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순식간에 작성됐다.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형태이자 히스예나 신전장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형태로 말이다.
"성의라...제가 쓸 때는 참 편한 단어였는데 말이죠."
구체적으로 제시한 건 그동안 신전이 축적해온 마족에 대한 정보와 전투 경험. 차후 어느 지역에 있는 성광십자회의 신전에 들르더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징표의 발급 정도. 나머지는 성광십자회가 성녀라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알기에 '성의'만 표현해 달라는 내용.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좀 더 얹어 줘야 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성녀 암살 혐의라는 대사건을 두고 신실한 신자로서 취해야 하는 마땅한 자세라는 게 있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 영 탐탁지 않을 거다. 갑에게는 좋고 을에게는 더럽게 귀찮은 게 바로 '아무거나'니까.
"이미 성녀님과 관련된 신전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다른 걸 요구하지도 않은 것만으로도 제가 보일 성의는 다 보였으니까요."
한 교단의 치부를 알게 된 것인데 이 정도면 사실 엄청 싸게 쳐준 거지. 당장 라그니스나 에스뮈에에게만 귀띔해 줘도 골수까지 뽑힐 문제다. 아니지, 에스뮈에면 하나부터 열까지 입맛대로 뜯어먹고도 남을 걸? 상대방이 적당히 챙겨주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할 말 없는 조건이라는 것부터 이미 나의 성의를 다 뽑아낸 것이다.
원래 무보수로 하려고 했던 일에 추가 보수가 붙는 격이다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수준이라 대충 협상하는 것도 있지만... 어차피 얻고자 한 것들은 확실히 명시해놨으니, 성광십자회 평균 인성이 어떤 수준인지 알아볼 기회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
"지극히 타당하군요. 너무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것들로 준비해 보죠. 그 외에 사교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른 도움이 필요한가요?"
"혹시 악마한테 잘 통하는 소비품이라던가 그런 거 있습니까? 사교도들이 백 여명 정도 있을 거라는데... 한 자리에서 다 죽진 않겠지만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악마가 그들을 제물 삼아 강제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나에게 있는 악마 지식은 죄다 책에서 배운 것에 불과하다 보니 확신은 없었지만 다행히 아예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실제로 그런 사례가 남아 있거든요. 그건 저희 쪽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하죠. 다른 건?"
"성수와 포션 정도? 악마를 상대하지 않았을 땐 반납하되, 다른 이유로 사용했을 시 차후 대금을 지불하는 형태로 빌려주시면 감사할 거 같네요. 그리고 저희가 데려온 사교도는 미끼로 써야 하니 다시 좀 데려가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지원이 가능하죠. 그런 형태의 계약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믿음직스럽네요."
나도 기본적으로 포션을 챙기긴 하지만 아무래도 신전에서 연금술사들에게 고르고 골라 받은 물건을 따로 가공까지 거쳐 만드는 포션보다는 질이 떨어지는 물건들이다. 안전을 위해 철로 된 용기에 보관하다 보니 내용물도 조금씩 변질되며 효과가 약해지기도 하고 말이지.
그에비해 신전의 포션은 유리병조차 마법 공학으로 가공한 특제품들인지라 잘 깨지지 않으면서 물약의 변질 우려도 없는 상등품이다. 원래대로라면 더럽게 비싼 물건이다 보니 이런 형태로 지원받지 않으면 아직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는 게 단점이지.
겨우 한두 모금 정도 분량밖에 담기지 않은 작은 시험관 크기의 포션 가격이 무려 금화 두 개다.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좀 더 싼 포션을 사서 애지중지 관리하는 게 낫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엘드미아. 지원품들은 내일까지 준비해 두도록 하죠."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응접실을 벗어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성녀님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군요 엘드미아."
"예, 뭐. 관심이 없으니까 안 물어본 거겠죠?"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는 하나 명색이 한 교단의 성녀인데도요? 이대로 가면 곧 이단 심문을 거쳐 교단의 핵심 권력이 될지도 모른답니다."
"알아서 관심 없는 겁니다."
그런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옆에서 걸으면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히스예나 신전장이 질문을 던졌다.
"그건 또 예상외의 반응이군요. 왜죠?"
"그런 일에 엮이면 귀찮을 게 뻔하니까요? 오히려 왜 예상외의 반응이라고 여기는지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물론 진짜로 몰라서 되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해야 귀찮은 문답을 피해갈 수 있을 거 같을 뿐이지. 아니나 다를까 히스예나 신전장은 '음. 그렇군요.' 라는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족들 사이에서 칼춤을 췄는데 이젠 또 종교쟁이 사이에서 칼춤을 추라고? 칼춤만 추는 건 해 줄 수 있어도 말장난에 휘둘리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아, 엘드미아 님! 이야기 끝나셨습니까?"
예배당에 도착하니 센과 그 일행들이 멀뚱히 서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대충 봐도 보상받을 거 받은 다음 날 기다리고 있던 모양새다.
"뭐야. 나보다 늦게 왔으면서 이야기는 너희가 더 빨리 끝났나보네."
"예. 곧 있으면 아침 기도가 있다 보니 이분들도 이래저래 바쁜 모양이더군요."
그걸 그렇게 은근슬쩍 핑계로 써먹었다고? 하여간 어딜 가나 능구렁이들이 넘친다. 역시 벨레시카와는 빠르게 손절을 치는 게 정답이야.
말보다는 실천인 만큼 빠른 걸음으로 신전을 벗어나자 그걸 또 열심히 따라오며 센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제분들께서 엘드미아 님이 따로 전달할 사항이 있을 거라던데 맞습니까? 의뢰인겁니까?"
"쓸데없이 예리하네. 맞아. 의뢰 받았다."
"보나마나 사교도겠네요? 어차피 쓸어 버리려고 하셨던 건데 완전 이득이잖습니까?"
"이게 이득인지 뭔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
사교도 이후로 엮이는 게 없으면 이득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더럽게 귀찮아질 테니까.
◈
신전에서의 용무를 마친 뒤에는 빠듯하게 하루가 흘러 갔다.
사교도들의 본거지로 가는 길에 어차피 수도에 들를 예정이니 최대한 필요한 것만 구매하고 나머지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인사를 돌리는 게 전부였지만 하루안에 다 하려니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다행히 저녁 무렵에는 아실리에도 숙취의 마수에서 벗어났기에, 우리는 알리샤 여사님의 마지막 한 끼를 얻어 먹은 뒤 푹 자고 일어나 그녀의 배웅을 뒤로한 채 신전으로 향했다.
히스예나 신전장이 직접 나와 우리를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대신해 나온 애셜 사제가 건네준 물건들은 보기만 해도 든든해질 정도로 상등품이었다. 포션 열 병에 성수 다섯 병,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큐브 두 개를 받아들어 살피고 있자 하니 애셜 사제의 설명이 이어졌다.
"악마가 나오면 그 찢어 죽을 놈의 발치에 던져 버리거라."
"그럼 어떻게 됩니까?"
"찢겨져서 죽어. 약한 놈들은 그것만으로도 끝이지."
미친 씨발 세상에 더럽게 살벌한 물건이었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며 움찔거렸더니 그의 호탕한 웃음이 이어졌다.
"신전장님이 직접 시전한 성법술이 들어 있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이상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 말거라."
"...악마와 계약하면 이상이 있다는 거죠? 범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 빛이 닿는 영역은 다 허용범위라고 봐도 되겠지. 미리 말해 두지만 사교도들에게 효과가 있으려면 거의 직접적으로 힘을 받은 수준이어야 한다. 허투루 쓰지 마."
쳇. 사교도를 잡을 때 사용하고 악마는 그냥 때려잡을까 싶었는데 그렇게는 안 되나보군.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은 지원이었기에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리고 성녀님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다.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해 미안 하다고. 돌아오면 꼭 다시 보자고 하시더구나."
오히려 다시는 안 엮이는 게 날 위한 거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타인이 호의를 표하는데 면전에 침을 뱉는 건 좀 그래.
"정리되면 보고하러 오겠습니다. 고생하십쇼."
"그래. 뤼비스카 님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빈다."
당연히 함께 하셔야죠. 본인이 교단 관리를 못 해서 생긴 문제인데.
덕분에 정말 3일 만에 오그웬을 떠나게 된 우리는 수도까지만이라도 좀 서두르기 위해 말의 속도를 올렸다.
"센! 사교도놈들 본거지에 도착하려면 수도에서 얼마나 걸릴 거 같냐?"
"한 5일은 걸릴 겁니다! 중간에 도시에 들리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하루는 더 걸릴 거구요!"
일주일로 끝났을 휴가가 좀 더 길어지게 생겼군. 이래저래 예카프 경께 또 양해를 구해야 하게 생겼다.
"수도에서는 어떻게 움직이시겠습니까? 도착하면 각인부터 새기시겠습니까?"
대부분의 대화를 센과 나누는데 익숙해진 와중에 메르델라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제 목에 개 목걸이를 채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임에도 불신 스택이 쌓여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보니 빨리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진 것 같다.
"시도는 할 테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더 걸릴 수 있으니 가서 판단한다!"
라드넬반데스와 위드라 씨. 당장 만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두 사람 외에 내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에스뮈에가 있다면 마법사 한 명 정도는 대동했을지도 모르니 부탁이라도 해볼 만 했을 텐데, 지금쯤이면 이미 귀국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개수작 부린다고 내가 반응 못할 것도 없고, 센이라는 담보가 워낙 막강해서 별 관심도 안 생긴다. 오히려 내가 수도에 들리려는 건 발쿤 씨에게 제작을 부탁한 물건이 완성되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택배 수령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