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예카트리나가 선공을 갈기지 않은 덕에 뒤를 이어 달려온 일행들과 성녀님 사이의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아니다. 비록 내가 이번 사교도 퇴치에 도움을 받았다고 열심히 어필하며 일시적인 중립을 요구한 게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대부분이 성녀님을 비롯한 마신교의 이단 심판관들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래, 대부분은. 바꿔 말하면 생각보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음음. 그렇구나. 좋은 분이네."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해야할까, 이미 내가 아무런 적의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던 아실리에는 내가 인종차별주의에 빠진 미친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서 만족한 것인지는 몰라도 웃는 얼굴로 성녀님과 악수까지 했다. 센은 마신교에 대한 편견 자체도 없을 뿐만 아니라 풀링 특유의 정신 나간 친화력이 용솟음치기 시작한 탓에 마족과 대화가 가능한 기회가 생겼다며 반겼다. 세네란은 아예 이 기회에 마족에게 직접 마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두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지만, 마지막 인물만큼은 의외였다.
"아하하! 이거 미안하게 됐어!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아 달라고!"
문명전사 예카트리나가 내 말을 듣고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성녀님의 어깨를 호탕하게 두드리며 십년지기 친구처럼 살가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야말로 문명전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지성인다운 면모였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마족에대한 평균 인식이 어떤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의 호탕함은 적잖게 예상을 벗어난 반응이었다.
오히려 렐리에가 그녀의 거리감없는 모습에 불안해하며 경고를 할 지경이었으나 예카트리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폭발에서도 도와주고, 신성 마법까지 사용하며 전투를 도왔으면 적어도 지금은 아군 아니겠어?"
"하지만 마족이잖아..."
"마족이 뭐 어때서. 머리에 뿔난 거 때문에? 우리는 조상님 중 용이 섞여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그러고 보니 러빌에는 용혈일족이네 뭐네 하는 게 있다고 했었지. 아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용도 뿔이 있으니 그게 그거 아니냐는 굉장히 단편적인 맥락의 사고가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최초의 폭발을 몸을 날려 구해줬다잖아? 미리 예견된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행동을 취했다면 종족을 떠나서 좋은 사람인 게 맞지. 설령 언젠가 다른 곳에서 서로의 신념을 걸고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야."
맙소사. 너무 멋있다. 평소에 순둥순둥하고 귀여운 상에 가깝던 예카트리나의 얼굴이 너무나도 근엄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나도 모르게 기립 박수를 칠 뻔 했네. 이 세상 사람들이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저는 데오니 비레라고 합니다. 마신교의 이단 심판관입니다."
한바탕 의견 조율을 마치고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한 성녀님은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감추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저 마신을 사칭한 악마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시가 있었기에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 당도했다는 것으로 깔끔하게 설명을 마친 그녀는 같이 싸운 나를 자연스럽게 지목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동료들은 그 모습을 딱히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죄다 모험가들이라서 그런가, 협력 후 호의적 관계라는 형태에 굉장히 관대한 반응을 보여줬다. 비록 아실리에는 귀를 까딱이며 뭔가 묘한 낌새를 느낀 듯했지만, 내가 동의하자 이내 별 말없이 다른 이들과 함께 바짝 말라 있는 시체들과 폐던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곳을 탐색하며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기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일행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생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서두를 떼기로 했다.
"그럼 성녀님과 저 친구들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성녀님이 어떻게 에파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 도울 수 있을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절하고 있는 이단 심판관들을 대신해 제단의 조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같이 남아 있긴 한데, 어차피 저건 이제 아무 의미 없는 돌무더기에 불과했다. 쥐고 있던 방패를 등에 걸친 성녀님과 함께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이단 심판관들을 편하게 눕히면서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성녀님도 딱히 생각해 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물론 당장에 뭘 도와달라고 한다던가, 무리한 요구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에파가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으니 무언가 짐작 가는 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혹시라도 내가 쪼는 거로 느낄까 봐 말을 덧붙여보았지만 그거랑은 연관이 없는지 여전히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태도를 보였다.
"에파가 님께서는 협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촉박한 상황이었던 탓에 그 뒤로 미처 전하지 못한 말씀이 많으셨지만... 그것만큼은 무엇보다 강조하셨죠."
마지막 이단 심판관을 똑바로 눕히면서 나에게 눈을 돌린 성녀님은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에파가 님께서 점지하신 용사라고 판단하고 모든 방면에서 도움을 드릴 생각입니다."
정작 나에게는 폭탄 발언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용사?
지나가던 지크프리트가 빵 터져서 땅을 치며 비웃을 소리다. 그런 내 생각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성녀님은 느릿느릿 고개를 내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용사에 준하는 존재' 라고 판단한다는 게 맞겠네요."
"그... 괜찮은 겁니까?"
"글쎄요. 교단 전체에 당신을 용사라고 알리고 지원하는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요? 당신에게 도움을 주는 건, 어디까지나 저라는 개인의 역량에 한해서 입니다."
성녀님의 말을 들어 보니 이번 계시 자체가 교단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이례적이고 비밀스러운 형태였다고 한다. 동료 이단 심판관들에게조차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하고 거의 강요에 가깝게 동행했다고 하니, 실상 그들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대대적으로 공표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당장 나부터 인간이 마신교와 별 연관도 없는 곳에 살면서 마신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아 전생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이 일어났을 때 해 줄 이야기를 적당히 꾸미며 말을 맞추는 동안 성녀님이 굉장히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사과했다.
"홀로 악마를 토벌했음에도 제가 도왔다는 형태로 말을 꾸며야 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다 에파가께서 인도하신 바이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원래부터 마신교에 뜻을 두고 계셨습니까?"
한없이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지만 성녀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쉬이 납득하기 힘든 반응이었나보다. 약간은 쌩뚱맞아 보이는 그녀의 의문이 왜 튀어나왔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신은 믿고 있었으나 그 분이 에파가 님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역시 에파가 님께서 아무 말 없으셨다면 당장은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절대 자신들의 종교가 전파될 리 없는 국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놈이 신의 이름과 전언을 듣자마자 갑자기 개종을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내가 사실은 다른 세계 사람인데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경험이 있어서 에파가 님께 충성충성 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무엇보다도 에파가께서 직접 언질을 준다 한들 내 주변에서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 자격있는 건 아실리에다. 설령 성녀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내비친다 하더라도 그건 양보할 수 없다.
"음. 괜찮습니다. 짐작하신 것처럼 매우... 신비로운 일이라서 무심코 여쭤본 겁니다."
다행히 성녀님은 확실하게 선을 지켰다.
그 뒤로도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짤막한 대화 몇 번을 주고받은 우리는 이단 심판관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만약을 대비해 다 무너진 제단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 우리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붉은 살덩어리 같은 정체불명의 무언가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악마 새끼의 머리통을 올려 놓은 돌 무더기 위에 놓인 주먹보다도 작은 그 불쾌한 덩어리를 보자마자 성녀님이 말했다.
"이건 악마의 부산물인가 보군요.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딴 걸 남기고 가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역겹기 그지없는 새끼네요."
내 진솔한 반응과 말투가 영 내키지 않은 것인지 슬쩍 도끼눈을 뜨며 눈을 흘긴 성녀님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그 역겨운 살덩이를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거 함부로 만지셔도 되는 겁니까? 딱 봐도 마력량이 장난 아닌데."
"예? 그게 보이십니까?"
"네. 보입니다. 에파가께서 주신 가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신을 사이에 두고 협력해야 하는 입장에서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대놓고 말하자 성녀님의 두 눈에 호기심이 일렁였다.
어쩌면 이 아가씨도 세네란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인 거 아닐까...?
이 성녀, 호기심이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