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땐 머저리 같은 부하들 중 하나가 귀족의 헛소리에 넘어가 다 죽게 생겼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게 진짜 한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깨달은 건 그의 손에 마검이 쥐어진 다음이었다. 구체화된 계획과 합의가 오고 간 뒤부터는 용병단으로 활동하던 시절보다 더 빡센 훈련과 예행연습을 해야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실감할 수 있었다.
이건 진짜 기회다.
보샤 백작과 연이 닿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나, 어찌 됐든 간에 그가 준비 중인 반란이 성공만 한다면 크게 떼어 먹을 수 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가 자신들에게 투자하고 있는 물질적인 지원들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장기적인 도움이 된다. 어쩌면 다른 분쟁이 잦은 국가로 튀어서 다시금 용병 활동을 이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고 거리낌 없는 도적질 속에서 도적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던 칸탈라는, 시궁창과 다를 바 없던 인생에 대한 보상이 되어줄 충실하고 밝은 미래를 기다리고 꿈꾸며 살아갔었다.
"씨발, 개좆같은 내 인생에 기회는 개뿔."
사실 기회가 맞긴 했었다.
심지어 보샤 백작과의 연락이 끊기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오고 가던 연락책의 걸음이 끊겼다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상황을 파악한 칸탈라에게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그냥 다른 나라로 향했으면 나쁘지 않은 평판의 용병단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건 마검 뿐만이 아니었다.
관문도시 엔글렘 습격 작전 계획서.
본디 보샤 백작의 반역이 시작되고, 엔글렘의 인사들이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고대 지하 수로를 기반으로 도시에 침투하는 방법과 시기가 적힌 그 몇 장 되지도 않는 종이가 칸탈라의 욕심을 부추겼다.
"그딴 개 같은 종이 쪼가리에 휘둘리지 말고 찢어 버렸어야 했는데 씨발."
이미 완벽한 계획이 있으니 노잣돈 챙긴다는 느낌으로 크게 한탕하고 가자.
안일한 판단이었다. 진입은 손쉬웠으나 도시의 방비는 상상 이상으로 체계적이었고, 최종적으로 제대로 된 수확은커녕 부하만 잔뜩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폭주한 마검이 일으킨 대량 학살로 인해 빼도박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친 칸탈라를 기다린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무너져 내린 자신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바위 한두 개가 떨어져 내린 게 아니라 아예 일정 구간이 매몰된 것인지 아무리 돌더미를 파내도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들을 병력으로 쓰려고 하면서도 배신을 염두해 퇴로를 차단하는 장치를 설치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들의 습격을 역으로 이용해 제압하고 엔글렘 고위 관료의 환심을 사려 했는지 이제는 알 방법도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칸탈라 도적단은 갇혔고, 칸탈라는 오른팔에 붙어 버린 폭주한 마검에게 시시각각 의지를 시험당하고 있었다.
"대, 대장. 지금이라도 투항하는 게..."
"이 씨발 새끼가!"
칸탈라가 마검을 휘두르자 나름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입 밖으로 말을 꺼냈던 부하의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씹어먹혔다. 쇳덩이로 이루어진 살점과 핏줄같은 검신이 일렁거리기가 무섭게 생겨난 강철의 이빨이 눈 깜짝할 새에 사람을 씹어 삼켰다. 처음엔 그래도 검처럼 베는 시늉이라도 했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내가!! 내가 마검을 썼으니까! 나만 팔아먹으면 너는 살 수 있을 거 같지?! 이 개 씨발 새끼야!"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던 하반신을 노리고 다시금 마검이 휘둘러진다. 하지만 마검은 하체를 씹어먹지 않았다. 거대한 몽둥이처럼 때려 부술 뿐.
-쾅! 쾅!
"죽어! 죽어 이 배신자 새끼야!!"
그 모습을 보던 도적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굉음과 함께 기이한 웃음소리가 함께 한다. 칸탈라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마검의 검신에서 나는 소리였다.
대량 학살 이후 마검은 확실하게 사용자를 잠식했다.
"허억... 허억..."
혼잣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칸탈라의 눈과 얼굴에는 과도한 핏발이 서 있다. 방금 전의 난동으로 인해 오른손 하완까지 잠식해 있던 마검은 상완을 침범하고 있었다. 저 검에 완전히 잠식당하면 무슨 꼴이 나고, 뭐가 되어 버리는 것인지 도적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내려면 더 많은 피가 흘러야 했는데, 여기 있는 제물은 그들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칸탈라를 활로 쏴 죽이자니 저 마검은 화살과 석궁마저 쳐내고 기어이 공격자를 죽였기에 저항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마검에 죽거나, 도시의 병력에게 죽거나. 결국 그들의 비루한 목숨은 이 음울한 지하 수로에서 끝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또 지껄여봐! 누가 네놈들을 여기까지 이끌어줬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배신을 때려?! 또 날 팔아 먹고 살아남으려는 새끼 있으면 튀어나와!"
"이야, 저게 찐마검이구나? 아주 제대로 미치게 만드나보네."
칸탈라의 눈이 사백안이 되고 도적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실 수준의 폭탄 발언은 공터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들려왔다.
"어떤 새끼야?!"
"나다."
수로에 깔려 있는 마법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볼 수 있게 도와 준다. 덕분에 칸탈라를 비롯한 모든 도적들은 불청객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생긴 것만 놓고 보면 동업자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참으로 껄렁껄렁하고 날카롭게 생긴 청년이었다. 큼직한 키와 딱 봐도 전사인 게 분명한 몸뚱이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위축되게 만들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으며, 그 탓에 가벼운 가죽 갑옷만 착용하고 있었음에도 장비가 부실한 게 아니라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기에 경량화를 선택한 게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하들과 달리 칸탈라는 그런 걸 멀쩡히 느낄 정도로 자아와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잔뜩 흥분한 상태로 기이하게 목을 꺾으며 물었다.
"넌 뭐야?"
그 질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청년이 칸탈라와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었을 때.
-휘익!
짧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남자의 뒤에서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크르르르커어엉!!
동시에 마검이 흡사 짐승과도 같이 울부짖으며 제멋대로 휘둘러졌다. 그러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파공음에 이어 금속이 금속을 갉아버리는 듯한 거슬리는 마찰음이 마검의 이빨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휘파람을 불었던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랄났네 진짜. 저게 마검이야 개새끼야?"
미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도적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아홉 개의 큰 바늘 같은 것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마검을 바라보았다. 산 사람마저 갑옷째로 찢어 삼키던 마검의 아가리에 걸렸음에도 바늘은 꿋꿋하게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도적이 방금 들렸던 휘파람 소리와 바늘의 상관관계를 유추하고 경고를 날리려는 찰나, 이번에는 좌우에서 갑작스러운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스, 습격이다! 마법사다!"
칸탈라가 일으키는 소음에 탓에 아무런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걸 깨달은 도적들은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이미 화염구와 함께 날아든 화살이 무자비하게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간 남의 돈으로 해왔던 훈련과 연습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몇몇은 재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방어에 나섰지만 양쪽에서 날아드는 마법과 화살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면 돌격을 시작한 청년과 그의 일당들로 인해 마법사를 노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사실 어지간히 담력이 좋은 전사라 할지라도 성인 남성 몸통만한 배틀액스와 공성추로 써도 될 것 같은 워해머를 들고 번개처럼 달려드는 적을 맞이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내가 선두에 선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남자만큼이나 거구의 여성이 묵직한 워해머를 마치 창처럼 꼬나든 채 돌진한다. 그것만으로도 도무지 상대할 길이 보이지 않아 도적들이 거리를 벌리면 마법과 화살이 명줄을 끊고, 어중간하게 막아서려는 이는 그저 밀려드는 워해머에 머리가 깨진다.
실로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가는 도적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올곧게 마검을 향해 돌진한 여성은 아무런 기합도 없이 그대로 빙글 몸을 돌리더니, 달려들던 기세를 실어 아직도 쇳조각을 씹는데 열중인 마검을 향해 워해머를 휘둘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휘둘러진 워해머와 마검이 격돌했다.
-까앙!
-캐갱!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원심력을 담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그 행위에 마검이 돌바닥에 틀어박히며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른다. 얼마나 강하게 후려친 것인지 마검 뿐만 아니라 마검과 연결된 칸탈라의 팔뚝에서 살과 근육이 찢어지고 터져 나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피이익! 휘익!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휘파람 소리. 그 신호에 맞춰 마검의 아가리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튕겨 나갔던 아홉 개의 바늘이 빠른 속도로 청년에게 돌아갔다.
동시에 그 바늘들보다 명백하게 큰 바늘 하나가 무방비해진 칸탈라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컥!"
완벽하게 빈틈을 파고든 바늘은 여지없이 칸탈라의 머리를 꿰뚫는다. 거대한 워해머에 짓눌려 아직 바닥에 박혀 있는 마검 때문에 고개만 뒤로 휙 하고 넘어간 칸탈라의 몸이 잠깐의 경직 끝에 천천히 무너지려고 했다.
"이... 빌어먹을..."
하지만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붙잡은 것처럼 무너지던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개새끼들이...!"
그러자 거꾸로 뒤집힌 눈알과 함께 뒤로 넘어갔던 머리가 목이 부러질 것만같은 기세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힘껏 워해머를 누르고 있던 여성조차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물러섰다.
-크르르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튀어나온 마검이 적의를 불태우며 또다시 짐승처럼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마 한가운데에 마치 뿔처럼 투사체가 박혔음에도 죽지 않은 칸탈라는 그에 호응하듯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적들을 응시했다.
"다 찢어 죽여버려주마!!"
죽거나 전의를 상실한 도적들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칸탈라와 거리를 벌린 여자의 뒤에 서서, 청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저딴 걸 흘리고 다닐 거라고 믿는 병신들 덕에 살아남았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네."
마검과 칸탈라의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않으며, 그는 앞으로 뛰쳐나갔다.