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니스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결코 길지 않았으나 그동안 세네란은 정말 쉴 틈 없이 떠들며 내 혼을 빼놓았다.
"임시 구금소에서 레비엥 변경백이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50명의 목을 따버렸다는 게 진짜야?"
"엔벨데 백작의 저택에서 300명을 베어 버리고 백작마저 일격에 베어 죽였다는 게 진짜야?"
"제국 아카데미에서 레비엥 변경백에게 무례를 저지른 루드라의 젊은 사자와 그 부하 20명을 한 번에 상대했다는 게 진짜야?"
"용사랑 이틀 밤낮을 싸워 결판을 냈다는 게 진짜야?"
문제는 그 내용들이 죄다 조금씩 맛이 가 있는 터라 차마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일일이 정정해 줘야 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제대로 된 소문이 하나도 없냐?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 부분을 가지고 투덜거렸지만 세네란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거 같은데? 네 키가 2미터가 넘고 자기 덩치만한 대검을 휘두른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애도 있었어."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결국 온갖 허황된 소문들을 정정하느라 진이 빠져 버린 내가 라그니스의 자택에 도착해서 보게 된 것은 정문 밖에서 레니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실리에와 나머지들이었다. 퍽 이상한 모습이긴 했다. 라그니스가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있어야 하고, 라그니스가 있다면 저택 안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말이지.
다행히 내 의문은 금방 해소될 수 있었다.
"아, 엘드미아 경. 오랜만에 뵙는군요. 고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레니사 경. 조금 사건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변경백의 명으로 오가토르프 가에 기별을 넣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그렇고 최근 계속 엇갈리는 것 같군요."
엔벨데 사건 이후로 또다시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레니사의 설명이었다. 주된 요인은 라드넬반데스 경의 수업이라는데, 세네란을 만나지 않았으면 아무래도 사교도들을 처리하고 온 뒤에야 각인 계약을 준비할 수 있었을 거 같다.
"엘디랑 엇갈리지 않기 위해 잠깐 앞에서 실례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손님만 밖에 둘 수 없다며 말동무가 되어 주시지 뭐야."
원래는 내가 올 때까지 집안에 들여 대우할 요량이었지만 아실리에가 한사코 거부를 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냥 무시하고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참으로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다.
"괜찮으시다면 변경백께 언질을 넣어둘까요? 아마 교육이 끝나는 대로 바로 시간을 내실 겁니다."
"아뇨, 도움을 받고자 한 거였는데, 마침 다른 방법도 생겼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다음 기회에 찾아뵙도록 하죠."
그렇게 하하 호호 하며 헤어진 뒤 레비엥 저택에서 멀어지자, 그동안 열심히 눈동자만 굴리던 센이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레니사를 돌아보다가 뒤늦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엘드미아 님? 대체 무슨 삶을 살고 계신 겁니까? 진짜 어디 귀족이세요?"
"그냥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야, 메르델라. 너한테 각인을 새겨줄 분이다."
"예? 어? 그럼 변경백의 저택에는 왜..."
"이분도 그저 열심히 살다보니 오늘 우연히 얻은 인연이라는 거지. 세네란. 쟤한테 각인을 새겨 주시면 됩니다."
이번만큼은 아실리에마저도 다른 녀석들과 같은 시선으로 세네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위한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지부조화 속에서 나와 세네란을 번갈아 바라보던 메르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네란...? 황금의 마법사 세네란?"
"안녕. 그게 나야."
그 한 마디에, 다른 녀석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짐덩이처럼 말에 얹혀져 있던 사교도 새끼마저도 동공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안 긁은 복권이라고 하긴 미묘하고, 아직 덜 긁은 복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센 일행들을 데리고 오가토르프 저택에 신세를 질 생각은 없었기에 난 예전에 가엔달 씨 일행들이 묵고 있던 여관으로 장소를 옮겨 방부터 잡았다.
운이 좋으면 가엔달 씨를 비롯해 누구라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꾸준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지는 몇 안되는 모험가들이다보니 기회가 된다면 이번 의뢰에 동행을 권유해서 콩고물이라도 좀 나눠주고 싶어지더라고. 아쉽게도 바로 만날 수는 없었으나 여관 주인의 말로는 장기 대실 중이라고 하니 아직 기회는 있어보였다.
내친김에 아직 못다 한 식사부터 주문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이건 뭐 노예 계약이네. 목숨이라도 노렸었나 봐?"
"......"
"뭐야? 진짜야? 너 생각보다 대인배구나? 그걸 살려?"
순식간에 풀이 죽어 버린 메르델라를 보고 적잖이 놀란 세네란이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나는 대인배라는 이름의 호구로 기억될 생각은 없었기에 센을 턱으로 가리키며 세네란의 착각을 정정해주었다.
"얘가 가문을 걸지 않았으면 쟨 여기 없었습니다."
"이야, 진짜? 그걸 해줬어? 대단하네? 그 정도면 댁들도 꽤나 열심히 살아왔다는 건데 말이지. 뭐,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겠어?"
세네란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치고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한 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벼이 말한다. 하지만 그건 남일이라서 별거 아닌 일 취급한다기보다는 정말 흘러가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게 느껴져서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이 사람 사실 엄청 나이 많은 거 아닐까? 뭔가 마음가짐이 특이한데?
뭐, 아무리 차후 협력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내 부탁을 들어 주는 거라고 하지만 괜히 나이를 들먹여 밉보일 필요는 없지. 난 일단 생전 처음 하는 경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응. 확인 끝."
열심히 양피지에 적힌 계약 내용을 확인하며 뭔가 허공에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던 세네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를 메르델라에게 건넸다.
"그럼 해볼까? 메르델라 라고 했지? 읽어."
"이, 읽어요?"
"응. 굳이 큰 소리로 읽을 필요는 없어. 네 의식이 자각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입장에서는 뭔 소린가 싶지만 당사자인 메르델라는 그 설명만으로도 이해했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세네란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휘적이던 곳에 마법진 같은 게 떠오르며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오."
마력시를 사용해서 살펴보니 세네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마법진에 연료마냥 공급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게 모르게 내 몸에 있는 마력에서 마나를 정제해가며 조금씩 자신의 마나를 끊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쳐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메르델라에게 흘러 들어간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쪽 손목으로 흘러 들어가며 문신마냥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굉장히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나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말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메르델라가 양피지를 다 읽는 순간까지 이어졌고, 그녀가 양피지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마법진이 사라지며 끝을 맺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세네란이었다.
"계약은 깔끔했지만 조건을 어길 시에 있는 제약은 결코 깔끔하지 않을 테니 그 계약서는 잘 보관하고 다니면서 외우는 게 좋을 거야. 실수로 죽어 버리면 억울하잖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각인 계약으로 인한 사건 사고라는 주제로 얼마나 많은 학술 논문이 나오는지 알면 놀랄걸? 자기들이 무슨 계약을, 얼마나 허술하게 새겼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훅 가 버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지 않아.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이 조건들은 계약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편이긴 했지. 물론 내겐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말이야."
두 손을 훌훌 털어 버리며 다시금 광기에 가득 찬 눈동자를 내 쪽으로 돌린 세네란이 말했다.
"자. 이제 우리 계약을 진행해볼까?"
"...여기 오는 동안 말했잖습니까. 사교도 놈들까지는 다 죽인 다음에야 시간이 된다니까요."
"제대로 들었거든? 그것도 포함해서 말하는 거야. 나도 따라갈 거니까."
"예?"
진짜 도무지 종 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더니 의외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주장은 타당했다.
"너도 자신이 있으니까 사교도 집단의 본거지로 돌격하는 거겠지만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는 법이잖아? 그 변수로 인해 네가 죽어 버리면 난 오늘 무보수 노동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나라는 전력을 네 여행에 추가하여 무사생환의 가능성을 올리고자 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 아닐까?"
"...그 극한의 변수로 인해 댁도 죽으면요?"
"연구의 가능성이 막히느니 죽는 게 나아."
광기. 그야말로 진짜 광기였다.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면서 아실리에 쪽으로 붙고 말았다.
아실리에는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를 채서 별말없이 가만히 있는 편이었지만, 센과 나머지 놈들은 대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은연중에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직 덜 긁은 복권들에게 할 설명따위 없었다.
나는 세네란의 주장을 수락하는 것으로 대화를 일단락 지은 뒤 그들에게 신경 끄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날렸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내 의뢰에 엮이게 되는 것이니 식사와 숙박 비용을 비롯해 나중에 성광십자회에서 주는 보수 정도는 좀 떼어 주겠다고 말하며 식사를 시작하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어? 엘드미아잖아?"
언제나 유쾌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주는 예카트리나의 뒤로 가엔달과 긴 그리고 렐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