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보고를 듣게 되었을 때 그론즈엘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쿤즈의 손에 이끌려 내려온 마구간에서 얼굴 반쪽이 두 배로 부어오른 직원을 확인하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모험가의 시선을 확인하고 나니, 의심해야 할 건 귀가 아니라 상대방의 상식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론즈엘은 친절한 길드장의 가면을 쓴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접수원에게 향했다.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들킨 건가? 그럴 리 없다. 법과 규칙을 잘 알고 있다고 막 나가는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건 쉬이 믿기 힘들었다.
이곳은 동네 시장이 아니라 한 도시의 모험가 길드다. 뒷배가 없는 이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뒷배가 있는 이들은 이해관계를 염두해서 조심하기 마련인 모험가 길드.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한들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그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랬기에 그론즈엘은 갑자기 자신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져야만 했다.
그리고 뒤늦게 몰아친 격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을 땐 옆구리를 걷어찬 발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크헉!"
한때는 모험가였다고 하나 너무나도 머나먼 과거였다. 싸움과 먼 생활을 이어온 몸은 방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저 고통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몸을 보호하고자 양손으로 머리와 목을 보호하며 몸을 둥글게 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협상에 관한 것을 의미하는 거였기에,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폭력은 최근 느껴볼일 없었던 공포심마저 불러일으켰다.
"...?"
하지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끙끙거리면서도 의아함에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딱 봐도 전사인 청년이 들어왔다.
"협상 전에 속여 먹으려고 해서 한 대, 그로 인해 내 시간을 날려 먹었으니 또 한 대다. 일어나."
참으로 건방친 태도에 눈이 돌아갈 뻔 했으나, 머릿속에서 재차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렸기에 그론즈엘은 침음을 흘리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접수원 몇몇이 그에게 다가와 부축하는 것을 뿌리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가며 억지로 고맙다는 말까지 입에 담은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년이 처음 내뱉은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길드장 그론즈엘이오. 절차에 맞게 응대하지 못한 것은 사과하겠소. 허나..."
"'허나'는 없어. 그에 따른 대가는 너희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지 내가 배려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넌 이미 선을 넘었으니 귀찮게 말장난하지 마라."
당장 뒈지고 싶지 않으면. 아닌 게 아니라 청년은 그대로 허리 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바닥에 내리꽂아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한 건 크게 하고 밖에서 들어온 모험가가 길드의 비밀 의뢰를 거절하자마자 그의 물건이 사라지고 말들이 죽었다. 심지어 길드의 마구간에 정식으로 맡겼음에도 저항의 흔적은 말들의 반항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고작. 참 편의성 좋게도 길드에서는 그게 고용한 모험가들의 일탈이라 칭하는 주제에 정확하게 도시에 문제를 야기하던, 비밀 의뢰의 목표였던 도적놈들의 짓거리라 확신하는군.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온 주제에 똑같은 길로 도망치지 못해 고립되어 있을 뿐인 도적놈들 말이야."
그론즈엘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청년의 의심은 타당하지만 겨우 그딴 의심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말이 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 심리는 억울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자신이 열심히 짜고 있던 판을 대충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다 갈아엎어 버리고 있는 미친놈을 향한 분노에 가까웠다.
"우연의..."
"우연을 가장하려면 똑바로 했어야지. 그래도 일단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그건 나중에 계산하고. 저거 어떻게 보상할 거냐."
한순간 감정에 휩쓸릴 뻔했던 것을 겨우겨우 이성으로 다잡으며 그론즈엘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청년은 열 명에 달하는 모험가들과 여전히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들어온 모험가'들'이 아니라 모험가라는 표현을 썼다. 심지어 전리품에 대해서는 아예 자신의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뒤에 있는 이들이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건, 그들과는 동료 관계가 아닌 고용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
열 명이 넘는 적급 모험가를 고용해서 파티를 꾸릴 정도의 재력이 있으면서 수도 모험가 길드장에게도 평가가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빌어먹을, 귀족인 건가?'
기사 가문 혹은 기사를 꿈꾸는 철없는 귀족 자제들이 가문의 재력을 등에 업고 모험가 일을 하는 괴상한 취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외엔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그론즈엘은 당초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례와는 별개로 당연히 죽은 말들은 금전적으로 충분히 보상해드릴 겁니다."
결코 비굴하지 않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듯이. 그는 억지로 화를 참아내는 시늉을 했다.
원래는 도시를 습격한 도적들을 처리한 뒤, 그들이 취한 시민의 자산을 파악하고 환원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버는 동안 적당히 전리품의 일부를 빼돌려 부차적인 수익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모험가의 전리품따위 도적놈들 손에 넘어감과 동시에 증명이 불가능한 것과 다름없으니까.
모험가가 눈이 돌아가서 의뢰조차 받지 않고 도적들을 처리하더라도 의뢰비를 지급하며 적당히 원만하게 조율할 계획까지 세운 상태였다.
죽어 버리면? 도적놈들의 소굴이 아니라 은닉처에 있는 전리품은 고스란히 그의 재산이 되었겠지. 그 과정에서 말이 죽어 버린 건 예상 밖이었으나...
"너 저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보고 대답하는 거냐?"
"...무슨 소립니까?"
청년이 그의 생각을 끊으며 던진 질문에 그론즈엘은 질문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가서 보라는 듯이 말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몸을 틀어 길을 만들어줬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정중한 동작이 심히 미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주춤거리며 죽은 말의 곁으로 다가가 엉덩이에 찍힌 낙인을 확인한 그론즈엘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 오가토르프?!"
방패와 검을 중심으로 그려진 문양. 이티스엘에서는 모르는 이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가문의 상징.
좀 덩치가 큰 말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뒤에 있는 청년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한 필당 이티스엘 금화 30닢이 넘어가는 가문 전용 군마다. 순수 몸값만 그 정도니, 훈련 및 유지에 따른 피해액은 나도 모르겠네."
"어, 어떻게 이, 이게..."
"신원 증명이 끝난 검증된 모험가가 어떻게 오가토르프 군마를 멀쩡히 타고 다니냐고? 훔친 건 아니지. 그 외에 더 설명할 의무가 있나?"
당연히 그런 의무는 없었다. 모험가가 이런 말도 안 되게 비싼 명마를 끌고 다닐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론즈엘의 머릿속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배보다 배꼽이라는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청년이 말한 대로 금화 30닢은 '몸값'에 불과하다.
군마는 기사와 같다. 그냥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 '군용'으로 통제되고 관리될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만큼 비싸다. 만약 저 말이 필수 훈련을 전부 마치고 한창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나이대라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토해내야 한다.
길드 재정에서 빼내더라도 치명적인 금액이다. 허나 더 큰 문제는 이게 사고가 아니라 계획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계획을 발안하고 실행에 옮긴 게 그론즈엘 본인이라는 점이었다.
꼬리가 잡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일처리를 했다면 모르겠으나, 그론즈엘은 완벽히 감추지 못할 바에야 타격이 없는 수준의 사건으로 더 큰 죄를 가리는 편에 속했다.
그의 계획에는 도적 문제만 해결하면 원만히 넘어갈 수준의 비리와 월권이 적절히 뒤섞여 있었다. 감출 수도 없고, 굳이 감출 필요도 없는 수준의 소소한 범법. 차후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포장이 가능한 수준의 일탈.
당연히 그 계획에 금화 120개짜리 채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설령 모든 일이 좋게 좋게 끝나더라도 채무 중 대부분은 그가 책임지게 될 것이고 그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왕창 깎아 먹을 것이다.
그간 빼돌려온 자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불법적인 수익은 언제나 돈세탁을 필요로 했고, 당장 쥐고 있는 현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전부 투자와 뇌물을 염두해 들고 있는 돈이었기에 이대로 가면 세탁 중이던 물건들을 헐값에 파는 '손해'가 발생한다.
겨우 말 두 필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그론즈엘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 명예와 엔글렘 모험가 길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사비를 동원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당당하게 몸을 일으키며 위엄을 되찾기 위해 힘 있는 어조로 웅변하듯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한 우연의 일치가 있었다고 한들 이 약탈은 저희와 무관한 일. 모험가님의 전리품을 훔쳐 간 도적들의 저의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나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디 어제 거절하셨던 의뢰에 대한 결정을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일단은 도적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놈이 정말 그 마검 소유자를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는 관심없었다. 차라리 가서 죽어 버리면 이 빌어먹을 군마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생기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도시 경비대를 위협할 정도의 마검을 일개 청, 적급 모험가들이 멀쩡히 막아 내긴 힘들 것이다.
못해도 큰 피해를 입겠지. 그 시기를 잘 노린다면... 원거리 기습을 시도 할 만큼 틈이 생기겠지.
원래 거짓과 죄를 덮으려면 더 큰 거짓과 죄를 지어야 하는 법이다. 상대방이 귀족이라 하더라도 의뢰 중 사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모험가 본인이 감당해야할 문제이니 자신에게까지 타격이 올 일은 없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네가 바라는 형태로 끝나진 않겠지만."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며 바닥에 꽂아 두었던 검을 뽑아 검집에 넣는 청년을 바라보며 그론즈엘은 조용히 분노를 불태웠다.
그건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에 금이 가게 만든 이를 향한 분노였다.
그 뒤로 제 일행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광경까지도 이를 악 물고 응시하며 온몸을 휘감는 분노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그론즈엘은, 뒤늦게 저 건방진 청년이 모험가 길드장인 자신을 앞에 두고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 번 더 분노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면 다른 감정이 분노를 대신했겠지만.
당연히 그론즈엘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