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를 떠나기전, 길드장이 작성해서 내놓을 배상 증명서의 확인은 세네란과 아실리에에게 부탁했다.
"그럼 앞으로의 유익한 관계를 위해 힘 좀 써볼까."
단순히 수락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어째서인지 의욕이 충만해진 세네란을 제외하면 변수는 없었다. 내가 도적들을 처리하겠다고 하니 길드장이 처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춤거리면서 쫓아와서 정보를 제공해준 쿤즈의 투철한 직업 정신 정도?
여관으로 돌아와서 그나마 좀 큰 방인 나와 아실리에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자리 잡고 앉은 다음, 그가 넘겨 준 문서를 주욱 읽은 소감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누나 말이 맞았네."
관리되지 않은 지하 수로. 놈들은 그곳에 있었다.
"왜 도시와 길드가 자연스럽게 협업 중인지 확실해졌네요. 고대에 제작된 지하 수로는 관리비 명목으로 도시에 많은 지원이 나오지만, 그만큼 문제가 생겼을 경우 책임 소재를 명백하게 따지고 엄벌에 처하기로 유명하니까요."
"껄껄껄. 재밌겠군. 흔히 있는 경험은 아니야."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렐리에와 고대에 제작된 지하 수로라는 말에 드워프답게 즐거워하는 긴 씨를 보고 있자 하니 이 파티도 일반적인 감각과는 참으로 거리가 멀다.
이건 엄연히 도시에 만연한 비리의 증거다. 일반적인 모험가들이라면 거기에 엮였다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거나 입막음 당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엔달도, 예카트리나도 그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센 일행들마저도 자신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엔 가엔달 파티와 비교해서 꽝 복권인 줄로만 알았던 것과 달리 그들도 결국은 십수년간 구르고 구른 적급 모험가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저... 엘드미아 님? 이대로면 길드장이 무조건 저희를 습격할 거 같은데, 혹시 예상하신 건가요?"
동행이후 유독 말수가 적어진 메르델라가 정말 오랜만에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주었다.
"내가 예언가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예상하겠어. 그 인간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실수해서 엮인 거지."
오가토르프 가문은 왕실에 충성한다.
그가 어떤 뇌피셜을 돌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미 오가토르프 가문의 문장이 찍힌 말을 본 순간 내가 이 비리를 오가토르프 가문에 보고할 거라는 식으로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되면 비리를 가리기 위해 열심히 세우고 있던 다리가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금화 60개는 가볍게 뛰어넘을 절망적인 미래가 그를 맞이하겠지.
놈에겐 그걸 회피할 방법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파멸을 피할 수 없으니 파멸을 미루기 위한 악수만이 남았을 뿐.
"...그럼, 혹시..."
"이 비리에 대한 정보가 오가토르프 가문에 넘어가 왕실에 알려질 걸 걱정해 내 뒤를 친다면? 당연히 길드장은 죽는다."
한번 죽을 뻔한 당사자인지라 굉장히 말을 조심히 꺼내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확실하게 말하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오히려 내가 조금 당황했는데, 어째서인지 폭탄 발언과 다를 바 없는 내 말을 듣고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길드장이 제 뒤통수를 친다면 대충 습격자 몇 명 증거 삼아 데려간 뒤 그 자리에서 죽일 겁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마구간에서도 넌지시 제가 주체고 여러분들은 별개인 것처럼 말했던 거구요. 놈이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의도에 맞게 오해했다면 저희의 관계를 고용인과 피고용인 정도로 여기고 있을 테니 여러분들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요."
혹시나 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음에도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그러니 원치 않은 분은 여관에서 대기하세요.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혹여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확실하게 이야기하자, 한 명도 빠짐없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뢰 준비를 이어 나갔다.
솔직히 대체 왜 죽이냐는 의문 하나 정도는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내가 어색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들 왜 반응이 그러냐고 되물어보기도 민망하다보니 난 뻘쭘하게 눈동자나 굴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센 일행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가엔달 파티 앞에서 신념을 부르짖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그런 나의 의문은 아실리에와 세네란이 무사히 배상 증명서를 받아온 다음, 내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풀리게 되었다.
"어라? 나야 엘드미아랑 협업이 필요한 입장이니 돕지만 여러분들은 딱히 그럴 필요 없지 않나?"
세네란이 돌직구로 질문을 던져 줬거든.
그 적나라한 질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가엔달 파티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크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한 차례 폭소가 훑고 지나가기가 무섭게 예카트리나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동료를 돕는 건 필요에 의한 게 아니야.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지. 하물며 나쁜 새끼들 치겠다는데 후환이 두렵다며 덜덜 떨 수는 없잖아?"
그녀의 말이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엔달 파티의 모습이 존나 멋있어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세네란과 아실리에를 떠나보낸 뒤에도 한참 동안 분을 삭히며 책상에 앉아 있던 그론즈엘은 자신이 분질러먹은 만년필을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얼굴만 몰랐을 뿐 그도 황금의 마법사라는 이명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세네란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고, 아무런 자문없이 가볍게 써 내려가던 배상 증명서가 거대한 족쇄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몸집을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미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끔찍한 지출 뿐이었다.
"길드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내게."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길드장이 된 뒤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 오며 신용을 쌓아온 몇 안 되는 사업 동료였으니까. 대답과 동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세 명의 방문객 중 가운데 선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 길드장. 어떤 미친놈이 댁한테 폭력을 휘둘렀다더만?"
깔끔한 복장에 정갈된 모습과 달리 우락부락하고 전투의 흉터가 얼굴 곳곳에 산재해 있는 남자였다. 다른 두 사람은 마치 경비라도 되는 것처럼 방문을 사이에 두고 앞짐을 진 채 꼿꼿하게 섰고, 남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입고 왔던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얹어두며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만 보면 정말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용병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정작 남자의 행동가지 곳곳에는 예절이 묻어난다. 오랜 세월 엔글렘에서 구르고 구른 그론즈엘의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독특한 남자였다. 스스로도 불편한 걸 그다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외투를 벗자마자 와이셔츠 소매를 풀어 걷어 올리면서도 남자는 예의라는 옷을 억지로나마 입으려고 노력했다.
과거 왼팔이 잘려 나가는 사건이 있었던 탓에 살짝 색이 다른 두 팔을 들어 올려 소파에 걸친 남자가 능글맞은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짐작이 맞으면 그 괘씸한 친구도 지하 수로에서 함께 사라지길 바라는 거 같은데."
"그게 바로 내가 자네를 신임하는 이유지. 말이 필요 없다는 점."
표면상 적급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으나 남자의 주 업무는 용역 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침묵과 눈치라는 특출난 미덕이 함께 했고, 점차 동료들을 모아 규모를 키우더니 이제는 사업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사람을 잡는 것만 놓고 보면 그들은 자급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인간 사냥꾼이다. 적급 모험가 열 명과 돈 밝히는 마법사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사냥꾼.
그론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둔 봉투를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묵고 있는 여관과 인원, 대략적인 장비의 정보라네. 두 파티나 고용한 거 같은데, 한쪽은 이곳에서 꽤 오래 활동한 메르델라 파티야."
"아, 그 성질머리 더러운 마법사? 근데 센 파티 아니었나?"
"전투는 메르델라, 교섭은 센이 맡아서 하지. 문서 상으로는 메르델라 파티가 맞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가엔달 파티지."
"이런, 수도의 대머리가 여기까지 왔나. 솔직히 그 파티는 너무 버거운데."
특정 의뢰를 계기로 어느 순간 갑자기 뭉쳐 다니기 시작한 가엔달 파티는 구성원 넷 전부가 위협적이었다. 남자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기습을 하더라도 시작부터 별을 품은 렐리에를 죽이고 시작하지 않으면 적잖은 피해를 감안해야 하며, 그 뒤로도 망치가 아니라 공성추를 들고 다니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여전사 예카트리나의 육탄 돌격에 대한 대처까지 해야 한다.
솔직히 남자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받고 싶지 않은 의뢰였다. 앞서 말했던 기습에 실패한다면 죽는 건 그들이 될 정도로 가엔달 파티는 실력있는 모험가들이었다.
"목표는 그 고용주야. 파티원들은 내버려 둬도 돼. 어차피 그들에게는 전리품의 권리가 없어. 고용주가 죽으면 알아서 찢어지겠지."
"흐으음. 두 친구들 모두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과연 어떨지... 아무튼, 그래서 대망의 고용주는 누...구..."
영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업무용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문서를 살펴보던 남자의 손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 멈췄다.
"엘드미아 에가라는 청급 모험가라네. 그를..."
등을 돌린 탓에 그 반응을 미처 보지 못한 그론즈엘이 느긋하게 설명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남자가 그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그만두쇼."
"죽...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만두라고. 아니, 당신이 그만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난 이번 일에서 빠질 거요."
순식간에 사색이 된 남자는 마치 자신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처럼 정갈하게 문서 봉투를 접어 탁자 위에 올려 둔 뒤 황급히 코트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어이가 없어진 그론즈엘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옷자락을 잡으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이보쇼 길드장.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엔글렘에서 정치 놀음에 아무리 만취해 있었다고 하지만 요즘 정보에 관심이 없어? 단두대를 건드려? 엔벨데 꼴 나고 싶어?"
최대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 그론즈엘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남자였지만 있는 대로 구기고 있는 표정을 억지로 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론즈엘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얼마 있지도 않은 동정심을 유발했다.
남자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깊은 한숨과 함께 진심 어린 충고를 던졌다.
"씨발. 당신 진짜 재수 좋은 거야. 나 아니었으면 이 의뢰 받았을 다른 놈들도 다 뒈지고 당신도 뒈졌을 테니까. 나도 귀가 있어서 당신이 이번에 이 인간한테 뭘 했는지는 이미 들었어. 씨발 한쪽 귀가 막힌건지 엘드미아라는 이름까지 안 들어온 게 화딱지가 나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와이셔츠 소매를 내리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코트를 걸친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그론즈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짧게 말했다.
"튀어. 오늘 밤, 내일 이런 거 따질 시간 없어. 지금 당장 튀어. 이 도시에 있는 거 처분할 생각 말고,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그냥 튀어. 어차피 상단 은행에 넣은 자산은 어디서든 꺼낼 수 있잖아. 그거로 먹고 살아."
"무, 무슨..."
"이 인간 숙원이 그래. 맹세컨데, 어영부영 남아 있다가 이 인간이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면 당신 무조건 죽어. 명심해, 이건 그간 우리가 좋은 사업 동료였기에 해주는 마지막 조언이야. 진짜로."
남자는 그론즈엘이 납득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치 이 방에 자신이 있는 시간조차 줄이고 싶은 것처럼 서둘러 자리를 떠날 뿐. 그를 따라 방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감정이 없는 것처럼 덤덤하게 서 있던 이들이 길드장의 방을 벗어나자마자 의아한 얼굴로 남자에게 질문했다.
"대장? 괜찮은 겁니까?"
"뭐가?"
"길드장에게 하신 조언도 그렇고, 의뢰를 거절했다는 걸 알게 되면 소문이..."
남자는 화내지 않았다. 부하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부하의 눈앞에서 자신의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명성 조금 깎는 게 뒈지는 것보단 낫지. 여기에 끼어들면 팔이 잘리는 게 아니라 목이 잘린다. 우리. 모두. 다."
과거 오그웬에서 잘렸던 왼팔에서 환통이 일어나는 착각 속에서, 한 때 황급 모험가였던 아브남은 치를 떨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부하들은 그들의 대장이 술에 취할 때마다 입에 담았던 경험담과 한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개 같은 서부, 좆 같은 오그웬, 빌어먹을 엘드미아. 반드시 기억해 이 새끼들아. 엘드미아 에가라는 이름을 듣고도 거기에 엮이는 새끼들은 다 뒈질 줄 알아. 어차피 엮이면 뒈질텐데 그래도 뒈질 줄 알라고 씨발!'
수년간 이어져 온 똑같은 술주정 레퍼토리. 그만큼 인생에서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그 사건을 떠올린 아브남은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씨발, 그 뒤로 서부엔 얼씬도 안 했는데. 그나마 수도에만 있는 거 같더니 왜 갑자기 남부까지 오는 거야..."
제발 자신에 대한 소식이 엘드미아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