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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27화 (227/412)

제대로 된 휴식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하다고 부를 만하다.

근 일주일 만에 숙소에서 맞이한 숙면은 거기에 완전히 부합했고, 덕분에 나는 맑은 정신과 개운한 몸뚱이를 만끽하며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어둑한 창밖은 아직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고 말하는 듯했으나 내 체내 시계는 곧 아침 해가 밝아올 것이라고 알려 줬다.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다.

"빨래하기 알맞은 힘세고 강한 아침이군."

고개를 돌려 옆 침대를 바라보니 아실리에는 아직 피로가 남았는지 한껏 이불을 두른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여행 가방에서 텐트와 모포를 꺼내 챙겨든 나는 일단 여관 뒤편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아무리 좋은 여행장비를 구입해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상하기 마련인 법. 아침 식사 전까지 텐트와 모포의 세척을 마무리 지을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둘 다 마르려면 한세월이니 조금 찜찜해도 옷가지보다 먼저 빠는 편이 낫다. 막말로 옷은 좀 늦게 빨아도 방에서 대충 말리면 마르니까. 정령님들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세탁이 끝나겠으나, 지금처럼 여건이 될 때는 직접 하는 편이 마음편했다.

괜히 나중에 진짜 도움 필요할 때 삐져서 안 도와주면 나만 고생이니까.

"어라? 빨리 일어나셨네요 에가 씨?"

그렇게 우물에 도착하자 나처럼 텐트와 모포를 한 움큼 들고 있다가 이제 막 내려놓는 중인 렐리에와 예카트리나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렐리에, 예카트리나. 두 분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모험가들에게 밀려서 제때 세탁할 수 없을 때가 많잖아요. 그러다보니 평소에 습관처럼 하던 건데, 일어나고 난 뒤에야 이 도시 상황이 어떤지 떠올라버렸지 뭐예요."

습관대로 움직이느라 지금 이 도시에서 여행장비가 지저분한 모험가는 우리 정도밖에 없다는 걸 깜빡했나보다. 이미 잠이 다 깬 것 같은 렐리에와 달리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는 예카트리나가 바닥에 내팽겨친 모포 위로 쓰러지다시피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덕분에 나까지 끌려나왔지. 좀 느긋하게 하자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니깐?"

"너 혼자 들고 움직였다간 계단에서 굴렀을 걸. 아니면 질질 끌면서 내려왔거나."

그러고 보면 렐리에는 유독 육체적인 활동에 취약했다. 가끔 저 아가씨한테 콜라 캔을 건네주면 뚜껑 못 딸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도 물 바가지 한번 퍼서 나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 부어 버리기 전에 일어나기나 하시죠?"

"거짓말도 싫어하고 진실도 싫어하다니. 하여간 마법사란."

문명전사 예카트리나가 내뱉은 촌철살인에 진심으로 감탄해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친 탓에 렐리에가 잔뜩 뿔난 얼굴로 나에게 물을 부어 버리려는 등의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결국 여차저차해서 무난하게 세탁을 마칠 수 있었다.

잔뜩 젖은 텐트와 모포를 예카트리나와 함께 서로 힘껏 짜준 뒤 방까지 들고 올라와 건조대에 말리는 과정까지 끝마쳤을 때쯤에는 내 부산한 움직임 때문인지 아실리에도 슬슬 잠에서 깨어 반쯤 감긴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세탁까지 마친거야? 일찍 일어났나보네?"

"마침 렐리에와 예카트리나를 만나 서로 도와주면서 빠르게 정리했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아실리에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며 잠깐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 순간부터 맛있는 수프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일 모험가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싶었던 우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1층 홀로 향했다.

그렇게 홀에 자리 잡고 아침을 주문하자 딱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둘씩 일행들이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을 기다리게 되었다.

"확실히 열 명이 넘어가니 엄청나군."

아직 목이 잠긴 가엔달이 내뱉은 한 마디는 모두가 공감하기에 충분했다. 밖에서 야영을 할 때도 이렇게 모여 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인지라 체감이 잘 안 됐는데, 식사를 위한 식탁 하나를 두고 둘러앉으니 괜히 든든해진다. 누가 오더라도 이 파티를 보면 싸움을 걸기보다 피해가려고 마음 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일행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성실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껄껄. 맞는 말일세. 이런 경우가 참 흔치 않은데 말이지."

그 와중에 오고 가는 화목한 대화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한테만 쪽을 못쓸 뿐이지 센 일행도 다른 이들과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고, 세네란도 렐리에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모험가 파티의 모습. 그림으로 그린 듯한 광경에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도적놈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댈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여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에, 엘드미아! 모험가 엘드미아 에가 님! 계십니까!"

"...쿤즈 씨?"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싸늘한 겨울바람을 맞았을 텐데도 흠뻑 땀에 젖어 있는 쿤즈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에, 엘드미아 님!"

결코 좋지 않은 그의 표정과 흔들리는 동공이, 방금 전까지 내가 품었던 생각이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알려왔다.

"노, 놈들이 길드를 습격하고 물품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열린 쿤즈의 입에서 좋았던 내 기분을 단숨에 박살 내는 소식이 튀어나왔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설마 경비로 고용한 모험가들마저 녀석들에게 넘어갈 거라고는..."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세상 잃은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는 쿤즈와 달리 다른 길드원들은 그저 '좆됐구나.' 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마구간은 처참했다. 다른 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와 아실리에가 타고 왔던 오가토르프 가문의 군마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분명 말에 실어놓았을 전리품들은 싹 다 털린 상태로.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일을 이따위로 처리할 거면 관리비는 왜 받아 처먹어!!"

센은 그야말로 내 분노 대변인처럼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칼스도, 파티 최고의 묵언 수행자 바이제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메르델라는 오히려 그녀와 함께 길길이 날뛰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거기에 렐리에까지 가담한 탓에 마구간은 세 여성들이 만들어 내는 삼중주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야, 야간 경비를 맡은 교대 인원이 왔을 땐 이미 일이 터진 뒤였습니다. 다른 말들은 데려간 흔적이 있었으나 저 말들은 저항이 거센 탓인지..."

나? 나는 화가 나기보다 기가 찼다.

이 상황이 암시하는바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한 번 기가 차고, 여기서 진짜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게 쿤즈 하나뿐이라는 거에 한 번 더 기가 찼다.

도망칠 길마저 막혀서 도시 안에 고립된 새끼들이 음식도 아니고 자질구레한 전리품 약탈을 시도했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을거라 생각한 건가? 어제 나눈 대화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면 반신반의하면서 확인이라도 해봤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게 길드장이다. 그럼에도 꽁무니조차 내비치지 않는다는 건 이 상황을 이용해먹기 좋은 극적인 등장을 노리거나, 법을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당연히 후자는 있을 수 없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거절한 의뢰를 받게 만드려고 내 돈주머니에 구멍을 뚫은 뒤 보상을 핑계로 의뢰까지 떠넘기는 식의 계획을 구상중일 거 같은데, 어림도 없지.

난 손을 들어 그녀들을 진정시킨 뒤 짧게 말했다.

"됐고. 길드장 불러."

그러자 지금까지 쿤즈가 열심히 사과할 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여자 접수원 하나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쿤즈를 가로 막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실례지만 모험가님.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우나 길드장님께서는 현재..."

"한 번만 봐준다. 규칙 알고 있으니까 길드장 불러. 뒈지기 싫으면."

쿤즈보다 직급이 높은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 정당한 권리 행사를 막으려고 드는걸 용인해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내 친절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표정까지 굳혀가며 굳이 입을 열었다.

"도시 내에서의 폭력 행사는..."

그마저도 딱히 들을 필요는 없는 말이었기에 듣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으로 귓방망이를 올려붙였을 뿐.

-쫘아악!!

"케흑?!"

마력을 운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한 일격에 접수원의 고개가 돌아가며 피와 이빨이 튀겼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경비! 경비대를...!"

-피이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구는 접수원을 본 다른 접수원들이 두 눈을 부릅 뜨며 나서려는 걸 휘파람으로 바늘을 움직여 막았다. 그래도 상식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지 딱 봐도 흉기처럼 보이는 게 제멋대로 움직이며 자신들을 겨누자 녀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랄들을 해라. 청급 모험가라고 아주 개병신으로 보이냐?"

그 꼴이 하도 어이가 없서 또 기가 찰 노릇이었으나,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건 그들 뿐만이 아니라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모험가 길드 내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보호하기로 명시한 화물 및 운송 수단에 한해 예기치 못한 파손 및 분실이 일어났을 경우, 이와 관련된 보상의 절충 및 지불을 위한 교섭은 길드장이 직접 구두로 설명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보장해야만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길드의 손실은 왕국 연합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이루어진 동의 하에 법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기억하고 있던 모험가 보호법을 입에 담으니 그제서야 뒤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꿈과 낭만만 파먹고 사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험가들은 너무나도 법에 관심이 없다. 가엔달이나 긴 씨조차 감탄하고 있는 거보면 말 다 했지.

그나마도 최소한의 보호만 해주는 터라 조항도 별로 많지 않던데 왜 안 읽나 몰라.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려고.

"다시 말한다. 길드장 불러."

물론 난 아니다.

길드장 이 새끼가 무슨 배짱으로 이딴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그 새끼는 오늘 전리품 뿐만 아니라 한 필당 이티스엘 금화 서른 개에 육박하는 오가토르프 가문 군마를 두 마리나 해 먹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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