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 이어진 여행길은 놀랍도록 개판이었다.
첫 지랄은 야영지를 떠나고 4시간 만에 도착한 돌다리였다. 그냥 적당히 쉬는 것처럼 돌다리에서 뭉쳐 있는 열댓 명의 남정네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우리에게 말을 건 순간 난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어이, 형씨들. 여기서부터는 통행료를 내야 지나갈 수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행동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옛날에 읽었던 소설들 보면 핸드폰도 없는 시대에 명성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던데, 정작 나는 지천에 널린 돌다리에서 삥이나 뜯으려는 돌대가리들조차 알아보지 못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덕분에 식상한 클리셰가 왜 식상한 클리셰인지 뼛속까지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했다.
"흐, 흐흐. 오늘은 특별히 그 엘프만 놓고 가면 봐주지."
세상에는 날강도 새끼들이 너무 많다.
"야, 센."
"네, 넷! 엘드미아 님!"
"저 좆 같은 새끼들 치워."
심기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던 내 감정 상태를 캐치한 것인지, 센이 말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추잡하게 웃어 보이던 도적놈들 사이로 단검을 투척했다.
상황 파악 못한 두 도적놈들 눈알에 단검이 박힘과 동시에 센이 외쳤다.
"야이 개새끼들아아악!"
지시는 센에게 했지만 움직이는 건 전부 다였다. 칼스와 바이제는 그대로 말의 박차를 가하며 들이 받아버렸고, 메르델라는 센이 뛰어내림과 동시에 영창을 시전하며 그들을 보조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싸움이라고 할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좀 있어 보이는 척 무게잡고 서 있던 놈은 내 말에 센과 다른 녀석들이 튀어 나가는 걸 보고 귀신 같이 도망치다가 아실리에의 활 한 방에 다른 놈들을 따라가 버렸고, 나머지는 그냥 강도다운 수준이었다. 너무나도 부질없는 수준이라 싸울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애들도 있는데 말이 그게 뭐니.'라며 앞에 타고 있던 아실리에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찰싹 때린 게 내가 받은 유일한 피해였다.
두 번째 지랄은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숲속에 자리를 잡고 야영지 구성이 끝날 무렵, 돌다리에서 살아남은 강도들이 어디선가 패거리를 끌고 온 것이다. 요즘은 10명 죽으면 20명이 몰려오는 게 유행인지 얼추 그 정도 인원들이 우리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씨발, 이번에야말로 너흰 뒈졌어."
소문은 더럽게 안 퍼지는 주제에 살아남은 날강도 놈들이 다른 패거리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내는 건 어찌 그리 쉬운 것일까. 정신적인 피로감이 몰려와서 이번엔 내가 움직이기로 했다. 역시 이런 놈들은 아무리 귀찮아도 직접 처리해야 뒤끝이 없는 법이다.
최근 그래도 나름 칼 좀 쓴다는 녀석들하고 싸워서 그런가, 이젠 이런 상황이 마냥 귀찮기만 하다.
"나는 엘드미아 에..."
그때, 예상치도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으, 으아악! 엘드미아 에가다!!"
무려 날 알아보는 놈이 나타난 것이다!
"씨, 씨발!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심지어 한 둘도 아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쪄있는 일행들을 뒤로한 채 주변을 둘러보니 은근히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놈들이 많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렇게 경악하던 한 놈과 눈이 마주치니 녀석은 무기까지 내던지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 같은 새끼들! 좆 같은 새끼들! 뒈질 거면 너희끼리 뒈져!"
"난 하지 말자고 했어요! 난 아니야! 아니라고!"
"뭐, 뭐야?! 쟤들 왜 저래?!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좆까아아아!!"
이어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탈주의 행렬. 스무 명이 순식간에 반절까지 줄어드는 광경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뒤늦게 실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남아 있는 놈들은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줄행랑을 치는 놈들을 멀뚱히 바라보던 센이 상황에 맞지 않게 온화한 웃음을 터트리는 아실리에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질문했다.
"대체... 뭘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숙원 추구."
합당한 설명이라 여겼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삼 일째 정오가 될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의 시야 끄트머리에 오그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젠 진짜 도시로구만."
한창 공사 중이던 성벽은 대부분 마무리가 지어진 상태였다. 언덕에서 보지 않았으면 모를 정도로 일부만 남은 것으로 보아 완공이 머지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엘드미아 님은 오그웬을 잘 안다고 하셨죠?"
"글쎄? 잘 아는 건 모르겠는데 아는 건 맞지. 이젠 그마저도 잘 모르겠다만."
오그웬을 떠나기 반년 전만 하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던 도시였다. 지금은 또 얼마나 바뀌어 있을지 감도 안 온다.
그래도 꼴에 고향이라서 그런가 당장 뒤에 성광십자회의 성녀 후보가 있고 정신 나간 사교도들이 칼을 갈고 있을 상황에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바뀐 건 성벽 뿐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관문에 들어가기 위한 행렬이 존재했고, 영지 내의 건물들은 묘하게 오밀조밀하다. 이 동네에 뭐가 있긴 한 건가 싶지만 혹시 모를 노릇이다. 어디에 던전이라도 잔뜩 생겼을지 누가 알겠어?
"오그웬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야 하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네."
"애늙은이 같아, 엘디."
"성숙한 거죠 선생님."
타지도 않는 말들을 잔뜩 끌고 왔기 때문일까. 우리는 행렬 끝에 줄을 선 뒤에도 상당한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어쩌면 묘한 파티 구성이 원인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줄이 줄어드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바라본 관문에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이네?"
알리샤 여사님의 여관에서 키운 간판 소녀 중 하나인 레미리에게 푹 빠져 있던 20대의 순박한 경비병이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얼굴로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군기가 빠져가지고 늘어져라 하품이나 하며 투구도 벗은 채 후임으로 보이는 이에게 검문을 짬 때리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딱 봐도 대체 어디까지 행렬이 이어지나 지겨운 눈초리로 훑어보던 알렉의 시선이 천천히 앞의 행렬을 지나 내 쪽으로 다가왔을 때, 난 덤덤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처음엔 갸웃거리던 알렉이 두 눈이 곧 커지더니 열심히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엘드미아! 더 커졌다?"
"간만에 보자마자 한다는 인사가 겨우 그거야 형?"
"짜식아. 원래 반가우면 이딴 말밖에 안 나오는 거야! 어? 근데 어떻게 아실리에 씨랑 같이?"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됐어. 이번에 온 것도 짐 정리하려고 온 거야."
"뭐?! 수도에 집을 산 거냐?!"
내 집 마련의 꿈은 판타지 세계라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군.
"그건 아니고, 일이 정리돼서 같이 다니기로 했거든."
"허어. 레비가 사실 귀족이었네 뭐네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다만... 잘 정리된거지?"
"어. 좋게 좋게 끝난 거야. 걱정 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아서 마치 자기 일처럼 위축됐던 표정이 해맑아지는 알렉이었다.
"다행이야 다행. 아, 그보다 이 형님이 너한테 알려줄 굉장한 사실이 있었지!"
"레미리랑 사귀는 거?"
"나 레... 엥? 어떻게 알았냐?"
"레미리가 그 좋은 소일거리 다 팽개치고 형네 가게에서 일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던 건 아마 형 혼자가 아닐까?"
최근에야 내 눈치가 절망적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알렉보다는 낫다. 어어? 거리며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알렉을 놀리는 사이 관문에 도착한 우리는 지인의 힘으로 프리 패스 입장을 하게 됐다.
"그래도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야! 좀 머물다가 갈 거지?"
"길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삼일 정도는?"
"에이, 바쁜가보네. 간만에 왔으니 나중에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아, 여행자 분들은 꼭 모험가 길드에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요즘 치안 강화 주간이라 꼼꼼하니까요."
"아, 예. 감사합니다."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알렉을 뒤로하며 들어선 도시 내부는 겉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익숙했다.
"어?! 엘드미아!"
"밀레나 누나 오랜만! 가게 위치 바뀌었네?"
"어머 어머 세상에! 아니, 이 정 없는 녀석아! 좀 멈춰!"
"지금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안 돼. 나중에 인사 한번 싹 돌릴게!"
어느새 위치가 바뀌고 좀 더 커진 밀레나의 가게를 지나고.
"뭐야? 엘드미아잖아?"
"아저씨가 싸게 준 검 잘 썼수다!"
"뭐? 왜 과거형이야? 야! 얌마!"
"흐하하! 변경의 오그웬 대장장이 한스의 롱소드! 수도 드워프 장인의 롱소드로 대체 되었다!"
"뭐?! 드워프?! 야, 야! 이 녀석아! 검은 보여주고 가!"
한결 같이 대장간 앞에서 번쩍이는 머리에 빛을 쬐어주는 한스를 지나 거리를 살펴봤다.
익숙한 얼굴. 사심 하나 없는 반가움의 연속. 딱히 기억하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았음에도 도착과 동시에 기억이 샘솟는다. 이런 환대의 분위기를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센 일행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시선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퍽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말을 몰고 몰아 도착한 곳은 이제는 보육원이 되다시피 해 버린 알리샤 여사님의 여관이었다. 말을 멈춰 세우고 확연히 달라진 건물을 보고 있자하니, 내 얼굴을 모를 거 같은 꼬맹이들이 갑자기 몰려온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많구만.
"여기서 남쪽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성광십자회 신전 나온다. 가서 너희 일 해결하고, 모험가 길드에 눈도장 찍고 여기로 돌아와라."
"네? 성광십자회요? 거긴 왜..."
"벨레시카 아가씨의 가족이 거기 있을 테니까."
무사했다면 말이지. 머리 위로 물음표가 생성되는 녀석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 말에 토를 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같이 안 가시나요?"
하지만 벨레시카는 조금 토를 달았다. 아무래도 불안한 눈치였기에 난 조금은 달래는 어조로 설명해줬다.
"전 어디까지나 제 3자의 입장이니까요. 물론 이렇게 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제 일을 먼저 적당히 정리하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방문하겠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애셜 사제님이라고 계실 겁니다. 엘드미아 에가가 그분을 만나뵈라 했다 말하면 다른 사제분들이 안내해주실 겁니다. 누구보다도 신실한 분이시니 믿으셔도 됩니다."
신실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다던 성전에도 참여했던 베테랑 성전사다. 애당초 오그웬에 있는 성광십자회 사제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우선 소개시켜주는 게 낫겠지.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벨레시카는 안심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멀어져가는 일행들과 말들을 바라보던 아실리에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성광십자회?"
"쟤 성녀 후보일지도 모른대."
"...아하. 그래서..."
겨우 그 말만으로 상황을 이해한 아실리에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정말 어딜 가도 사건에 휘말리네.' 라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