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위치까지 문서로 받은 마당에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 것도 없었기에, 준비를 마친 우리는 도적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별도의 지시사항이 있었던 건지 기존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불심검문에 가깝게 마주친 순찰대와 경비병들은 탐탁지 않아 보이는 반응과 달리 쿤즈가 같이 준 의뢰서만 내밀어도 프리 패스로 통과시켜줬다.
덕분에 지금 이 도시에 만연한 적의가 의도적으로 모험가에게 향하도록 계획된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 일행들은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지, 높으신 분들 사정에 맞춰 아무 죄도 없는 모험가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거니까. 길드장이 무슨 배짱으로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엄연히 중범죄다.
"으으, 뭔가 정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중에서도 자칭 엔글렘 토박이 센은 그런 반응이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 메르델라와 칼스 그리고 바이제도 같은 입장이라 그런지 비슷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길드장이라는 위치가 딱히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도시에 만연해 있었을 텐데 정말 모르고 살았나 궁금하기도 해서 물어봤더니 한차례 고민을 마친 센이 힘없이 대답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열심히 살면 무난하게 살 수 있으니까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경쟁자도 많고, 일도 많으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수로로 향하는 동안 들어 본 엔글렘 모험가들의 일상은 조금 미묘했다. 의뢰의 보수는 다른 도시보다 적고, 모험이라 부를 만한 일보다는 도시 잡무의 비중이 높다. 점차 경력이 올라가며 위험도가 있는 의뢰를 처리하게 되는 게 아닌 이상 저급 모험가들은 거의 일용직 노동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의뢰가 많다 보니 벌이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도시 내에서 이뤄지는 의뢰들이라 장비를 맞추는 과정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경우가 드물다.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초보 모험가들의 사망 및 실종률이 압도적으로 낮다고 한다.
이런 구조로 시장을 조정하며 생긴 수익을 전부 모험가들의 복지에 투자했다면 굉장히 좋은 선례로 남았을 것이다. 그걸 해먹었을 것이 너무나도 뻔해서 문제지.
"처음부터 여기서 시작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는데, 다른 곳에서 아등바등 버티다가 유입되면 꽤 나쁘지 않은 곳이란 말이죠. 그냥 도시 특징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모험가라는 인력을 제멋대로 쓰기 위해 이곳저곳에 손을 많이 댄 거 같긴 해요."
당장 내가 보기엔 사업체를 운영하며 단가 후려쳐서 남겨 먹고, 인건비를 깎아 또 남겨 먹고, 그걸로 실적을 내서 인정 받은 뒤 또 새로운 일을 받아 같은 짓을 반복하는 구조에 가깝다 보니 거부감이 엄습하지만 그들은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나보다.
그녀의 말대로 먹고 살만했으니까 그랬겠지. 뭐, 정작 손해를 볼 때는 모험가만 손해를 보고 길드장은 이익만 챙겼을 게 뻔하지만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알 일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원치 않게 당사자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체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모험가란 뭘까..."
영 기운 빠져 보이는 센 일행을 보며 세네란이 나직이 중얼거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더 우중중한 지하 수로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열심히 걷기만 했다. 그나마 도착하자마자 수로에 큰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긴 씨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들어가서도 한동안은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도시에서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곳이라 수로의 입구는 나름 깔끔할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보안장치도 덧대어져 있었다.
물론 여기로 도적들이 도망친 게 뻔한데도 우리 말고 주변에 다른 병력이 없다는 건 좀 문제가 많아 보였으나, 이젠 이 도시에 기대를 하면 안 될 상황인지라 어이없음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시간 낭비로만 느껴졌다.
"음. 이티스엘의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로군. 아예 모르는 구조가 아니라는 건 좀 아쉽지만, 내부를 예측하기 편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이미 도적들의 손에 깔끔하게 작살난 자물쇠와 철문을 지나 묘하게 밝은 내부를 잠깐 살펴본 긴 씨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가엔달이 따라 웃어 보였다.
"긴 씨 덕분에 이런 곳에 발을 디뎌도 항상 걱정이 없군요. 지도를 꺼낼까요?"
"아닐세. 지도는 아까 외웠어. 이번엔 안전을 위해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와, 그 복잡한 걸 외웠다고? 혹시 나만 못 외웠나 하고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지만 일행들 역시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심지어 아실리에마저 깜짝 놀라 그에게 되물어볼 정도였다.
"긴 씨는 모험가 일을 하기 전에 대체 어떤 일에 종사하셨던 건가요? 제가 봐 왔던 드워프들도 다들 뛰어난 이들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한 수로 설계도를 외우지는 못 했는데."
"껄껄, 그냥 요령의 차이일세. 그래도 대단해 보이는 거 같아 기분은 좋구만."
아실리에가 만난 드워프들이 하나같이 요령이 없었을 가능성보다는 긴 씨가 특출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으나, 굳이 파고들어갈 이유도 없어서 그냥 납득하기로 했다.
그 뒤로 횃불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긴 씨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정말 괜찮은 건가 싶으면서도 따라 들어갔더니 내 예상과는 다르게 뭔가 말로 형언하기 힘든 푸른 광원이 있는 것처럼 주변이 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신기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날 뻔 했는데, 정작 주변 사람들은 이 기묘한 광경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며 질문을 던질 낌새도 없어 보인다.
"근데 여기 왜 이렇게 밝습니까? 뭐 발광체라도 있는 건가?"
그 반응을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같으면서도 호기심이 동해 조심스럽게 긴 씨 곁으로 다가가 넌지시 물어보자, 긴 씨가 매우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올리며 말을 꺼냈다.
"음? 자네, 고대 건축물은 처음인가?"
"제가 이래 보여도 아직 어려서 견문이 좀 좁은 편입니다."
"껄껄. 이거 워낙 닳고 닳은 모험가 같은 모습을 보다 보니 자꾸 잊어버리는군. 정확히는 마법이라네. 뭔가 시야가 전체적으로 파란 물감을 묽게 칠해진 거 같지?"
"정확합니다."
굳이 따지면 나이트 비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느낌인데, 색상만 밝은 파란색인 상태다. 그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마력시를 통해 바라본 수로는 촘촘하게 흩날리는 마력의 향연 그 자체였다.
아무런 위화감도 못느꼈는데 마법의 영역에 들어오다니, 이게 공격마법이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지만 최대한 태연함을 연기했다.
"실제로는 주변이 밝아진 게 아니라 가시可視 마법이 사람에게 작용하는 것이라네. 이곳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 공간인 셈이지."
"...그거 굉장한 거 아닙니까?"
"굉장한 거 맞네. 몬스터가 둥지를 틀 위험이 있음에도 이런 수도를 매몰시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마법만 굉장한 게 아니거든."
긴 씨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지하 수로 전체가 고대 기술력의 총집합과도 같다고 한다. 건축에 관한 부분은 점점 발전해나가고 있는 반면에 마법과 관련된 기술들은 종종 따라잡기 힘든 것들이 보인다고.
"소실된 기술과 마법 같은 건 유적을 탐험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네. 기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은 아예 국가에서 연구원들을 파견하기도 하지."
"건축 기술은 발전하는데 왜 마법은 과거의 것이 더 뛰어난 경우가 있는 걸까요?"
"흐음, 나도 적잖이 살아왔지만 딱 잘라 말해주기 힘든 의문이구먼. 학자들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분야라서. 하지만 딱히 고대의 마법이 무조건 더 뛰어나거나 한 건 아니라네. 그저 특정 분야 혹은 특정 마법이 툭 튀어나오는 거에 가까워. 세월이 흐르면서 관련 지식이 유실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지."
전생에서의 로스트 테크놀로지는 발전된 과학 기술에 밀려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해 이곳의 마법 기술은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보통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니 자네처럼 흥미를 가지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네만, 슬슬 준비를 해야할 거 같군. 소리가 들려."
당장의 의뢰보다도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낸 긴 씨가 도끼를 고쳐잡으며 내뱉은 말에 일행들 모두가 재빠르게 반응했다. 숙련된 이들다운 동작이었으나, 긴 씨는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걱정 말게. 도적들 중 드워프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우리를 알아채진 못했을 테니. 아직 꽤 거리가 있어. 하지만 소리를 들어 보면 적은 수는 아니군. 마법사와 원거리 무기가 있는 친구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습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어찌하겠나?"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싸우는 것만 좀 하는 편이라서 말이죠. 긴 씨의 조언을 따르겠습니다."
"껄껄껄. 좋아, 그럼 지도 좀 꺼내보게. 아무래도 갈라져서 움직여야 할 거 같거든."
실상 원거리 기습 후 당황한 틈을 타 돌격이라는 단순한 계획이었으나, 제 집 안마당처럼 길을 찾아내는 긴 씨와 떨어져 위치를 선점해야 하는 이들에겐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는 긴 씨는 우리와 따로 움직여야 하는 이들을 위해 꼼꼼히 지도에 표시를 해가며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올라가기도 어렵지 않고 공간도 넉넉하다보니 오히려 역습의 위험이 있다네. 센 일행은 아예 같이 움직여서 접근해 오는 놈들에 대비하고, 렐리에와 세네란 그리고 아실리에 씨 쪽에는 가엔달 자네가 함께 움직여주는 게 낫겠군."
"안에 공간은 여유롭겠죠? 괜히 워해머 잘못 휘둘렀다가 어디 하나 무너지면 나 감당 못 할 거 같은데."
농담 삼아 자신의 워해머를 툭툭 건드리며 웃어 보이는 예카트리나였으나 솔직히 그녀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한없이 진담처럼 들렸다.
"그건 가 봐야 알겠지만 지도대로라면 꽤 넓을 걸세. 실제로 비슷한 수로들 역시 그 부근에 공터가 만들어져 있으니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수로에 공터라니, 뭔가 좀 어색하네요."
"고대 지하 수로는 허가된 이들만 사용할 수 있는 도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 일종의 쉼터와 같은 목적으로 만든 거겠지."
엄연히 도시의 오폐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을 도로로 사용하다니 무슨 정신 나간 발상인가 싶었지만, 아무런 악취도 느껴지지 않다보니 조금 찜찜한 것만 견딜 수 있을 경우 못 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번 일에 가장 큰 변수는 아마 마검으로 추정되는 무기를 쥔 도적이 될 거 같은데, 이번에도 자네가 맡을 겐가?"
"그럼요. 이런 진귀한 경험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졸지에 전투에 미친놈 같은 소리를 지껄이긴 했으나, 실력 있는 전사가 쥔 마검을 상대하기도 전에 도적이 쥐고 있는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상대할 기회를 두고 손가락만 빨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