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는 건 다 헛소리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그랬으니까.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성녀님에게 마신교의 기도법을 약식으로나마 배우는 것뿐이었다.
내가 모르던 출생의 비밀이 영혼 단계에서부터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은 했지만, 그게 이런 형태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당장 마신교의 성녀님은 그 한마디를 전달하고 어찌 신을 향해 그리 불경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느냐고 설교하기 시작했으나, 정말 미안하게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신 에파가께서 왜 저 말을 처음부터 전하라고 했겠는가.
정말 단순히 나의 잘못을 정정하기 위해서? 뭐, 정말 그런 소소한 악 감정이 있었을 수는 있다. 기껏 전생까지 시켜줬는데 숭배인지 욕인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 힘을 써 준 입장에서 좀 기분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감정적인 문제보다 효율성의 문제다.
저 발언은 증명서였다. 앞으로 저 성녀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뭐가 됐든 간에 진실이자 자신의 안배라고 나에게 알리기 위한 증명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심지어 자신를 섬기는 성녀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모든 내용들을 스킵하면서도 자신이 나를 지켜보고 도왔다는 사실을 나에게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명서.
그래서 결코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성녀님. 그보다 에파가 님께서 또 다른 말씀을 하신 건 없습니까?"
"...하아.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신도조차 아니면서 그 한 마디에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가 돌변하는 당신도 그렇고, 이걸 예견하신 에파가 님도 그렇고."
"거기엔 설명하기 힘든 아주 깊은 사연이 있다고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에파가 님께서 성녀님에게조차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 또한 그분의 안배에 의한 것일 테니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군요."
순간 성녀님의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마치 저지능 몬스터가 인간의 언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본 사람처럼 반응했다.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아, 아니. 이건 좀 억울하네요. 방금 전까지 당신이 보여 준 태도를 떠올려보세요. 지금처럼 말씀하실 줄 알면서 왜 그렇게 말하셨던 겁니까?"
"그렇게라뇨?"
"막... 그, 욕하고. 반말하고, 시정잡배처럼 행동했잖아요."
"전 존중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가려가며 말할 뿐입니다. 말이 통할 대상을 구분짓는 것도 있지만 말이죠."
방금 전까지는 그저 상급 종교쟁이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게 인생 2트의 기회를 준 신님을 섬기는 성녀님을 대하는 중이지.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몹쓸 새끼가 아닐까?
물론 그녀가 이야기하려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닌 듯했지만 내 삶의 방향성에 왈가왈부하는 걸 받아 줄 이유도 없었기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했다.
"후우... 좋습니다. 일단 에파가 님의 말씀부터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듣거나 해야 합니까?"
"...진심으로 물어보신거군요. 아닙니다. 그분의 뜻이 아무리 위대하고 존귀한들 저는 전달자에 불과한데 어찌 저를 세워 두고 숭배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는 그저 듣기만 하되, 차후 시간을 할애하여 신께서 전해주신 말씀의 뜻을 헤아릴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정작 그 말을 전달하는 자기 자신은 정갈한 몸가짐을 한 상태로 말씀을 전하고 싶은지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은 성녀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의 뜻을 가로 막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너무 이르다. 이미 충분히 많은 변수가 생겼다. 가호가 끝을 맺은 뒤 몰아칠 혼돈은 나의 눈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니, 지금은 주변의 가르침에 집중할 때이니라."
길 가다가 들었으면 점쟁이의 헛소리로 치부할 만큼 두리뭉실한 이야기가 신이 전달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와닿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별걸 다 경험해 보네.
나는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처럼 겸허한 자세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았다.
"가호가 끝을 맺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혹시 알려주신 게 있습니까?"
"그건 마족의 관례를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희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마신의 가호를 강하게 받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는 날 비로소 신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나아갈 자격이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고 하지요."
아실리에가 말했던 유년기의 끝인가 뭔가 하는 거랑 비슷한 맥락인가? 전생자 입장에서 들으니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저들이 그냥 미신처럼 믿고 있는 그 시기가 진짜로 신에게 보호받는 시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성녀님은 내가 고민에 빠진 걸 잠깐 보고 있다가 아직 남은 이야기를 마저 입에 담았다.
"계시의 때. 견고한 길을 통해 대면할 날이 올 것이니, 기다려라. 에파가 님께서 당신에게 전하고자 한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졸지에 고민할 게 많아져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나머지 이야기는 저에게 하신 말씀이었죠. 엘드미아 에가. 당신에게 협력하고 도움을 주라고."
"...마족인 성녀님 보고, 저를 도우라고 하셨다구요?"
"네."
"혹시 마족이 뭐 대대적으로 에파가님께 밉보이거나 죄 지은 거 있습니까?"
성녀님의 얼굴이 오묘한 의문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길래 이런 질문을 들어야 할 정도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이었기에, 난 그녀의 신앙심을 배려할 겸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최소한의 상황이 마왕군 지휘관의 죽음이고, 최악의 상황은 마왕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마왕군과 엮여 있는 다른 마족들이 복수로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죠. 에파가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셨던, 제 뜻을 가로 막지 않는다는 건 이런 제 행동을 막을 의향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아무리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돕는 건 별개의 이야기일 거 같아서 미리 말해 준 것이었는데, 성녀님의 반응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에파가 님께서는 결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엘드미아 님께서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마왕군에 피해를 입히는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구요?"
"아뇨. 제가 그들의 죽음에 관여한다 하더라도 그게 마족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무슨 광신적인 믿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간헐적으로나마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성녀님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판단 속에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 그건 마족을 위한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겠군요."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굳이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럼 일단 무기는 내려놓고 혹시 모르니 방패만 좀 잘 들고 계시죠."
난 조금 있으면 들이닥칠 우리 일행들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설득력 있는 변명을 준비하여 무기를 들지 않도록 해야 했고, 더 나아가서는 내 출생의 비밀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마신 에파가께서 내린 계시를 따를지 말지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심사숙고는 거의 끝나다시피 한 게 맞았다. 내 숙원이 무엇보다 우선 사항인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존재가 하는 조언을 들은 척도 안 할 수는 없었으니까. 세상이 다 뭐라고 하든 내가 뒤통수를 맞기 전까지 나는 오늘부터 마신교다.
"후우...당장은 동료들에게 설명하는 게 문제네."
센 일행은 강제로 묶여 있는 상황이니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가엔달 일행은 이야기가 다르다. 난 그들이 마족에게 어떠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쓰러진 마신교의 이단 심판관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성녀님의 말로는 악마의 사술로 인해 강제로 계시를 받는 상태에 빠져든 거라고 하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신성을 맞이해서 충격으로 기절한 상태라고 한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하니 저들을 안 보이게 치워 버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에휴, 그래도 깔끔해진 건 좋구만."
악마 새끼, 스펀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피를 쪽쪽 빨아 들인 덕에 온몸이 뽀송뽀송하다. 원래대로라면 말라붙는 피 때문에 매우 귀찮고 짜증 나는 상태에서 머리까지 써야했겠지만 적어도 그런 최악의 사태는 면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일단 갑작스러운 공격을 막기 위해 통로 쪽으로 다가가자, 머지않아 저 멀리서부터 거친 발소리와 함께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족?"
"으아아! 예카트리나 잠깐! 잠깐 멈...엥?"
그 선두에서 전차처럼 달려오던 예카트리나가 귀신같이 성녀님을 확인한 탓에 금방이라도 워해머를 휘두를까봐 온몸으로 막아섰지만 그녀는 극도로 경계하기만 할 뿐 선빵을 날리지는 않았다.
대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사교도 때문에 온 거 같은데, 볼일 끝났으면 가지?"
미친. 역시 예카트리나는 문명전사가 맞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