의 유지를 이어 외쳤다.

"마법이 풀렸다! 검이 막혔어! 달려들어!"

긴장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동시에 달려들었을 괴한들이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움직이는데 있어 차이가 나고 말았다. 그 차이는 괴한들끼리의 연계를 무너뜨렸고, 결과적으로 큰 소리로 자신이 본 것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드는 괴한과 아무도 합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을 그들도 봤기에, 합이 맞든 안 맞든 괴한들은 일단 달려들어 창을 찌르고 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몰라도 저 힘이 다시 돌아오면 승산은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남자를 죽이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미지의 힘에 대한 공포심과 남자에 대한 경계가 그들의 호흡와 움직임을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별거 없네."

짧은 중얼거림. 극도의 긴장 속에서 괴한들은 그게 남자가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남자가 방금 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동료에게 파고들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창을 베고, 두 팔을 베고, 이내 목까지 막힘없이 베어 버리는 일격을 바라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마법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자신들의 조바심을 유도했을 뿐이라는 것을.

저 괴물은 사람의 심리마저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저 새끼 일부러...!"

누가 외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남은 괴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쳤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방금 전까지의 보여주던 움직임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그의 검이 빛날 때마다 휘두르는 검은 허공에서 튕기듯이 가속했으며 그렇게 휘둘러진 검은 모든 걸 베어 버렸다.

일곱 명이 다섯이 되고, 다섯이 하나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공방 자체가 성립이 되질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마지막 1인이 된 괴한에게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씨발!"

"씨발? 나도 씨발이다. 어찌 인생 순탄하게 흘러가는 게 없냐."

만사가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는 남자의 중얼거림과 함께 무심히 휘둘러진 칼날이 괴한의 목을 벴다.

"......어쩌지 진짜."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얼빠진 상태로 목도한 칼스는 조용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중얼거릴 수라도 있는 그는 차라리 나았다. 센은 여전히 턱이 빠져 있었고, 중갑의 모험가는 바짝 긴장했으며, 메르델라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10명의 사교도들을 베어 죽이는데 걸린 시간이 3분이 안 된다. 표정은 묘하게 지쳐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같이 있던 엘프는 아직도 멀찍이 떨어져 남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저 정도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건 내가 내린 판단이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메르델라가 조용히 말했지만, 센은 크게 말했다.

"헛소리 하지마. 우리 모두 동의했어. 그딴 식으로 꼬리를 자를 수는 없는 법이지!"

그 외침에 시체들을 훑어보던 남자의 시선이 일행에게 쏠렸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도 센의 주둥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중갑의 모험가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칼스도 마찬가지였다.

"변명은 준비했냐?"

순식간에 죽음을 흩뿌린 존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다가왔다.

열 명을 상대로 싸우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일행들은 의지가 꺾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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