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고민을 해봤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잠깐 기다려 봐. 확인하고 올 테니."
"확인이요?"
"귀족인지 아닌지. 일단 그거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냐?"
"그렇기는 한데... 어떻게...?"
자기들도 뭔가 귀족같다고 여겼으니 여기까지 거침없이 달려올 수 있었던 거겠지만, 눈앞의 미친놈이 확신을 가지고 알아보겠다고 하니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센이었으나 어차피 곧 알게 될 걸 굳이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다. 난 그저 따라오라고 손가락만 까딱거린 뒤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분명 신호를 주면 데려오라고 했던 놈이 직접 제 발로 걸어와서인지는 몰라도 갑옷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지만 일단은 애들한테 집중하기로 했다.
오가토르프 가문 소가주의 전속 집사라는 자리는 결코 인맥을 동원한 낙하산으로 꿰찬 자리가 아니라니까? 현대를 살아가던 사회의 톱니바퀴가 지니고 있던 훌륭한 영업 정신과 일머리를 동원해서 얻어낸 것이며, 이후에도 집사장 님의 꾸준한 교육을 통해 전생에서도 잘 몰랐던 명품 구분법마저 터득한 나에게 짭인지 찐인지 구분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란 말씀.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애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상태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도 함께. 그래도 얼굴을 보아하니 잘 먹고 지냈던 애들은 맞는지 건강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여자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애가 입고 있는 옷은 심플했지만 양식만큼은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할 때 입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저분해지거나 찢어진 걸 제외하더라도 옷 자체는 살짝 낡았다. 귀족이라면 자식에게 중고를 사서 입혔을 리 없으니 저 녀석이 몇 년째 자라지 않은 게 아닌 이상 형제나 다른 이들의 옷을 물려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 여자애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수도에서도 유행하는 디자인의 예복이다. 걸치고 있는 모피 코트는 투박하지만 목에 두르고 있는 숄은 심지어 실크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런 걸 멀쩡히 걸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운 좋게 바로 구출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저 숄과 어울려야 하는 드레스는 유행만 맞췄을 뿐 원단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귀족이긴 하되,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은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오해가 겹쳐 무례를 범한 점. 그리고 제대로 된 예조차 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예법대로 인사를 건네자 소녀의 두 눈 가득 의아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품에 안고 있던 남자애의 어깨를 다독이며 잠시 옆으로 떼어놓은 소녀는 흐트러짐없는 자세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개,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에가 경. 늦게나마 서로에 대한 오해가 사라져서 다행입니다."
자식 하나 챙겨서 꾸며주는 것조차 힘든 상황의 귀족이라는 건 의외로 흔하다. 심지어 지금은 엄연히 전쟁 중이다 보니 거기에 얽혀 있는 귀족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그런 귀족일수록 명예와 예절에 대해 엄격한 법이다. 저렇게 바짝 긴장했으면서도 각 잡고 튀어나오는 예법이 그걸 증명하는 듯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귀족인 건 확실했다. 대체 왜 오그웬의 귀족이라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난 제국에서 갈고 닦은 동화 속 기사님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오그웬으로 향하시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저 역시 오그웬으로 향하던 중인지라 목적지까지 동행을 하고자 합니다"
"동행...인가요."
소녀의 눈동자에 다시금 불안이 깃든다. 나라도 방금 전까지 쫓아오던 위협적인 사람들을 싹 다 죽이고 자기를 구해 준 사람들도 죽여 버리겠다고 눈이 뒤집혔던 인간이 갑자기 돌변해서 동행한다고 하면 신경이 쓰일 거다. 어차피 얘네한테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일단은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꾸미고 존중하는 척하며 약간이나마 신뢰를 얻기로 했다.
"신들께서 안배하신 것인지몰라도 저는 어릴 적부터 오그웬에서 살아가며 영주이신 베넥트 남작님의 비호를 받아왔습니다. 오그웬에 자리잡은 귀족은 그분 뿐이니 분명 아가씨는 베넥트 남작님의 가족이시겠지요. 그런 아가씨께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남작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구라다. 비호는 무슨, 내 유년기는 철저하게 아실리에의 비호 아래에 있었는데.
오히려 자식 걱정에 눈이 멀어서 자경단이 종종 뒷돈 받아 먹으며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것에 무관심한 적이 있다 보니 그거 때문에 고생만 했다. 뭐, 하나뿐인 자식이 위험한 전쟁터에 자진해서 나갔으니 그 마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실과 관계 없는 립서비스 덕에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소녀는 크게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건 조금 의외였다. 딱히 연기에 능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남작을 직접 언급했는데도 거짓말이 들통날 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으니까.
"참으로 명예로운 분이시군요.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저희를 구해주신 점에 대해 마땅히 감사와 보상을 드려야 하나,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된 보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진짜로 남작과 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을 구했다는 명예만으로 퉁치려는 정신머리 없는 인간들도 많은 와중에 상당히 개념찬 소녀였다.
"개의치 마시지요. 기사되려는 자로서 재물보다는 명예와 정의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 정말 훌륭한 가르침이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어느 가문에서 가르침을 받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살짝 불안에 떨며 가라앉아 있던 소녀의 목소리에 화색이 도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아직 12살도 되지 않았을 애답게 기사 비슷한 거에 환상을 품고 있을 줄 알았다.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짧게 나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년 초에 방랑 기사 서훈을 받게 될 것이기에 함부로 기사도를 논할 자격은 없으나, 마음가짐만이라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오, 오가토르프!"
그야말로 혼이 담긴 구라...는 아니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사실이니까. 심지어 기사도를 논할 자격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와 별개로 내 마음가짐을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한결같이 행동하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기이하게 뒤틀리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는 갑옷과 달리, 애들은 처음의 불편했던 분위기를 완전히 잊어버린 채 놀라움과 동경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대했다.
"우선은 저 사교도들이 타고 온 말로 대신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된 여정이 될 것입니다만, 승마는 익숙하신지요?"
"네, 네. 승마는 숙녀의 소양이니까요."
"실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평소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으신 결과가 이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군요. 그럼 모험가님? 곧 다른 두 분이 말을 끌고 오실 테니, 떠날 채비를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대답하는 갑옷에게 티 안 나게 눈을 흘기며 애들한테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마주한 것은, 거리를 둔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실리에와 경악하고 있는 센이었다.
"미친 씨발 세상에. 혹시 귀인은 이중인격입니까?"
"처세술이다. 처세술. 이중인격은 무슨."
딴 놈들이었으면 뒤통수라도 쳤을 텐데 자꾸 그림자 발이 생각나서 때리질 못하겠네 이거. 그래도 내 표정을 보고 정신을 차린 센은 내 뒤를 슬쩍 바라보며 빠르게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귀족입니까? 귀족 맞죠? 그렇죠?"
"귀족은 맞아."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센이었지만, 과연 쟤들이 저 마차와 말의 비용을 포함한 보상을 지불할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네.
"잠깐. 귀족'은'?"
아니나 다를까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을 반응을 예리하게 캐치해내는 센이었다.
"부유한 이는 귀족일 수 있지만, 모든 귀족이 부유할 수는 없는 법이지. 지금 쟤네 의상만 놓고 보면 그리 돈이 많지는 않을 거다. 정말로 베넥트 남작과 연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부분은 이제 나도 확신이 없다."
"으, 으아아...안 돼..."
어차피 오그웬까지의 여행길에 옷이 더러워질 수 있으니 여행용으로 쓸 헌 옷을 입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차피 나랑 연관없는 일이니 굳이 거기까지 말해주지는 않은 채 열심히 절망하는 센을 구경했다.
그런 내 곁으로 조용히 다가온 아실리에가 느닷없이 꽈악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응? 왜 누나?"
"...엘디는 기사 흉내 금지야."
"엥? 왜?"
"불안해서 안 되겠어. 그거 금지야."
뾰로통해져서 잔뜩 볼을 부풀리는 보기 드문 모습은 정말 귀여웠지만 이 비장의 한 수가 막힌다면 귀족들 상대할 때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기에 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실리에의 의지는 굳건하기 그지없었고, 난 검증된 사례를 언급하며 그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누나? 이건 제국에서도 입증된 완벽한 연기라니까? 거기 아카데미에서 내 연기에 심취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 학년 단위였..."
"그 이야기는 좀 자세히 들어봐야겠는데?"
"...어?"
눈치 없는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귀여운 반응이 질투라는 걸. 그리고 결코 보이는 것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결국 나는 기사 흉내를 내되, 여심을 자극하지 않는 형태로만 낸다는 두리뭉실한 맹세를 하고 나서야 아실리에의 투정을 멈출 수 있었다.
그게 대체 어떤 형태인지 모르겠다는 게 큰 문제로 남았지만, 일단 위기는 모면한 거 같았기에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