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좆됨을 직감한 나를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마족 여자였다.
재빠르게 거대한 방패로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끌어안다시피 해준 덕에 폭발은 나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보이는 것처럼 튼튼한 방패는 듬직한 방벽의 역할을 해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사이좋게 폭발에 휘말려 날아갔음에도 그럭저럭 무사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 공부를 아무리 해도 좆 같은 놈들의 개짓거리는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구나!"
"입이... 험하시군요...!"
이 아가씨 원형 방패도 그렇고, 조상님 중에 미국대장의 피가 흐르나? 낑낑거리며 몸을 추스르는 동안에도 저런 말이나 하고 있다니 대단한 여자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날 도와 준 은인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다는 대신 수월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난 악마 처음 보는데, 혹시 그쪽은 좀 아나?"
다른 이단 심판관들은 그녀처럼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는지 방금 전의 폭발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일부는 분명 반응을 하고 방패를 들어 올렸으나 마족 아가씨가 들고 있는 방패처럼 크지 않아 겨우 급소만 피했다는 느낌이었다.
"악마요? 확실합니까?"
그래도 이단 심판관이라고 했으니 혹여 악마 대처법 같은걸 좀 알까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돌아온 대답부터가 시원치 않다. 악마라는 놈들이 만나기 쉬운 놈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저딴 흉물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게 악마 말고 또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세상이 말세인 거 아닐까?"
결국 이 아가씨도 악마를 상대한 경험은 없다는 소리겠지.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 엎어졌을 때 느낄법한 좆같음의 향연 속에서 나는 기분 나쁘게 꿀렁이는 핏덩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씨발놈아. 그 꼴로 뭐가 들리긴 하냐?"
사실 반응이 없으면 바늘부터 날리고 볼 생각이었는데 놀랍게도 저 핏덩이 악마 새끼는 내 질문을 듣고 바로 대답했다.
[잘 들린다 인간이여. 이 원치 않은 형태의 육체를 제공한 게 너로구나.]
"와, 너 정말 목소리가 생긴 것만큼 좆같구나."
핏덩이 속에서 육성이 튀어나온다는 것부터가 뭘 바라면 안 되는 상황이긴 하겠다만, 그걸 감안 하더라도 정말 들어 주기 힘든 목소리다. 목소리만으로 때리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니 여러모로 놀랄 일이었다.
그런 내 진실어린 평가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핏덩이는 한참을 더 꿀렁거린 뒤에야 좀 사람 같은 형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계약자들이 다 죽었군... 졸지에 제물로 취급되었고... 무능한 놈들이 성녀를 끌고 오는 것조차 실패해서 만족스럽지 않은 형태로 육체가 만들어지고 있어.]
제대로 몸뚱이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반응이 늦은 줄 알았더니 그냥 혼잣말이나 지껄이며 상황 파악에 들어간 것에 불과했나보다.
"자아 성찰은 나중에 네 집에 돌아가서 하시고, 지금은 그냥 곱게 사라져 주지 않을래? 안 그러면 내가 널 매우 지저분하게 찢어 죽여야 하거든."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구나. 난 너를 모른다. 하지만 네겐 나를 향한 맹목적인 적의가 있어. 어째서지?]
대체 선지같은 저 핏덩이로 뭘 연성하려고 계속 꾸물거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머리통으로 짐작되는 핏덩이에 손으로 짐작되는 핏덩이를 옮겨 가며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고민할 때 턱을 괴는 것과 같은 제스처를 흉내 내는 핏덩이를 바라보며 한 번, 녀석의 질문에 한 번. 합쳐서 두 번의 어이없음을 느낀 난 반사적으로 놈을 향해 주먹을 들이밀며 대답했다.
"사람 좆 같은 상황에 몰아넣는 게 삶의 유일한 즐거움인 악마 새끼를 사람으로서 싫어하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
빳빳하게 세운 가운데 손가락을 녀석이 제대로 모욕으로 인지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옆에 있던 마족 아가씨는 매우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런 아가씨와 달리 놈은 건방지게도 내 반응에 웃어 보이는 여유를 내비쳤다.
[큭큭큭. 재미있는 인간이로구나. 좋다, 육체가 완성될 때까지 놀아주마.]
건방진 대사와 함께 손으로 짐작되는 핏덩이가 한차례 허공을 긋자 그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나오며 화살 같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지랄을 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아무런 마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칭 사제라던 놈이 쓰던 빛의 구슬도 그렇고 저건 아예 악마의 고유 능력인 것이려나? 부디 백여 명 분의 피로 일대를 뒤덮는다던가 하는 역겨운 광역기같은 건 없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악마를 도발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것만으로도 살짝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옆에서 방패를 든 채 상황을 살피던 아가씨마저도 질책하는 어조로 말을 걸어왔으나, 말의 내용 때문에 그녀의 진중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죽일 놈인데 도발을 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상대는 악마입니다! 그렇게 가벼이 여기거나 쉬이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난 가볍게 여긴 적도 없고 쉬이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한 적도 없는데?"
"...예?"
나는 내 말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고 곡해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지만... 그래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날 지켜 주려고 했던 고운 심성을 높게 사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저 새끼가 악마고, 내가 쟬 만난 이상 내가 뒈지든 저 새끼가 뒈지든 무조건 하나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 운명이야.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 도발을 안 할 이유가 어디 있고, 무게를 잡고 안 잡고는 또 무슨 상관이야? 도발 안하면 쟤가 약해지거나 내가 강해지나?"
[너무 여유를 부리는구나.]
정작 자기가 가장 노는 기분으로 여유를 부리며 설렁설렁 움직이는 주제에 한 마디 던진 악마 새끼가 피의 화살을 쏘아 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짝 긴장한 상태로 놈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내가 반응이 늦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유는 니가 부리는 게 여유지 이 새끼야."
나는 몸을 낮춰 날아오는 투사체를 피함과 동시에 단거리 달리기 선수들이 취하는 자세를 흉내 내 전력으로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폭발 한 번에 제단과 20미터는 벌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기 시작했다. 저 핏덩이에게 얼굴이 달려 있지 않아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내 갑작스러운 반응을 미처 예상하진 못한 것인지 황급히 쏘아지는 다른 화살들은 전부 내 뒤쪽으로 떨어질 뿐 스치지도 못했다.
"에파가이시여! 사악을 막아 내는 가호를!"
놀랍게 마족 아가씨가 기도문을 외우며 나에게 가호를 걸어 주었다. 신성 주문은 아는 게 없다 보니 무슨 효과가 있는지 종잡을 수는 없었지만, 내 몸에 내가 의도한 게 아닌 빛무리가 내려앉는 걸 보아하니 뭐가 됐든 좋은걸 걸어줬으리라.
그렇게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놈의 코앞까지 도달했음에도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뜬금없이 내가 아닌 마족 아가씨에게 더 신경을 썼다.
[하하, 마신을 섬기는 성녀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교의 땅에서 네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어 가는 꼴을 볼 거...]
"너무 여유를 부리는구나!"
저 핏덩이에 칼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아 일단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마력도 실리고 감히 날 무시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도 실린 스트레이트 펀치가 정확히 놈의 머리를 향해 날아든다.
[그런 공격은 안 토...ㅇ...]
그리고 주먹에 맞은 놈의 머리가 물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단순 비유가 아니라 충격을 못 이기고 목 위의 핏덩이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물풍선 그 자체였다. 통쾌하다면 통쾌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라는 점에서 그다지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머리를 잃은 놈의 두 팔이 당황한 것처럼 허공을 휘적거리는 꼴은 유쾌했지만 말이지.
"잘만 통하는구만 뭐래는 거냐."
겨우 이거로 죽을 리가 없으니 바로 이어서 몸통에서 다섯 번의 주먹을 꽂아주었다.
한 방 한 방 꽂힐 때마다 사람의 형태를 취하려던 핏덩이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다.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그렇게 퍼져나간 피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려는 듯 빠른 속도로 모여 들기 시작하며 내 공격이 그다지 유효타가 아니었음을 알려 줬다.
마력을 담은 주먹으로는 만족스러운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찰나, 나와 거리를 두고 다시 핏덩이를 구성한 악마 새끼가 주둥이 아닌 주둥이를 열며 당혹감을 표출했다.
[뭐, 뭐냐?!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황했다는 건 그래도 뭔가 효과가 있었다는 것일까? 녀석이 다시 형태를 갖추며 '하하하 무의미한 공격이다.' 같은 대사를 지껄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나아 보였다.
"눈깔이 없어서 그런가. 주먹으로 지 대가리를 터트린 것조차 제대로 못 보네."
[빌어먹을. 에파가의 창녀가 건 축복 때문인가? 일반적인 공격이 통할 리가 없거늘...]
음. 듣고 보니 충분히 의문이 생길만한 내용이었다. 과연 마력 담긴 주먹 덕분에 저 녀석의 예상을 벗어난 타격이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저 마족 아가씨의 버프 덕분인 걸까?
"모르면 맞아야지."
이번만큼은 악마 새끼와 의견이 일치했기에 난 가차 없이 달려들고 주먹을 휘둘러 놈의 머리통을 한 번 더 터트렸다.
마침 나도 궁금하고 쟤도 궁금해하니 이로 인해 서로가 만족할 만한 좋은 실험 결과가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