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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99화 (199/412)

사교도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 이후에 이어진 것은 오는 동안에는 하지 않았던 간단한 자기소개였다.

물론 그래 봤자 당장 녀석들에게 별 관심도 없는 마당에 내 뇌용량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아실리에에 대한 정보를 줄 필요도 없었기에 자기소개는 나만 하게 됐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지금은 마을의 원수 놈 목을 따기 위해 수련 중이고, 너희가 경험했듯이 날 두고 장난치려는 짓거리에 발작을 일으킨다. 중요한 거니까 잘 기억해 둬라."

차마 지들이 한 짓거리를 입에 담긴 힘들었는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칼스가 추임새를 넣었다.

"...마을의 원수요?"

"나 어릴 때 우리 마을 다 박살 내고 튀라고 명령한 마왕군 지휘관 놈. 그놈 잡아 죽이려고."

여덟 개의 눈동자가 격렬히 움직이며 자기들끼리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딱 봐도 미친놈으로 여겨야 할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굳이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사족을 덧붙이기엔 이어진 센의 반응이 더 빠른 것도 있었고.

"어, 그럼 동부 출신이신 겁니까? 워낙 이 도시 분들과 친해서 전 영락없이 이쪽 출신이신 줄 알았는데."

"아니. 난 여기서 서쪽으로 좀 더 가는 곳에 있었던 이름없는 마을 출신이다."

"...예? 하지만 방금..."

"마왕군 최초 침공은 동부가 아니라 우리 마을이었거든. 7년 전 일이지."

의외로 많이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했는데 얘들은 그런 정보에 취약한 건가? 라고 생각하는 찰나, 묘한 반응과 함께 메르델라가 질문을 던졌다.

"분명 최초 침공이라고 듣긴 했는데 생존자가 없다고..."

"아,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겠네. 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생존자다. 오그웬에서 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

".....어, 죄송한데. 혹시 그럼 지금 나이가...?"

"15살."

"...에?"

"15살이라고. 왜? 어린놈이 지금까지 면박 주고 반말해 왔다고 생각하니 꼽니?"

"즈언혀 아닙니다! 하하하! 그저 상상도 못한 나이인지라 순간 저도 모르게 굳어 버렸네요. 아하하하!"

"아닌 거 같은데? 순간 욱한 거 같은데?"

"에이! 농담도 참!"

어떻게든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센과 달리 다른 녀석들은 여러 의미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놀란 모습이었다. 검과 내 덩치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오락가락하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죽을 뻔한 거 살아남았으니 저러는 게 당연하지.

그 뒤로는 대충 녀석들이 다음 날 취해야 할 행동들을 미리 지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 봤자 몇 시까지 성광십자회로 와라 정도로 약속 시간을 잡은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와 아실리에가 여관 문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맥주를 주문하는 센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심히 꿀밤이 마려웠지만 일단 넘어가줬다.

"참 미묘한 애들이야."

"응? 뭐가?"

"불의를 쉽게 넘기지 못하면서 은원 관계도 확실히 구분지을 줄 아는 거 같은데... 왜 우리를 만났을 땐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그냥 죽을 거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거 아니야?"

"흐응, 목숨이 아까웠다면 벨레시카라는 아이를 구하는 시도조차 안 하지 않았을까?"

별생각 안 했던 부분인데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냥 수단과 방법을 취하는 부분에서 모험가 평균 인성이었다고 단정 짓지 못할 것도 없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하나 정도는 이유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딱히 관심이 가지도 않는 영역의 문제였기에 난 대충 지껄였다.

"오히려 평균 이하의 인성이었는데 성녀님이 무의식중에 감화시켜 강제로 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심히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네."

"성녀 한 번 구해줬으니 그 정도는 봐주실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공정한 천칭의 뤼비스카 님."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성광십자회의 기도 자세를 취하며 성의없게 중얼거리자 아실리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면 엘디는 옛날부터 묘하게 신실했지. 딱히 신에게 뭘 바라거나 의존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부분에서 기도는 꼬박꼬박하고 말이야."

"신전 한번 제대로 안 들르고 불특정 다수의 신들께 기도나 올리는 행동으로 퉁치는 걸 신실하다고 하기엔 많은 문제가 있을 것 같지만, 거기엔 전생부터 이어져 온 깊은 사연이 있지요."

"네, 네. 그러시겠죠. 그것도 엘드미아 찬스니?"

"어허. 그게 언제적인데 아직도 기억해."

아실리에와 이렇게 관계가 이어질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나름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자 현자 타임 오는 것도 참아가며 가끔씩 해왔던 어린애 흉내들이 주마등마냥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다.

하...씨발. 언젠가 전생했다는 걸 말해야 할 날이 무조건 올 거 같은데 무슨 얼굴로 마주해야 하냐 진짜.

"엘디하고 지낸 시간이 다 추억인데 기억을 못할 수 없지."

"...선생님? 제가 반 토막만하던 시절을 기억하면서도 제게 애정공세를 하시면 세간에서는 아동..."

"화낸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굉장히 확고한 의사가 담겼기에 주둥이를 다물기로 했다. 후, 잘못된 농담으로 인생에 큰 스크래치를 남길 뻔했군.

대신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재빨리 팔짱을 끼며 손을 맞잡자, 나쁜 판단은 아니었는지 아실리에는 금세 표정을 풀고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잘못된 농담으로 분위기를 다 조져 버리는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알리샤 여사님의 보육원으로 향했다.

엘드미아가 아실리에와 함께 자리를 떠난 뒤.

호쾌하게 맥주를 시킨 센과 달리 다른 이들은 눈앞에 놓인 맥주를 두고도 쉬이 손을 옮기지 못했다.

"...15살? 그 실력에?"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건 하나였다.

"나 어쩌면 인생 헛 산건가...?"

"에이. 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시나! 맥주나 마셔. 김 빠진다!"

호쾌하게 웃으며 무사 귀환을 축하하고자 홀로 건배하고 맥주잔을 기울인 센도 내심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처럼 실력에 자괴감을 느껴서가 아닌,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간 나이 때문이었기에 웃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엘드미아가 굳이 자신들이 당황하는 꼴을 보기 위해 나이를 속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을 당황하게 만들려면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들이 있는 상황이니까.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살펴보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큼지막한 덩치와 근육 그리고 서른 먹은 용병 같은 거침없는 언행에 가려졌을 뿐이지 그의 얼굴은 날카로움과 별개로 꽤 앳된 감이 없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동안이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노안이었을 뿐.

사실 노안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워낙 분위기가 압도적이라서 그렇지. 5년 뒤에도 저 얼굴일 가능성이 높은 게 인족이다.

'그래도 최소한 18살은 됐을 거라 여겼는데 말이지.'

언행. 실력. 판단력. 과감함.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 천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라던데,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라는 말과 참으로 맞물리지 않는 격언인 거 같았다.

다른 이들처럼 허무감을 느끼진 않았다. 풀링 자체가 워낙 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 축하하는 방향으로 특화된 종족인 탓도 있지만, 세상엔 너무나도 큰 격차를 보이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천재가 한둘이겠어? 오히려 그런 사람이랑 마주쳐서 살아남은 걸 감사히 여기고 축하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니까 그러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인 정도가 아니지. 당장 생각해 봐라. 만약 우리가 마주친 게 진짜 그냥 평범한 모험가랑 엘프였으면 어땠겠어? 운 좋게 10명을 처리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났어도 부상은 피할 수 없었을 걸? 그 상태로 뒤에 따라온 20명을 또 만났다? 맥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도적놈들 오줌이나 처맞는 시체 꼴로 있었겠지."

시니컬한 입담임과 동시에 지극히 냉철한 현실이자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되도않는 자기혐오에 빠지려는 동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거에 감사하라. 딱 지금 우리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잖아?"

"정말 그럴까...? 난 적어도 저 사람이 마왕군 지휘관을 죽이네 마네 하는 말이 농담같이 들리진 않던데."

"그게 왜?"

칼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센은 그가 무슨 말을 입에 담으려 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를 화살막이로 쓸까 봐?"

"...그렇지."

"아닐걸."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왜?"

따지기보단 진심 어린 의문이 담긴 한 마디였다. 마음 같아서는 탁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두고 의자를 기울이고 싶었으나 장신족 위주로 만들어진 식탁 때문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만족한 센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어제 도적놈들을 떠올려 봐. 첫 번째는 나보고 다 치우라고 했던 사람이 왜 밤에는 자기가 직접 일어났을까?"

"...귀찮아서?"

"크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국 일의 해결은 자기가 보는 성격이라서 그랬던거라 생각해."

십수년간 함께 해온 동료들의 시선이 한데 모이는 것을 확인한 센은 천천히 자신의 가설을 입에 담았다.

"무려 이 지천에 널린 도적놈들 중 일부가 얼굴만 보고 도망쳤다고.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 외쳤던 것도 그렇고, 엘드미아 님이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예상하기로 그 이유는 도망친 도적놈들 그 자체고."

"...뭔 소리여?"

"자기 건드리지 말라고 온 동네에 소문내는 게 목적이라는 거지."

도적들의 반응. 예의를 갖추는 대상에게 예의로 대하는 태도. 도망치는 도적들을 보고 미묘한 만족감을 내비치던 얼굴.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장난질을 치려면 발작을 일으킨다는 적나라한 표현까지.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 먹을 것이 넉넉치 않은 애들은 식탐이 많아지고, 항상 물려받기만 하는 막내는 자신만의 물건을 가지고자 하는 소유욕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지. 15살? 아까 그 말에 거짓이 없다면 마을이 몰살 당했을 때 저 사람 나이가 8살이었다는 소리야. 감이 와?"

난 8살 때 뭐 했더라. 옆집 친구랑 그네 가지고 싸웠던 거 같은데. 오래돼서 이젠 잘 기억도 안 나는 시절이었다.

"...상실에 대한 보상 심리로 과도한 자기방어 기제가 생겼다는 거야?"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표현 고상한 거 봐. 맞아. 근데 마냥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머리까지 쓰는 거지. 그 실력에 도적들이 마주쳤으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부러 살려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걸."

누가 봐도 극도로 단련한 육체였다. 그건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재능일 수도 없다. 철저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는 이유도 확실하지만 살리는 이유도 확실해.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건 목숨을 걸고 유용함을 피력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고, 엘드미아 님은 그걸 수용하기로 마음먹었지. 앞으로 우리하기 나름일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살려놓은 손패를 냅다 던질만한 인물도 아니야."

오히려 두고 두고 써먹기 위해 딱 능력에 맞는 선에서만 요구하겠지. 그 이상은 기대조차 안 할 것이다. 그러니 어젯밤에 다시 돌아온 도적들을 보고 직접 나서려고 했던 것이고.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앞으로 우리가 허튼수작만 안 부리고 꾸준하게 호의로만 보답해서 첫 만남에 보여줬던 행동을 만회할 만큼 신뢰를 쌓는다면 말이지."

"...그게 왜 기회가 되는데?"

"메르델라가 말한 '자기방어 기제'가 자기 몸뚱이 하나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적용될 테니까."

엘드미아는 부모의 원수도 아니고 마을의 복수라고 했다. 그는 마을 사람 전체의 원한을 갚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당장 아실리에 님한테 누가 손찌검이라도 하면 모가지가 잘려 나간다에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어. 마을 사람들 중에 그와 깊은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걔들은 그걸 평생 후회하거나 후회할 틈도 없이 죽을 거고. 날 믿어. 우린 지금 굉장히 괜찮은 상황이야. 좀... 무서울 뿐이지."

웃어라. 그러면 대부분은 친구가 될 수 있다.

풀링의 오랜 격언을 떠올리며 센은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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