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다 만 복권인 센과 트롤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당첨 복권, 가엔달과 친구들은 방금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것인지 꽤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호쾌하게 웃으면서 다가온 예카트리나는 뒤늦게 그게 신경 쓰였는지 부끄럽다는 듯 볼을 긁적였고 렐리에는 그런 예카트리나를 도끼눈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이거 운이 좋았네요. 안 그래도 여기 오면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오? 우릴 찾아온 거야? 뭐 좋은 일거리라도 생겼어?"
"놀랍게도 정답입니다. 괜찮다면 합석하시겠어요?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제가 사죠."
"허허허. 오늘 영 운수가 사납더니 그래도 마지막에는 좋은 일이 생기는구만!"
해맑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예카트리나의 뒤에서 너털웃음을 터트린 긴 씨가 여관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을 붙이는 사이, 이번에는 가엔달이 다가와 가볍게 인사하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엔 일행이 꽤 많군. 어지간히도 큰일감인가 본데?"
"거기엔 쓸데없이 복잡하고 긴 사정이 있었죠. 일단... 이쪽은 센과 메르델라 그리고 칼스와 바이제입니다. 남쪽 관문 도시 엔글렘에서 활동하는 적급 모험가들이죠. 그리고 이쪽은 가엔달, 긴, 예카트리나, 렐리에. 실력 좋은 모험가들이시고... 혹시 아직 청급이십니까? 느낌 상 벌써 승급하셨을 거 같은데."
'우리 이름과 출신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고?' 라는 시선을 보내는 괘씸한 녀석들을 무시하며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엔달 씨가 짙은 미소와 함께 붉은색 모험가 징표를 꺼내보여 주었다.
"정확하다네. 며칠 됐지."
이거 나만 승급을 못 하고 있군.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호, 혹시 웨펀 마스터 가엔달이십니까?"
근데 꾸준하게 입 다물고 쭈구리처럼 있던 칼스부터 시작해 예상치 못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걔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흘러가는 엑스트라처럼 한마디씩 중얼거리며 감탄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별의 총아 렐리에?"
"세상에, 거인 긴이라고?"
"공성추 예카트리나...?"
뭐야. 너네들 왜 눈을 그렇게 떠.
지금까지 쭈글거리고 있던 녀석들은 사라지고 아이돌 만난 민간인처럼 두 눈을 빛내는 놈들만 남아버려서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꼴뵈기 싫어서 네 개의 머리통에 순차적으로 꿀밤을 때려 박아 버리고 싶어지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나는 가엔달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들 되게 유명하셨군요? 아닌가? 원래 유명하셨던 건가?"
"무슨 소린가? 자네도 만만치 않던데."
"저요? 그 광검인가 광견인가 하는 거 말입니까?"
"요즘엔 달리 부른 사람들이 더 많더군."
하하하 웃으며 가엔달이 손날로 목을 치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단두대 엘드미아 에가라고 말이야."
예에엠병.
난 아예 살아 숨 쉬는 사형집행기구로 낙인찍혀 버린 듯하다.
◈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인이라도 받을 기세인 녀석들을 시선으로 제압하고, 서둘러 씻고 오려는 예카트리나를 렐리에가 말리며 테이블에 앉히는 일련의 과정 끝에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와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비록 그 사이에 세네란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날뻔 했지만, 다행히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호쾌한 수락으로 이어졌다.
"사교도라니. 모험가 일은 안 하면서 어쩜 그렇게 모험은 잘 찾아다니나?"
내 설명을 다 들은 가엔달이 내뱉은 첫 소감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번만큼은 나도 메르델라 때문에 억울하게 엮인 입장이었지만, 저것들 체면을 챙겨준답시고 좋게 좋게 대하는 중인지라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긴 힘들었다.
성녀에 대한 부분을 싹 덜어내고 이야기했지만 워낙 사교도라는 놈들에게 박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인식이라는 게 좋지 못하다 보니 내가 성광십자회의 의뢰를 받아 놈들을 토벌하러 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뭔가 규모가 엄청 큰 이야기인 게 분명한데 왜 이리 위기감이 없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그저 렐리에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심정에 어이없어할 뿐이었다.
"에가 씨. 솔직히 말해 봐요. 혼자였어도 그 의뢰 감당 가능했죠?"
"글쎄요? 정면 승부는 힘들겠지만 누나도 있으니 야간 습격과 기습을 반복하면 어떻게든?"
"...뭔가 요즘 일의 경중을 파악하는 기준이 흐트러지는 기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렐리에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쾌하게 웃어 보인 예카트리나가 말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말이 사교도인 거지 악마 숭배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잖아? 보통 자급 모험가들이나 경험해볼 사건을 직접 발품을 팔아 쥐고 오다니, 부러울 정도야."
"당사자는 원치 않았지만 말이죠. 그보다 아까 긴이 운수가 사나웠다고 말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겁니까?"
"말도 말게나. 저 아래쪽 영지에서 영주네 일가족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고 조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사정이 있어서 몰래 자리를 비웠던 것에 불과했지 뭔가."
"...오."
저거... 아무리 봐도 벨레시카 이야기인데...? 어중간한 반응을 내비치며 눈을 굴려보니 묘한 표정이 센과 눈이 맞았다.
"영주가 인망이 너무 좋았던 것인지 마을 사람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돈을 모아서 의뢰를 넣었더군.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는 증언도 있어서 잘만하면 크게 벌겠구나 했는데... 뭐, 시간만 날리다 와 버렸지."
"그래도 엘드미아가 가져온 일이 잘 풀리면 이번 손해는 충분히 만회할 테니 다행이야. 이제 슬슬 겨울이라 그런지 걸리는 의뢰들이 고만고만하거든. 슬슬 수도에서 벗어날 때가 된 걸지도."
"최근 오그웬에 던전이 좀 생겨났다고 하던데 거기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듯해."
날이 좋으면 조금 거리가 있는 지방의 의뢰도 상황에 따라 연계하여 다른 지역의 모험가에게 쥐어지지만, 장거리 이동에 애로사항이 꽃피기 시작하는 겨울엔 보통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편이다. 동사하는 모험가가 월등히 늘어난다는 게 이유였던가?
애먼 멍청이들이 자연의 힘을 비웃으며 객기를 부리다가 죽어 나가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런 놈들이 많아 규칙까지 생겼다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다.
"그런 거라면 마침 잘됐네요. 이번 의뢰는 오그웬의 성광십자회 지부에서 받았거든요. 겸사겸사 이번 기회에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
분명 말을 팔 때 던전으로 오고 가는 마차가 늘어서 호황이라고 했었으니 모험가의 일거리는 충분할 거다. 가볍게 나온 것치고는 상당히 진중한 고민이었는지 내 이야기를 들은 가엔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인가? 이거 조짐이 좋군."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다섯이 모이면 꼭 운이 좋았단 말이죠. 에가 씨한테 뭐가 있나?"
정작 당사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참수의 아이콘인데 여기서는 행운의 부적 취급이라니 아이러니하군.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같이 따라 웃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좀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그래도 저번 의뢰 때 장비를 수선해 둬서 소모품만 구입하면 되겠어."
"부싯깃이랑 기름 좀 사고... 여분의 장작도 사두는 편이 낫겠네."
"렐리에가 태워 먹은 모포도 새로 사고 말이야."
"아으... 다시 생각해도 아깝네 진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도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할 줄 아는 믿을 수 있는 드림팀 가엔달 파티를 든든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세네란이 날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그 사교도들. 마신교를 자처했다고?"
"네. 왜요?"
"그럼 높은 확률로 진짜 마신교에서 개입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
진짜 마신교가 개입한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아실리에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도 세네란이 꺼낸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이단이잖아. 어디에 있든 간에 사람을 보내서 박살을 내놔야 직성이 풀린다고."
뭔가 했더니 생각보다 직관적인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마족령 밖의 일인데 그렇게까지 할까요? 소문이 거기까지 퍼질리도 없을 거 같은데."
"걔넨 이단에 대해서는 소문 따위 필요 없어."
"예?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마신이 알려주거든."
다른 사람들이 떠들었다면 딱히 신뢰가 가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마력 연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살아온 광기의 세네란이 마족에 대해 말하니 무게감이 남다르다. 딱히 작게 이야기한 건 아니다 보니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세네란의 말이 이어졌다.
"대륙에서 가장 이단에 엄격한 종교가 마신교야. 종족부터 시작해서 워낙 핍박받기 쉬운 입장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걔넨 거기에 한해서는 타협이 없어. 지금까지 그 사교도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아직 마신교와 접점이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내 귀에는 '곧 마신교와 정면으로 부딪칠 예정'이라는 말과 이음동의어로 들리거든? 괜찮겠어?"
마족과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지극히 상식적인 걱정이며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와 가엔달, 긴, 예카트리나와 렐리에는 세네란의 질문에 여유롭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별로 문제 될 건 없어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