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을 때 봐도 그리 정감 넘치다고 하기 힘든 괴한들은 어둠이 깔린 평원탓에 더욱 수상하게 보였다. 심지어 오늘은 달은커녕 별조차 보이지 않아 짙은 어둠이 내린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괴한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의복과 복면은 자랑스러운 종교의 상징이었으니까. 설령 그게 타인이 보기에 위압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일을 진행할 때는 그편이 좋을 때가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을 마주하고도 덤덤하게 반응하는 남자를 보며 괴한들은 긴장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등장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덤덤히 반응하는 자, 지나오면서 확인한 학살의 현장. 그들이 추적하는 존재 등등.
모든 이유가 어우러져 괴한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방금 그쪽에서 오는 길이죠.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시간대에 불빛 하나 없이 홀로 평원을 거닐면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괴한들을 보고도 태연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남자는 한술 더 떠서 당당하게 질문까지 던졌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어서 무리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물어보시오."
"대체 그 여자애가 뭐길래 그렇게까지 붙잡아다가 제물로 바치려는 겁니까?"
질문을 받아 준 이를 제외한 모두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검과 창을 뽑아 들었다. 겨우 저 말 한마디에 위협을 느껴서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물론 명령이 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협에 불과했다. 같이 동행한 사제가 기도문을 외우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굳이 막을 생각이 없다는 듯 선두의 남자는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질문이 아니었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명백한 위협. 그러니 어서 어디에 있는지나 말하라는 암묵적인 강요. 하지만 남자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마치 그들을 따라 하듯 허리 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든 것이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기울인 남자는 어쩐지 방금보다 좀 더 예의가 없어 보였다.
"질문의 좋고 나쁨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판단해. 여자애가 대체 뭐길래 제물로 바치지 못해 안달 난 거냐? 질문에 대한 반응을 보아하니 남자애는 그냥 덤인 게 맞는 거 같고. 굳이 걔가 아니면 안 될 이유는 대체 뭔데?"
"전혀 관계없는 이가 굳이 목숨까지 날려가며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 내가 판단한다."
평소라면 어쩌다가 미친놈과 엮였다고 여길 법한 상황이었으나 그런 거치고는 너무나도 제대로 된 반응과 당당함인지라 쉬이 무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주변은 몸을 숨길 곳 하나 없는 평원이었고 괴한이 느끼기에도 다른 누군가가 더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괴한을 짧은 판단을 마친 뒤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사람이 먹는 음식에도 수준이 있는 것처럼 신께 바치는 제물에도 그러한 격의 차이가 있을 뿐이오."
"결국 댁도 다 알지는 못한다는 거네."
"어찌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헤아릴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니, 이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려 줬으면 좋겠구려."
"그냥 내 뒤로 쭉 왔던 것처럼 달려가면 보여."
꾸밈없이 돌아온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했다. 그러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단창이 화살처럼 쏘아져 남자의 몸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경고는 이미 했다. 무슨 자신감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죽을 이의 그런 뒷사정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단창에 찔려 죽는 일은 없었다.
"아직 말도 안 끝났는데 지랄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빈손으로 투창을 잡아낸 남자는 기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살고 싶은 놈은 말에서 내린 뒤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한 놈만 살게 될 거니까."
이미 창을 받아 낸 시점에서 괴한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남자를 들이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보다 창을 쥐고 있던 남자의 오른팔이 흐릿해지는 게 먼저였다.
밤의 어둠 때문에 잠깐 착시가 일어난 것인가 싶은 찰나, 선두에 있던 괴한의 가슴팍을 뚫고 창날이 튀어나왔다.
"끄어..."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가슴이 뚫린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격통 때문이 아니라, 순식간에 파고든 남자가 펄쩍 뛰어 정확히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살려보낼 생각은 없으니 자기소개는 생략하마."
큰 덩치와 달리 가벼운 착지 뒤에 이어진 중얼거림을 듣고 나서야 괴한들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방금 목이 잘려 죽은 이는 가장 실력이 뛰어나서 지휘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 이를 기습으로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본능으로 하여금 위험을 알리는 경종을 울리게 만들었다.
"죽여!"
그럼에도 그들이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끈끈한 동료애나 같은 종교관을 가진 이들로서 품고 있는 유대감에 의한 것이 아닌, 수적 우세에 따른 판단에 불과했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기습으로 한 명을 죽이고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19명이었다. 심지어 말까지 타고 있으며 신성력을 지닌 사제까지 동행하고 있으니 기습에 대응하지 못한 건 실책이지만 질 경우는 조금도 상정하지 않았다.
"64번! 기도문을!"
그랬기에 두 번째 명령권을 지닌 괴한은 훈련 받은 진형으로 나눠 움직이는 동료들은 뒤로한 채 사제를 향해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를 위한 기도문은 불필요한 흔적이 남기 때문에 상급자의 명령이 없으면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평소라면 굳이 기도문의 도움을 받지 않았겠지만 대장이 순식간에 죽어 버린 탓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적이 한 명이라고는 해도 확실히 대비하려고 했으니,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알겠습니...!"
하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괴한은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했어야 했다.
"넌 살려주마."
그의 옆에서 바람이 불었다고 느껴지기가 무섭게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공격을 위해 달려드는 말들 사이의 틈을 비집고 튀어나오며 대각선으로 날아오른 남자가 이제 막 기도문을 외우려 했던 사제를 말과 함께 양단 해 버리기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가볍게 착지한 뒤 고개를 돌린 남자의 한쪽 눈이 감겨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느끼는 게 고작이었다.
"불!"
누군가가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시전자가 죽자마자 신성력으로 타오르던 빛의 구체가 꺼지며 어둠과 절망이 내려앉았다.
"말에서 내려라!"
"젠장! 불 켜! 횃불! 횃불을 꺼내!"
"흩어져야...아아악!"
눈앞에서 일렁이는 빛무리가 착시와 함께 두려움을 일으키고,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가 전염된 탓에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날뛰는 말들이 자아내는 소음이 냉정한 사고가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순식간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이점들을 잃어버린 괴한들 중에서 침착하게 반응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사제와 거리가 떨어져 있던 소수의 인원들 뿐이었다. 그들 역시 갑자기 내린 어둠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아비규환에 빠지기 직전인 동료들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목청 껏 외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은 하나다! 침착...!"
"창은 내려놔라! 검을 들어! 동료와 등..."
"비, 빌어먹을! 도망쳐! 도망...!"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외침을 끊어내는 파공음과 피 튀기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해해서 문제였다.
적은 이 어둠 속에서 명령을 내리려는 이의 '목'을 정확하게 베고 있다. 그걸 깨달은 이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피해 가는 건 아니었지만, 입을 다물어 버린 그들이 그 사실을 공유할 방법은 없었다.
"시, 신이시여! 대체 어째..."
하필 사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똑바로 빛을 마주 보며 명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시야가 회복되지 않은 괴한은 그 모든 상황을 청각과 후각으로 받아들이며 공포에 떨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남자가 남긴 한 마디가 무슨 의미였는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것 같다는 두려움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숨조차 참아가며 불안에 떨던 괴한은 더 이상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 수 있었다.
"...67번?"
시야는 아직도 제대로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다. 괴한은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합리함과 짜증을 느꼈으나, 현실은 달랐다.
"...52번?"
적응이 늦은 게 아니라, 어둠에 적응하기 위한 그 짧은 순간보다 빠르게 죽음이 내린 것이었다. 괴한은 그 뒤로도 그들을 지칭하는 듯한 숫자들을 더 입에 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심지어 습격자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들리는 거라고는 살아남은 말들의 투레질 소리뿐이었다.
"...제발. 누가...대답 좀...."
방금 전까지 풀 내음밖에 나지 않던 평원은 이제 혈향만이 가득했다. 괴한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명백한 우위라고 여긴 모든 게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괴한은 결국 제대로 말 위에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 번호는 뭐냐?"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충격이 그를 엄습하고, 말이 도망치기 시작했음에도 괴한은 일어나지 못했다.
"신이시여...신이시여..."
그의 중얼거림만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던 그때, 저 앞에서 불꽃이 일렁이며 생겨났다.
사제가 보여주던 청아한 푸른빛의 구체가 아니었다. 그저 대기를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붉은 불꽃에 불과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그 작디작은 불길은 본디 평범해야 했지만, 그와 동시에 모습이 드러난 남자와 겹쳐진 탓에 너무나도 불길하게 다가왔다.
"참 신기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사교도인데... 정작 어지간한 놈들보다 예의 바르고 신실하다는 게 말이야."
어둠 속에 내려온 죽음이 평원에 홀로 선 채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