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샤 여사님의 저녁상은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처음엔 당연히 보육원 애들이 많아져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점점 음식이 많아지며 어째 외부에서도 점차 사람이 몰려오더니 나중에 가서는 얼굴 좀 봤다하는 사람들은 죄다 와서 건물 밖에 테이블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알리샤 여사님을 보고 나서야 이게 그녀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 음식을 그사이에? 누가 보면 내가 올 걸 한 삼일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오해할 수준이다.
"발쿤?! 연금장이 발쿤?! 이게 그 발쿤 님께서 만드신거라고?!"
"옘병? 쟤 왜 저래?"
"엘드미아가 차고 있던 검이 더럽게 좋은 거라던데?"
"허어. 난놈인 줄은 알았지만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걸 차고 다닌댜? 대단하네."
눈이 돌아갈 기세로 발광하는 한스를 진정시킬 엄두가 나지 않아 방치했더니 진짜 검신을 핥을 기세다. 발쿤 씨가 저렇게까지 반응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충분히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한평생 본 적 없는 한스의 저런 광기 어린 반응이 더 놀라울 정도다.
사실은 긴 씨도 엄청 대단한 인물인 게 아닐까? 뒤늦게 모험가 일 시작했다는 거보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같기도 하다. 뭐 그런 장생종이 한둘이겠냐마는.
마음 같아서는 징그러워서라도 당장 한스에게서 검을 빼앗아 오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난 지금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한스에게 시선을 빼앗길 수 없는 입장이다.
"형! 형이 정말 하늘에서 뛰어내려서 비룡을 잡았어요?"
"형이 발차기 한 번 하면 사람이 날아간다는데 정말이에요?"
"오빠! 정말 여기 있던 언니가 공주님이었어요?"
"형! 수도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이 미래의 모험가 꿈나무 같은 꼬맹이들이 두 눈을 빛내며 나에게 질문 폭격을 시도하고 있다 보니 맨정신을 유지하며 대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세상에. 수도 사람은 어떻게 생겼냐니? 내가 모르는 얼굴인 거보면 지도 오그웬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지가 살던 동네 사람들과 오그웬 사람들은 생긴 게 다르기라도 했단 말인가?
결국 호언장담하며 보육원을 떠났던 오전과 달리 난 괜히 저녁 얻어먹겠답시고 돌아왔다고 후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게 후회한다고 한들 애들이 날 놔줄 리 없었고, 결국 난 최대한 애들을 진정시키며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적당히 설명해주는 과정을 거친 끝에 겨우겨우 식사에 입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스튜가... 식었어...!"
안 그래도 괜찮았던 옛날보다 훨씬 질이 좋아진 스튜라서 사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기에 그냥 먹으려 했더니 굵직한 손이 그릇을 덥썩 집고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스튜로 바꿔 주었다.
"누나..!"
"지랄말고 처먹어."
하여간 한결같다니까.
그릇을 들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속으로 감사해하며 식사를 시작하자 내가 애들에게 고통받는 것을 즐기던 아실리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겨우 2년도 채 안 지났는데 다들 참 극성이란 말이지."
"누가 아니래. 누가 보면 촌장 아들이 기사 작위라도 달고 온 줄 알겠어."
"근데 엘디가 이곳에서 잘 지내 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보기 좋아."
전혀 이해 못 할 방식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아실리에였다. 그래도 좋다니 별수 있나. 앞으로 어딜 가도 이럴 수 있도록 노력할 수밖에.
"알리샤가 오늘은 자고 가라고 한 덕에 여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점 덕분에 더 마음에 들지도."
"막 마실 수 있으니까?"
"그렇지."
생각해 보면 아실리에는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대체 뭔 수로 거의 입에도 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
"하긴. 누나는 술 좋아하는 것에 비해 막 마실 기회는 얼마 없었구나."
"누가 보면 내가 항상 술독에 빠져 살고 싶어 하는 줄 알겠다 얘. 술을 좋아하는 건 그냥 부족 특성이거든."
"누나네 부족? 푸른 넝쿨?"
"응. 우리 부족은 북쪽 지방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설산 아래에서 대부분 춥게 지냈거든."
참고로 이티스엘의 북쪽 지방엔 설산이라는 게 없다. 그러니 지금 아실리에가 말한 북쪽이라는 건 대륙의 북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륙으로 쳤을 때 이티스엘은 거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지. 세상에, 더럽게 먼데?
"누나 부족 관련해서는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어서 생소하기 그지없는 정보네. 대륙 북쪽? 러빌?"
"러빌 사람들이랑 좀 가깝게 지내긴 했지. 그래도 말이 가까운 거지 영토가 겹친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그들은 좀 더 위 쪽에 살았으니까."
"그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어?"
내가 주워 들은 것만 놓고 보면 대륙의 북쪽은 거의 지구의 북극같은 취급이던데.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었던 것인가 싶었는데 소리내어 웃어 보이는 아실리에를 보아하니 상당한 과장이 섞여있었나 보다.
"기본적인 걸 다 하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돼. 물론 이티스엘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추위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나누지 않았다는 점에 새삼 감탄했다. 긴 시간 동안 정말 적지 않은 대화를 하고 지냈음에도 아직은 모르는 게 많구나.
"언젠가 가보고 싶네."
"후후. 그래. 엘디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꼭 가 보자."
아무래도 한동안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이야기하며 지내야 할 거 같다.
◈
한바탕 계획에도 없던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실리에는 고통받고 있었다.
"우욱..."
"나 누나가 숙취로 고생하는 거 처음 봄."
계속 홀짝홀짝 마시더니 기어이 숙취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 사람들이 의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축하주를 자꾸 줘서..."
변명같지만 놀랍게도 변명이 아니었다.
한스의 호들갑과 더불어 내가 말을 잔뜩 끌고 왔다는 것, 라그니스의 일도 무사히 잘 정리 되었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모험가 같은 사람들을 시종마냥 끌고 왔다는 목격담까지 섞여 들어가자 사람들은 진짜 내가 수도에서 엄청 잘 나가고 있다고 여기며 밑도 끝도 없는 축하를 건넨 것이다.
그리고 그 축하는 대부분 날 기르다시피 한 아실리에에게로 넘어갔다. 정말 잘 키웠다면서. 거기에 진짜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아실리에는 넙죽넙죽 다 받아 마셨고.
지레짐작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물론 진짜 문제는 기쁘다고 그걸 다 받아마신 누나한테도 있지만."
"허윽...!"
너무나도 생소한 모습에 순간 '엘프의 토는 무지갯빛이라던데 정말이야?' 라고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으나, 어제 이미 분위기를 한 번 작살낼 뻔한 농담의 전적이 있었기에 입 다물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은 좀 쉬고 있어. 어차피 별문제 아니니까."
"으으... 그럴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토할 것 같다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아실리에를 두고 보육원을 벗어난 건 아직 새벽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안개조차 제대로 개지 않은 거리는 가시거리 확보가 쉽지 않은 수준이라 말은 그냥 두고 가기로 했다. 나야 그냥 몸에 익은 대로 찾아가면 그만이지만, 이 정도면 무방비하게 걷다가 말에 치이는 사람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으."
오싹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오싹거리는 기분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짐에서 오는 오싹함. 내가 느끼는 기분이 뭔지 확실히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동시에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그웬의 아침 거리를 걸으며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감성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5년 가까이 오두막과 오그웬을 오고 가면서 도시 자체에 이렇게까지 정이 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나에게 고향이란 숲속에서 아실리에와 함께 살았던 오두막이었고 잔해밖에 남지 않은 마을뿐이었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집중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생기는 법인 건가."
제국에서 에스뮈에가 해줬던 조언이 새삼스레 와닿는다. 난 나름대로 자의적인 판단 아래 쥘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나쁘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뭘 잃으면 안 되는지 알게 된 거니까.
감상에 젖어 느려진 걸음을 서두르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성광십자회로 향했다. 가면서 어제의 정신없는 저녁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마주치며 틈틈이 인사도 나누다 보니 순식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치 신전 앞을 지키는 거석과도 같은 인물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엘드미아."
"...설마 저 오는 거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애셜 사제님?"
"넌 약속 시간은 항상 똑부러졌으니 말이다."
나만한 키. 나보다 1.5배는 넓을 듯한 어깨와 덩치. 금방이라도 '이 불경한 자가!!!'라고 외칠 것만 같은 각지고 근엄한 얼굴.
성광십자회의 전투 사제 애셜은 그런 위압감 넘치는 외모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 오거라. 이번에 너한테 아주 큰 신세를 졌구나."
"왜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벨레시카를 구한 건 모험가들인데."
"어설픈 녀석 같으니. 모험가들만 입단속 시키면 뭐 하느냐?"
"...아!"
하이고 씨발! 벨레시카와 스노왈한테는 아무 말도 안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