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땐 센 일행도 합류하여 한창 식사 중이었다.
얼굴만 봐도 지친 게 보일 정도라서 대체 뭘 하고 다닌 건지 궁금했지만 그냥 발품을 팔았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 센은 자신들의 성과를 간단하게 전해줬다.
"물건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돌아다녀보니 결국 상인들은 대부분 쉬쉬하는 상황이더라구요."
결국 모험가를 상대로 장사한다는 점에서 여관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들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거래 가능 여부가 아니었다.
"가격 협상은? 이런 상황이면 충분히 후려치고도 남을 거 같은데."
설령 이번 사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하더라도 약간의 불편함을 연기하는 것만으로 흥정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게 상인이니까. 시기가 시기인지라 모험가랑 거래하면 이웃에게 눈치가 보이네 뭐네, 사실은 장물 아니냐 같은 식으로 말하며 몰아붙이면 도시의 싸늘함에 압도된 어중간한 모험가들은 손해를 보면서도 거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그간 도시에서 쌓아온 신뢰와 협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죠. 아하핫!"
그래도 토박이 적급 모험가라는 짬밥이 장식은 아니었는지 센은 자신 있게 대답하며 웃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녀의 호언장담에 딱히 불안해 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나마 걱정거리 하나는 해결된 거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 사이에 자리 잡는 사이 긴 씨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조사하고 싶다는 건 잘하고 왔나?"
"예, 그래 봤자 아직 겉핥기에 불과하지만 당장 필요한 정보는 좀 주웠네요."
그 결과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늘어나버렸지만 굳이 일행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게 정말 엔벨데와 연관이 된 문제라면 우리가 개입할 게 아니라 반란 세력의 잔당 처리라는 명목으로 도시 혹은 왕실에서 나서는 게 맞다. 애당초 왕실에서도 엔벨데 숙청을 위해 꾸준하게 업보 스택을 쌓았던 것을 보면 이러한 경우를 간과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엔글렘이라는 도시와 여기를 관리하는 이들에게는 별개의 문제다. 단순히 습격을 받은 거였다면 방위 비용을 얻기 위해 얼마든지 수도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겠지만, 지금 이들은 표면상 한낱 도적들에게 예상도 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도시의 방위가 뚫린 상태다.
결과만 놓고 보면 명백한 능력 부족. 왕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간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데 소홀히 하고 있었다면 역풍을 맞고 왕실의 개입이 들어올 수준이라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길드의 협조를 구하고 책임을 숨긴 뒤 모험가 선에서 처리하려고 하고 있다. 왕실의 강압보다는 모험가 길드에게 이익을 떼주는 게 훨씬 싸게 먹힐 테니까. 그렇게 가설을 세우면 얼추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그놈의 정치판의 이해득실이 다 뭔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자꾸 이런 일이 엮이는 이유가 참으로 한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으나, 정작 머릿속의 일천 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은 스스로의 신세 한탄보다 앞으로의 경과에 더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센이 이야기했던 비밀 의뢰의 보수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앞선 가설들이 대부분 들어맞는다고 가정할 경우, 아무리 보수를 높게 받아도 제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인 놈들이 가져갈 이득에 비하면 한없이 비루하다.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레스롬 공작에게 편지 한 통 보내 사태를 알리고 생색 내는 편이 훨씬 이득인데 굳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이 사건을 잠깐이나마 방치할 경우 애먼 사람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 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평범한 도적놈들이었다면 그냥 과감하게 신경을 껐겠지만 아실리에의 말대로 마검 비스무리한 거라도 하나 쥐고 있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하나가 도시에 숨어 있는 꼴이다.
이 역시 평소였다면 조금 안타까워할 뿐 딱히 신경도 쓰지 않았을 문제지만, 거기서 이미 뒈진 엔벨데가 기가 막힌 활약을 해준다.
그 새끼랑 엮여 있는 놈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놈들이 살아서 도망친다면? 그로 인해 또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엔벨데의 남은 세력이 성공적인 깽판을 친다면? 그런 놈들이 모여서 사리사욕을 위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면? 그게 내가 모르는 엔벨데 추종자와 엮여 또 반란을 일으키겠답시고 난리를 친다면?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겠지만 상상만 해도 복장이 터진다. 내 편안해야 하는 인생에 있어 걸림돌밖에 되지 않을 놈들이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엘드미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어 보니 의아하다는 듯 두 눈을 굴리며 예카트리나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일행들이 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좀 피곤했나 봅니다. 요즘 정신없이 사건에 휘말리고 있었으니까요."
복장이 터진다고 굳이 여기에 하소연할 필요는 없지. 난 적당히 둘러대며 웃어 보였다.
"하긴. 악마하고도 싸웠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하네. 오늘 하루 정도는 조금 일찍 자는 게 나을지도."
아실리에의 조언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내가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깊게 관여할 필요는 없는거야. 죽기 싫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급하게 결론을 내린 나는 식사를 마치고 먼저 숙소로 올라가 쉬기로 했다.
◈
엔글렘 모험가 길드는 다른 모험가 길드들과 비교해 봤을 때 도시에 꽤나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상인들과 다양하게 협업하는 덕에 할인 받을 수 있는 품목도 많았으며, 의뢰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만큼 모험가도 많다 보니 의뢰의 평균 단가는 다른 도시에 비해 적은 편이었지만 충분한 양의 일거리 덕에 그 정도 단점은 모험가들에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다.
처음엔 좀 힘들 수 있으나 꾸준히 활동만 하면 충분히 벌 수 있는 곳. 엔글렘은 모험가들에게 그런 위치로 자리 잡았다.
거기엔 수십 년 동안 길드장으로 활동해 오며 많은 인사들과 친분을 다진 길드장 그론즈엘의 역할이 컸다. 쥐색 반곱슬 머리를 적당히 길러 넘긴, 평범하게 은퇴한 중년남성 모험가처럼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는 도시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였다.
문제는 그 모든 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활동하여 얻어낸 결과가 아닌, 담합과 의뢰비 착취 그리고 다량의 일거리를 핑계 삼아 보수를 절감하며 쌓아 올린 부를 기반으로 한 뇌물 공세로 얻어낸 결과였다는 점이다.
그의 머리는 나름 비상했으나 깨끗하다고 할만한 인물은 결단코 아니었으며, 이번에 일어난 습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지니고 행동에 나섰었다. 왕실은 고대 지하 수로 위에 지어진 도시의 요인들에게 그 관리 책임을 엄중하게 무는 편이라서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도적들이 수년간 방치되다시피 했던 수로를 통해 도시 내부로 진입하여 약탈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영주의 표정은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만한 볼거리였다. 그론즈엘이 제시한 내용을 듣고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 것까지 포함해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왜곡하고 사람을 고용하여 습격 과정에 돈에 눈이 먼 모험가가 도적을 도왔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그걸 기회 삼아 일부 여관과 상인들의 담합을 돕고 이익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았다. 귀족과 고위 관료들에게는 큰 빚을 남겼다. 묘지와 장례 비용으로 남기는 돈도 상당히 쏠쏠했다. 그론즈엘에게 이번 습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불과했다.
그 거위를 몰고 온 도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몰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지하 수로의 통로가 붕괴된 탓에 놈들은 꼼짝없이 미로같은 수로 안에 갇힌 상태였다. 처음엔 그대로 처리해 버려서 공적을 쌓고 명성을 얻을까 했었지만, 그론즈엘은 그 도적들마저 골수까지 빨아먹을 만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의 계획 아래 도적들의 위치는 의도적으로 숨겨지고, 도시는 봉쇄령이 떨어졌으며, 남은 모험가들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계속 돈만 쓰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론즈엘은 적당한 시기에 도적들을 해결하고 돈이 궁해진 모험가들에게 보수가 후려쳐진 의뢰를 대량으로 내놓을 생각이었고, 거기서 발생한 차익은 당연히 그의 개인 자산이 될 터였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슬슬 청소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마땅한 도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일개 도적들을 정리하는데 난항을 겪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검 사용자.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도적 두목은 그 진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었고, 제어에 실패했다. 그론즈엘은 그 사실에 딱히 악감정을 지니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덕분에 일이 편해졌으니. 지금은 그저 용도가 다 했기에 치우려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더니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외부에서 실력이 검증된 모험가가 들어왔다.
수도 길드장이 직접 신용을 보장할 정도로 고평가받는 모험가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했다. 심지어 혼자 온 게 아니라 적급 모험가 열 명을 대동하고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론즈엘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두 눈에 불을 켤만한 보수를 제시했음에도 그는 의뢰를 거절했다. 직원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열 한 마리의 말 뒤에 가득 실릴 정도로 많은 전리품이 원인인 듯했다. 그론즈엘이 제시한 금액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모험가란 원래 당장 배가 부르면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족속이 대부분이었으니 납득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배가 고프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론즈엘은 시기적절하게 눈에 들어온 도구를 놓아줄 생각 따위 전혀 없었기에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내에 그들이 조바심에 휘둘리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도 길드장이 보낸 정보 중에는 '이질적인 사고방식과 거기서 비롯된 돌발 행동에 따른 유의사항'이라는 내용도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은 결국 똑같다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러온 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