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감.
악마가 느낀 건 지난 수백 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폭력이라는 행동에서 오는 불쾌감이 아닌, 자신이 하려는 행동을 일말의 주저 없이 반복적으로 방해하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불쾌감이라는 건 한평생 그가 타인에게 안겨 주면 안겨 줬지 결코 당하는 입장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짜증이 나고, 살짝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인간의 주먹은 제대로 된 육체를 구성하는 걸 집요하게 방해할 뿐이다. 인간들의 피를 매개체로 삼아 마력을 구성하고 현실에 육체를 만들어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졸지에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은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귀찮고 짜증 나고 신경질이 났다.
[적당히... 해라!]
"너나 적당히 하고 좀 사라져라!"
가까스로 다시 형태를 갖춘 입은 겨우 말 한마디 내뱉고 주먹질에 터져 버렸다. 악마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처음에 에파가의 신도들을 무력화 시켰다고는 하나 그들은 마족이었고, 벌써 자가 치유를 이어 나가며 상황을 냉정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죽인 이들마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육체가 멀쩡히 구현되더라도 승리를 확신하기 힘든 상황인데 이런 상태로 그들 전부와 싸우게 된다면 오랜만에 성공한 현신現身이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악마는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다시 한번 폭발을 일으켰다. 가시처럼 치솟으며 터지는 피는 스치기만 하더라도 큰 위협이 될 수준이었다.
거기에 끈질기게 달라붙던 인간이 휘말렸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 약삭빠른 인간은 귀신 같이 눈치채고는 거리를 벌렸다. 인간들이 사용한다는 오러에 능숙한 자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족들만 치워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다.
[불안정한 상태로 힘을 쓰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인간의 피가 마력으로 치환되는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효율을 무시하고 속도만 중시한 탓에 원래대로였으면 충분히 느껴져야 할 힘이 절반도 안 느껴졌다.
악마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급격히 끌어모은 마력을 이용해 마족들을 향해 힘을 사용했다.
[네놈들의 신과 잠깐 대화라도 하고 있어라!]
신과 신도들의 교류라는 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정확한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는 신의 변덕 혹은 배려로 인해 가끔씩 내려진다고 여기고 있으나 사실은 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차원과 세상의 경계를 이어 주는 '길'이 특정 조건을 만족해 더 견고해지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로 갈리는 것에 불과하다.
신의 힘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길'을 이용하면 경계가 무너지고 균형이 흐트러질 위험이 있기에,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가끔씩 생기는 기회를 이용해 신도들을 인도 한다.
인간들은 그것을 계시 혹은 신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악마가 이용하려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신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그런 대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능력이 부족하면 계시를 받기는커녕 신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기 때문이다. 삶을 이어 나가며 스스로의 격을 끌어올려 후천적으로 소통의 부담을 견뎌 내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한만큼, 그들 역시 신중하게 사람을 가릴 수밖에 없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무슨 신을 믿고 있는지 알고, 그 신이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길'을 알고 있으며, 거기로 사람의 의식을 강제로 떠밀 수만 있다면.
신성을 감당 못 하는 이로 하여금 강제로 의식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신을 사칭하여 계시를 위장할 때 써먹는 방법이었으나, 위급한 상황에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한 악마는 적을 무력화 시키는데 써먹기로 했다.
비록 성녀의 힘이 느껴지는 저 마족 하나만큼은 멀쩡히 신을 영접하고 돌아오겠지만... 그마저도 결코 빨리 돌아올 수는 없다. 계시와 신탁을 받는 동안 대상은 긴 시간 동안 극도로 취약해지는 법. 인간들이 엄중한 경비 속에서 성자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뭐야? 왜 갑자기 픽픽 쓰러져?"
그렇기에 악마는 자신의 계획대로 마족들이 무력화된 광경과 그걸 둘러보는 인간을 바라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마족들의 지원만 배제해도 저 인간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위협이 될 수준이었으면 이미 진즉에 차원 밖으로 튕겨 나가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안겨준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가할 폭력이 안겨줄 즐거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악마는 더이상 핏덩이가 아닌 멀쩡한 육체를 통해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
계시와 신탁에는 항상 전조前兆가 함께한다. 데오니는 그걸 자신들을 향한 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신의 부름을 받는 동안 그들의 의식은 육신을 벗어난다. 그 과정에서 외부적인 충격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가 칼로 찌른다면, 설령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공격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랬기 때문에 데오니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계시의 감각이 악마가 부린 사술로 인한 인위적인 결과라는 것을 단번에 이해했다.
상상도 못 한 오산이었다. 악마에 대해 서술한 기록서는 많이 있었으나, 이런 게 가능한 악마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힘이 강대하고 약하고를 떠나, 굉장히 긴 세월을 살아오며 차원을 왕래한 경험이 있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위험을 예상하지 못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르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도 동행한 형제들과 자신과 함께 싸우고 있던 인간을 향한 걱정 속에서 데오니는 신께 기도했다.
다행히 신은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걱정하지 말라고.
육성과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아니기에 데오니는 마신 에파가의 의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 오히려 노리고 있었던 일.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과 확실한 소통을 나누고자 했던 것이 신의 뜻이었다는 걸 이해한 데오니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신께서 안배하신 일에 의문을 품고 싶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움직이셔야 했단 말인가?
돌아온 건 강렬한 아쉬움이었다. 이런 편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소통이 힘들 정도의 상황이었고, 이런 편법을 사용했음에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신 에파가는 데오니의 의문을 해소해주기보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해답들을 던져 주는 형태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해답들조차 데오니에게 새로운 의문을 안겨줄 테지만, 마신 에파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
[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로군.]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감각이었지만, 그래도 필멸자 정도는 가볍게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이 느껴졌다. 육체의 구성을 완전히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기분이 좋아져서 방금 전까지 찢어 죽이고 싶었던 인간을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고통 없이 죽여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무언가 방해 받는다는 불쾌한 감각에 정말 오랜만에 시달린 악마는, 주변에 쓰러진 마족들을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간을 갈가리 찢어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팔 하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찢어냄으로써 공포를 안겨줄 요량으로 악마는 인간을 향해 돌진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 못 하고 있는 얼굴이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악마는 차오르는 기대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인간의 몸통을 갈라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 신체를 잃고 난 뒤 절망과 고통 그리고 공포로 물드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강제적인 현신이 만족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달려들었다가 얼굴을 처맞은 악마는 상황을 인지할 틈도 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뒹굴다가 벽에 틀어박혀 버렸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는 것도,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늦었다. 그 탓에 악마는 방금 일격으로 얼굴 반쪽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음에도 여전히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굉장히 어중간한 몰골로 인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넌 뭘 했길래 갑자기 마력이 느껴지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잘못 됐다. 아무리 힘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인간에게 이렇게 맞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마력에 짓눌려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 채 위압감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인간은 자신의 마력을 확실히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에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잘 걸렸다는 듯한...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대가리가 뽑히는 재밌는 마술 하나 보여 줄게."
갑자기 온몸의 마력이 외부의 무언가와 강제로 이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못 느껴본지 오래되고 뭐고를 떠나 아예 처음 느껴보는, 삶을 통틀어 처음 겪는 미지의 경험으로 인해 악마의 얼굴에서 빠른 속도로 미소가 사라졌다. 대체 이 불길한 감각은 뭐란 말인가?
"넌 아예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쉽네?"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악마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