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도들이 타고 왔던 말들은 상당히 훈련이 잘된 상태였다.
처음에 죽은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도망친 놈조차 없을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정리가 쉬워졌다.
첫 만남이 마음에 안 들고 영 괘씸한 것과는 별개로 십여년간 손발을 맞춰온 파티인 건 사실인지 녀석들은 별다른 소통 없이도 알아서 손발을 맞춰가며 마차의 짐들을 말에 나눠 실었다.
둘만의 여행길에 끼어든 불청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실리에를 내 앞에 태워줌으로써 불만을 잠재우고 있는 사이 준비를 마친 센이 쫄래쫄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귀인님? 앞으로 여행길을 나서려면 아무래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간단하게나마 통성명을 하는 게 좋..."
"그건 니들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니 그냥 출발이나 해라."
"...지 않을까 잠깐 고민도 했었습니다만, 귀인 정도 되시는 분이면 굳이 필요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후다닥 멀어지는 센의 뒷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아실리에가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만만치 않은 풀링이네."
"저러니까 악마하고도 친구를 먹는 인간이 나온 거겠지."
하지만 한 짓거리가 있어서 딱히 정이 가지는 않았다. 산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것들이 통성명은 무슨 얼어 죽을.
추적자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놈들의 움직임은 여유로웠다. 꼬마애는 동생을 데리고도 정말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가끔 속도를 올리는 일이 있어도 뒤처지는 일 없이 잘 따라왔다.
그런 우리의 뒤쪽으로는 아실리에가 타고 왔던 말을 필두로 주인없는 말들이 열심히 달려오고 있다. 이 정도 부수입은 있어야 한다며 아실리에가 교감을 시도해 따라오게 만든 결과였다.
별다른 지시없이도 알아서 잘 따라오는 말들이 신기한지 남자애의 시선이 한 번씩 뒤로 향하는 거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이동을 몇 시간 정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귀인님! 이 근처 강가에서 묵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알아서 해라."
시큰둥하게 대답해도 쾌활하게 반응하며 움직이는 센의 존재는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다. 쟤가 없었으면 나머지 놈들은 죄다 눈치 보며 우물쭈물 거리기 바빴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아실리에게 말을 꺼냈더니, 바로 부정적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으음, 아닐걸. 저 풀링은 이미 동료를 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 종일 웃을 수 있는 상태일 거야."
"...정말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로군."
아실리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센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처음엔 우중충하게 쭈구리 상태를 유지하던 놈들도 점차 그녀에게 감화되기 시작한 것인지 나중엔 일단 살아남은 거에 감사하자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당히 자리 잡고 서로 알아서 모닥불을 피우며 식사 준비를 하던 중.
"저, 에, 에가 님. 식사 준비가 다 되어가는 중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갑자기 마법사년이 다가왔다.
우물쭈물하면서 다가오는 건 퍽 안쓰럽다고 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당연히 내 눈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너희랑 겸상하게 생겼냐?"
"......"
"너한테 각인 박기 전까지 거리감 좁히려 하지 마라. 마음 바뀌는 수가 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내 쪽으로 다가온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제안한 권유를 대놓고 차버리자, 녀석들 사이에 퍼져 있던 조금은 밝았던 분위기가 다시 침침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일을 마저 하는 사이 다시 자기 일행 쪽으로 돌아간 마법사는 쭈글거리며 식사 준비를 이어 나갔다.
솔직히 처음 저 꼬라지를 봤을 땐 궁상맞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밝은 분위기보다 저게 나은 거 같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지금은 저놈들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질 않네.
"풀링이 시켜서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진해서 온 거였나보네."
귀를 쫑긋거리며 정령의 도움을 받아 녀석들이 나누는 대화를 조금 주워듣던 아실리에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모한 건지 용기가 넘치는 건지."
그래도 꼴에 마법사인데 살려 줬으니 분위기를 풀 수 있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발상을 하지는 않았겠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는 쪽이 더 신빙성있을 것이다.
근데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살려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저건 그냥 이기적인 마법사년에 불과하다.
아직 남아 있던 샌드위치를 씹어 먹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에 엮이는 삶을 반추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는지 식사를 마친 센이 다시 쫄래쫄래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귀인님? 저희가 불침번을 정하려고 하는데요. 귀인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끼리만 불침번을 서고 두 분은 숙면을 취하시도록 하고자 하는데..."
다른 때였다면야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영하고 감사해야 할 배려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달가운 것만도 아니었다. 실상 가문을 건 센 말고는 믿을 수 있는 놈들이 없었으니까.
쟤야 자기 친구들이니 굳게 믿겠지만 난 상황이 다르잖아?
"아니. 불침번은 다 같이 돌아가면서 선다. 꼬맹이들 빼고."
"알겠습니다. 취침시간은 10시로, 기상 시간은 6시로 잡으려 하는데,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불침번은 2시간 씩. 초번은 아실리에로. 나는 2시에서 4시.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그리고 자다가 깨더라도 허튼짓거리 하지 말라 그래. 화장실 가는 거 아니면 딴마음 품는다고 생각할 거다. 무기는 밖에 꺼내두고. 마법사년 지팡이는 우리 쪽에서 관리한다."
"...네. 그럼 정해지고 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불침번은 초번이 가장 편하긴 해도 이렇게 되면 무조건 지들 중에서 2명은 그날 불침번에서 열외인 것이니 딱히 불만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실리에가 물었다.
"감시하려고?"
"당연하지. 풀링 말고는 아직 못 믿어."
아실리에는 잠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고, 나는 요즘 일찍 자면 무조건 새벽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에 잠에서 깬다. 그 정도면 최소한 쟤들이 밤중에 뭔가 수작질을 할 경우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피곤하겠지만, 일단 엮이기로 결심한 이상 그 정도는 감안 해야지.
◈
"역시 신뢰를 얻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온 센이 내뱉은 한 마디에 밤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고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후회가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가면 오그웬까지 4일은 더 걸릴 테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어. 그사이 어떻게든 힘 써 보자고!"
자신들이 뭔 짓을 했는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엘드미아 에가라는 남자는 철저하게 벽을 두고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감시할 뿐이었다. 분명 굳이 불침번을 자처한 이유도 그때문이리라.
그 불신이 쉽게 개선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는 건 자신들을 위해 큰 결심을 한 센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이 합을 맞춰왔기에 센과 풀링이라는 종족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문의 단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센은 신경 쓰지 말라고 웃어 보였지만, 정말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인간임이 분명했다.
물론 타인을 미끼로 도주하려던 발상도 제대로 된 발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은 초번은 엘프 분으로 정했어. 아실리에라고 하더라.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말번을 서는 편이 좋을 거 같아. 그래도 난 가문의 명예가 걸려있다 보니 조금은 믿는 눈치였거든. 다른 사람이 불침번을 서는 것보다는 편히 자겠지."
"그럼 두 번째는 내가 서지. 메르델라와 바이제는 오늘 고생 했으니까."
바이제라고 불린 중갑의 모험가는 칼스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메르델라는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오늘은 내가..."
"아니. 넌 좀 쉴 필요가 있어. 자고 일어나면 머리도 좀 개운해질 거다. 무엇보다 센의 말대로라면 마법사인 네가 불침번을 서는 것보다 별 능력 없는 내가 서는 편이 저 사람들의 숙면에 도움이 될 거야."
이미 생각해 두었던 정론을 펼치자 메르델라는 잠시 입 다물고 있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가까이 같이 모험가 일을 해 오면서도 이렇게까지 풀이 죽은 모습은 처음 봤기에 일행들의 걱정은 쌓여만 갔으나, 그렇다고 겉으로 티를 내봤자 역효과만 날 게 뻔했기에 그냥 암묵적인 동의 하에 입을 다물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우리. 무려 죽을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고, 진짜 며칠 만에 습격 걱정 없이 푹 잘 수 있잖아? 심지어 습격이 있다고 해도 더럽게 강한 전사까지 같이 있으니 지난번처럼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말이지. 안락함을 만끽하며 푹 자고 일어나자고."
자꾸만 가라앉는 분위기를 바로잡으며 웃는 센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일행들도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센의 끝없는 노력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은 분위기 속에서 개인 정비를 마친 일행들은 다음날을 위해 취침에 들어갔다.
그들에겐 너무나도 피곤한 하루였다. 눕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곯아떨어질 정도로 피곤하고 다사다난 했던 하루.
일행 중 가장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던 센은 부디 앞으로는 좀 순탄하게 흘러가길 기도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