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로 귀환하는 동안은 아무런 트러블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겨우 말 타고 열심히 달리면 삼 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서 이전과 같은 사고들이 연달아 터진 게 이상한 거지. 게임 속 랜덤 인카운터도 그딴 간격으로 만들면 욕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쨌든 무사귀환과 동시에 가장 먼저 간 곳은 당연하게도 오가토르프 저택이었다.
그저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줄 알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에카프 경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교도 몰살을 위해 또 나가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한 뒤 눈치를 보고 있자 하니 짐짓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분명 휴식을 취하리라 생각했는데... 자네도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박복한 편이로군."
다행히 내가 헛소리를 한다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간 머물면서 저질러놓은 전적이 워낙 화려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상상 이상으로 순순히 납득해 줄 뿐만 아니라 일이 정리될 때까지 말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솔직히 나갔던 놈이 돌아오자마자 그사이 악마 숭배자 놈들과 문제가 생겨서 놈들 뚝배기 좀 깨러 또 가야겠습니다 하면 일단 그 말을 꺼낸 놈의 뚝배기부터 의심하고 시작할 거 같은데 이런 신뢰라니. 역시 에카프 경은 인격자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 지구에서 자네에게 온 편지가 있다고 하더군. 자네가 사용하던 방에 두었다고 하니 확인해 보게나."
"감사합니다 에카프 경.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드디어! 마참내! 역시 준비가 끝났을 줄 알았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응접실을 벗어난 나는 냅다 방으로 달려가 확인하자, 굉장히 고풍스러운 서체의 편지가 침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씨에서조차 손재주가 나오는 건가? 굉장히 의외네."
발신자 발쿤. 수신자 엘드미아 에가. 딱 그렇게만 적혀 있는 편지 봉투를 열어 안을 확인해 보니 내용물은 더욱 가관이었다.
[준비 됐으니 오시게.]
딱 한 줄만 적혀 있는 절망적인 수준의 종이 낭비. 핸드폰같은 게 발명돼서 메신저 프로그램이 생기면 가장 활발하게 쓸 종족은 분명 드워프일 것이다.
뭐 어차피 내 돈 아니니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난 그냥 싱글벙글 웃으며 물건만 받아오면 되는 것이다. 여전히 신나는 마음으로 저택을 벗어나니 아직도 얼빠진 얼굴로 정원에서 저택을 구경하던 센과 다른 녀석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 엘드미아 님!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표정이 좋아 보이시네요!"
"별 말없이 이해해 주셔서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될 거 같다. 누나? 나 잠깐 드워프 지구 좀 방문해야 할 거 같은데, 얘네 데리고 먼저 라그니스한테 가서 도움 좀 요청해 줄 수 있을까?"
"드워프 지구?"
"응. 저번에 새로 무기를 주문했는데 마침 완성했다고 편지가 와 있었거든."
"드워프한테 주문 제작까지 했어? 비쌌을 텐데?"
"지난번에 만났던 긴 씨의 도움을 받아 안면을 튼 덕에 여러모로 득을 봤지."
인맥까지 든든하게 만들었다는 말로 들렸는지 아실리에는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착각아닌 착각을 한 아실리에가 센과 다른 녀석들을 끌고 가는 것을 뒤로 하고 열심히 말을 달려 도착한 드워프 지구는 평소보다도 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무슨 여기만 도떼기 시장인가, 왜 이리 붐벼?"
농담이 아니라 진짜 더럽게 북적거린다. 심지어 다른 곳보다 유독 발쿤 씨의 공방만 심하게 북적거렸다. 지난번에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무슨 행사라도 하는 걸까?
일단은 주문한 물건을 받으러 온 것이니 당당하게 사람들을 씹고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시선들이 내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불만, 의아함, 짜증 등등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공방 쪽으로 다가가자 어김없이 직원 하나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 막아주었다.
"실례합니다! 이쪽은... 어라? 또 오셨네요 손님?"
"네. 안 그래도 이러면 누군가 와주실 거 같았는데 또 뵙네요."
지난번에 능숙한 영업용 미소와 대응을 보여줬던 여직원은 내 반응에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런. 이번에는 미리 예약을 하신 모양이군요?"
"주문 제작을 부탁했던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편지가 왔거든요.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건네주자 봉투만 슬쩍 보고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여직원이 길을 비켜줬다.
"안 그래도 딱 좋을 때 오셨네요. 들어가면 발쿤 씨가 매우 좋아하실 거랍니다."
"절 그렇게나 기다리실 거 같진 않은데...?"
"아하하.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지금 인근 도서관의 진상이 와서 아주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응대를 안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많이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진상이요?"
도서관에서 진상이라니. 뉘앙스만 놓고 보면 분명 도서관 관계자일 텐데 권력 남용이라도 하는 건가. 드워프들을 상대로 그런 게 먹힐 거 같진 않은데 여전히 올 때마다 신기한 꼴 한 두 개씩은 보게 되는 곳이다.
바쁜 와중에 적당히 뒷담화를 할 명분이 생겨서일까. 여직원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내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세네란 마도서관의 도서관장인데...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와서 귀찮게 하고 있답니다."
◈
대장간에서 일하는 도제들은 어지간한 소음과 열기에는 면역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사방팔방 쇠 두드리는 소리가 만연한 곳에서 한평생을 일하다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가 익숙한 소리이기에 견딜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최근 의도치 않게 깨닫고 있었다.
오늘은 그 깨달음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팔았다고?!"
"팔았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소리쳐라! 남 작업하는데 방해도 그만하고!"
어지간하면 언성을 높이는 일 없는 발쿤의 목청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이는 세네란 마도서관의 관장이자 황금의 마법사라 불리는 세네란이었다. 다른 이었다면 당장 목덜미를 붙잡고 쫓아내고도 남았을 소동 속에서 아무도 나서지 못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남?! 왜 남이야?! 내가 투자했어! 마장금 연구와 관련된 건 내 작업이기도 하다고!"
그녀는 흔히 말하는 큰손이자 물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워프답게 발쿤은 할 말은 하는 편에 속했다.
"네 행동이 지금 나만 방해하냐! 쟤들 일하는 거 안 보여?! 말을 하려면 목소리를 낮춰서 하면 되는 걸 왜 자꾸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댁도 소리 치잖아!"
"너 때문이잖아!!"
소리가 너무 울리다 못해 어질어질한 수준이다 보니 이미 대부분의 도제들은 둘이 고착상태에 빠지길 기다리며 손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저 정신 나간 마법사는 작정을 한 것인지 대장간 전체에 방음 마법까지 치고 시작했다. 그럴 능력이 있으면 차라리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공간만 칠 것이지 왜 대장간에 친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마법사란 인종들은 대개 일반적인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 만큼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워. 옘병. 들어오자마자 아주 난리네. 마법인가?"
둘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손님이 들어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도제들이 퍼뜩 놀라며 목소리에 뒤늦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실례합니다. 발쿤 씨한테 물건을 받으려고 왔는데요."
참으로 키가 큰 청년이었다. 도제들은 그를 보자마자 최근 발쿤이 열심히 만들던 물건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번 알 수 있었다.
"아... 저기 계십니다. 선객이 있긴 한데, 신경 쓰지마세요. 오히려 좋아하실 테니."
도제들의 대답에 감사를 표한 청년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언쟁의 폭풍 속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실로 영웅적인 그 모습에 도제들이 감탄하는 사이 씩씩거리다가 잠깐 시선을 옮겨 방문자를 확인한 발쿤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그를 맞이하며 말했다.
"아! 엘드미아 왔는가! 야! 손님 왔으니까 저리 가!"
"...이이익!"
그래도 아예 경우가 없는 건 또 아닌지 손님이라는 말에 억울함을 꾹꾹 눌러가며 옆으로 빠지는 세네란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본 발쿤은 곁에 다가온 청년에게 악수를 건넸다.
"바쁜 일이 있었나보군? 편지를 보낸 건 한 이틀 전이었던 거 같은데!"
"잠깐 고향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완성됐군요?"
"자네의 발상을 조금 다듬는 걸로 충분했거든. 기다리게나. 내 바로 가져오도록 하지."
방금까지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호쾌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운 발쿤은 금세 돌아와 손에 들린 물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네란은 그런 그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구석에 자리 잡은 뒤 명백하게 심통이 났음을 온몸으로 표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굵은 거 한 개. 가느다란 거 아홉 개. 확인해 보게나."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네요. 크기도 적당하고."
청년이 물건들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발쿤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재주가 부족한 내가 던져도 나쁘지 않더군! 대충 저쪽 나무 벽에 던져 봐도 괜찮네!"
"어, 정말요?"
"어차피 무기 들고 움직이다 보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네! 나도 내 물건이 얼마나 잘 날아가나 실력 있는 친구를 통해 보고 싶구만!"
"...그럼 잠깐 실례를."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나 진짜 삐졌다.' 라고 시위하듯 구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세네란의 시선이 슬그머니 둘에게 옮겨졌다. 발쿤이 저렇게나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궁금했지만, 저렇게 자신 있게 만들어 준 무기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사내가 손에 들고 있는 뒤틀린 바늘과도 같은 무기를 보자마자 분노로 바뀌었다. 세네란은 저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 올리며 외쳤다.
"야이 노망난 영감탱이야! 너 그거 마장금...!"
-콰각!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씨이발 깜짝이야. 왜 갑자기 마나를 끌어 올리고 지랄입니까?"
방금까지만해도 정중한 태도로 발쿤을 대하던 남자의 입에서 걸쭉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와서 놀란 게 아니었다. 분명 평범하게 쥐고 있는 상태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바늘이 갑자기 활로 쏜 것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 들어서도 아니었다. 그 바늘이 석궁의 볼트보다도 빠르게 날아와 그녀의 머리 옆을 스쳐 벽에 박힌 것조차 그녀가 놀란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남자가 방금 마장금으로 만들어진 바늘을 마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쏘았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충격으로 굳어버리게 만들고 있었다.
"다, 당신! 마, 마!"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정보를 낼 뻔한 그녀의 머릿속에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직원이 판매한 물건. 얼빠진 직원이 구매자를 묘사할 때 쓴 표현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청년.
"마 뭐?"
"오르골!"
그 누구도 무슨 대화인지 이해할 수 없어야 정상인 상황. 하지만 바늘을 날린 남자는 '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제작자?"
그리고 그 반응에 세네란의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